에이스의 무게
‘동민이 저놈이 저런 식으로 경기할 줄도 알았었나.’
하프타임을 알리는 휘슬을 들으며 병렬은 제자의 변화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선수로 뛸 때도, 코치가 되겠다며 연습 때 자신에게 와서 이야기 할 때도 동민이 원하는 전술은 저런 롱 볼 축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동민을 지도하고 있을 때에도 주로 쓰던 전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동민이 펼치고 있는 것은 수비 라인을 최대한 뒤로 빼고 롱 볼로 공격진에 공을 전달시키는 역습 전술에 가까웠다.
‘상대 공격수가 뒤 공간을 노리는 걸 신경 쓰는 건 알겠는데 저놈 성격이면 차라리 오프사이드 트랩을 만드는 쪽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면 팀 성향 상 저쪽이 더 잘 맞아서 그러는 건가. 뭐, 기간이 짧다면 팀 상황에 맞춰서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전술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거지. 그게 좋은 거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동민의 모습에 그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 롱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 중요한 건 네가 이 경기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서 어떻게 이기느냐, 그것뿐이지.’
병렬의 입은 기대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시각, 관객석의 한쪽에서 수연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본선 첫 경기에는 짧고 빠른 패스를 위주로 경기했었지. 전반은 상대에게 계속 말렸지만 후반전에는 약간의 변화와 21번의 활약 덕에 그대로 상대를 눌러버렸어. 우리랑 할 때에도 사이드로 내주는 긴 패스도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은 평소의 템포 그대로 짧고 빠른 패스를 위주로 했었고. 그런데 오늘은 또 롱패스 위주로? 대체 저 사람은 플랜을 몇 가지나 가지고 있는 거지?’
모든 팀들은 그 팀 고유의 성향이 있다.
수연이 매니저를 하고 있는 BU는 안정적인 수비와 빠른 측면 역습을 위주로 하는 축구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팀인 수원 블루 데빌즈는 그와는 반대로 짧은 패스로 볼 소유권을 내주지 않는 축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민이 있는 KFC는 계속해서 경기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런 팀이 정말 있을 수 있는 걸까? 저 팀을 본 적 없는 코치들한테 말하면 아마추어 팀이 저 정도로 변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전술에 대해서 공부할 때에도, 지도자 자격증 시험 때도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어. 한 가지 팀 컬러를 가진 게 아니라 상대 팀에 따라서 전술의 색을 확확 바꿔 나가는 팀이라니. 그런 게 이런 레벨에서 가능할 리가 없는데.’
단순히 공격적인 모습이나 수비적인 모습을 넘어서 아예 템포나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선수들이 각자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부터 어디로 공을 내주는가, 누구를 위주로 경기를 펼치는가도 달라지는 이런 큰 변화를 동민은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수연이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전술을 보여주는 KFC의 모습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체 강동민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볼 때마다 이렇게 놀라게 하는 거지?’
수연은 새삼스레 동민을 보며 침을 삼켰다.
“수고했어. 전반전은 잘하고 있으니 후반전에도 이대로만 하면 될 거야.”
동민은 전반전을 1 대 0이라는 스코어로 마친 후 웃으며 말했다. 수비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공통점을 가진 양 팀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역시 에이스인 박주현이었다.
주현은 측면으로 넓게 벌려준 패스를 받고서 중앙으로 달려드는 종환에게 스루패스를 찔렀고, 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때려 넣은 것이다.
“종환이 형도, 주현이도 정말 잘했어. 특히 수비 세 명 뚫고서 패스해 주고 그걸 곧바로 때려 넣은 건 건 진짜 보는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라운드 밖에서 보는 동민조차 입을 벌리고 감탄할 정도의 개인기와 마무리였다.
물론 주현은 그 골 장면뿐만 아니라 두세 번의 다른 기회까지 만들어내면서 전반전 내내 동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활약을 펼쳤다.
‘겨우 특성 하나 지웠을 뿐인데 경기력이 이 정도로 달라질 줄이야. 진짜로 내가 했지만 믿기지가 않네.’
동민은 환하게 웃고 있는 주현을 보며 새삼스레 전율하고 있었다. [소심함]을 지운 지 단 세 경기 째만에 주현은 팀의 명실상부한 주축으로 올라선 것이다.
“참 수비들 집중력도 지금까지 좋아. 수비 라인 내리는 건 연습 때나 해보고 본선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잘하고 있어. 경태 형이랑 진규 형은 계속해서 상대 투톱 돌아가면서 맡아주고, 병원이랑 수환이 형은 수비 도와서 롱패스 확실하게 먼저 커트해 줘.”
동민은 이기고 있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경기에서 안심했다가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뼈아픈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우리는 급할 거 없으니까 너무 무리한 패스로 역습 기회 주지 말고. 공격진 세 명은 따로 지시 있기 전까지는 전반전에 하던 것처럼 그대로 움직여. 서로 서로 자리 교체해 가면서 막기 힘들게 하는 거야. 그리고 영진이 너도 마찬가지야. 공격의 시발점이 되어줌과 동시에 전방에서 계속해서 미리 압박을 해줘. 그리고 체력 안배 생각해서 이따가 일찍 교체할 수도 있어. 네가 죽어라 뛰어서 이겨도 결승전이 내일인데 여기서 다 불태우고 내일 지쳐서 못 뛰면 안 되잖아.”
