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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의 무대 (29/270)
  • 에이스의 무대

    “이거 좀 안 좋은데.”

    경태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기세 좋게 경기를 시작했지만 경기가 시작하자 자신과 진규의 등 뒤를 끊임없이 노리는 상대 9번은 그의 신경을 갉아먹기 충분했다.

    ‘이 발 빠른 아저씨 엄청 신경 쓰인단 말이야. 까딱하다간 또 수비진 그대로 빵꾸 나고 골 먹힐 느낌인데. 그렇다고 다른 한 명하고의 볼 경합을 계속 진규한테만 맡겨두고 뒤 공간만 커버하기에도 뭔가 불안하고. 그러다가 한 번