동민의 말에 영진은 안도와 불만이 반쯤 섞인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 오전에도 뛰었으니 아무리 어려도 체력 부담이 없을 수가 없겠지. 특히 전반전에 가장 많이 뛰어다닌 사람은 박주현이랑 이종환, 그리고 이영진일 테니까. 슬슬 체력 문제도 미리 생각을 해둬야 해.’
전반전 내내 경기장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공격을 이끌었던 주현과 종환도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영진은 그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수비적인 역할이나 공격적인 역할 중 하나만 주로 맡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방 압박이라는 수비적인 역할과 상대 수비의 틈이 보이는 대로 스루패스를 넣는 공격적인 역할을 모두 맡았던 만큼 체력 소모가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한 골만 더 들어가면 저 세 명은 확실히 바꿔줄 텐데. 지금 나머지 사람들이야 움직이는 반경이 그나마 그리 넓지 않지만 저 셋은 아니니까. 조금 더 체력적인 부분을 생각하고 여유 있게 선발을 짜둘 걸 그랬나…….’
이 경기에서 이긴다면 당장 내일이 결승전이기에 동민의 머릿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겨도 주요 선수들의 체력이 너무 떨어진다면 내일 결승전에 지장이 올 것은 당연한 결과였기에 동민은 고심을 거듭했다.
‘그래, 지금 당장 바꾸는 건 힘들지만 한 골만 더 넣어서 분위기를 굳히거나 안정적으로 끝낼 만한 시간이 된다면 교체를 생각해 봐야겠어.’
동민은 어느새 끝나가는 하프타임에 혀를 차면서 후반전에 쓸 교체 카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반전의 시작과 동시에 동민은 생각하고 있던 교체 카드와 전술을 모두 뒤바꿀 수밖에 없었다.
[서현준]
33세
잘 쓰는 발 : 왼발
성장 가능성 8.1/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9/20
선호하는 플레이 :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우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특성 :
장점 - 캐논 슈터, 드리블러
단점 - 종잇장 체력
현재 컨디션: 6/10
‘아니, 저런 선수를 전반전에 안 쓰고 그냥 공격수로 내주는 롱패스만 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동민은 후반전 시작과 함께 들어온 상대 선수를 보며 충격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전반전 내내 KFC가 상대를 어렵지 않게 틀어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의 전술이 매우 단순했다는 점과 상대적으로 측면 자원이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의 롱패스를 담당하는 중앙 미드필더와 발 빠른 공격수에 비해서 양 측면이 어설펐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 때문에 펼칠 수 있는 전술이 공격수의 머리나 수비 뒤 공간을 노리는 롱패스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저 한 명으로 완벽히 상황이 바뀐단 점이지. 이런 망할. 이런 상황은 생각 못 했다고.’
후반이 시작되고 동시에 들어온 서현준은 그런 단조로운 전술에서 순식간에 측면이라는 넓은 선택지를 마련해 주는 존재였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체력이 안 좋아서 아예 후반 교체 카드로나 나오는 상황을 누가 예상했겠냐고! 그런 괴상한 생각을 하는 건 경태 형 정도나 있을 줄 알았더니!’
예전에 경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며 동민은 이를 갈았다.
만약 동민이 미리 SFC의 경기를 보거나 현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대비를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말 그대로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스테이터스를 못 보는 게 이런 식으로 골치가 아파질 줄이야. 벤치 멤버가 선발 멤버보다 월등히 강할 수 있단 걸 아예 생각도 못 했어. 이렇게 된 이상 체력 안배고 뭐고 제대로 정신 못 차리면 이 경기 한 방에 뒤집힐 수도 있어.’
동민은 등골을 타고 오싹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지? 최시영이 모자란 풀백은 아니지만 박주현이랑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상대로는 영 안 좋은데. 혼자서 개인기로 뒤흔들 만한 사람이라고 저건. 저 사람을 막을 만한 카드가 분명히…….’
동민은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라? 또?!’
시영은 후반전에 새로 들어온 상대편의 우측 윙이 아까 상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쉽게 제쳤단 말이야?! 말이 돼?!’
단 몇 번의 페인트만으로 상대는 경악에 빠진 시영을 뒤로한 채 골문으로 달리고 있었다.
“진규야!”
자신이 슈팅 타이밍에 안 맞을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진규를 급히 불렀지만 진규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어느새 상대는 슈팅 자세를 잡고 있었다.
발 앞을 떠난 공은 커브를 그리며 골대를 향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내민 호재의 손가락을 스치며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 궤도를 보며 시영이 숨을 멈추는 순간, 공은 골문 우측 구석을 강타하고 뒤로 넘어갔다.
“하이고, 저게 안 들어가나, 저게. 운이 영 안 따라주네. 쩝.”
무릎의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한 시영의 앞쪽에서 형준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시영은 오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대의 말에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흔치 않은 기회를 날렸다는 자책이나 분노는 조금도 없었다. 현준은 그저 앞으로 있을 몇 번의 기회 중 단 한 번이 날아갔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그런 찬스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시영 자신을 깔보는 것도, 그 스스로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아닌 순수한 사실을 말하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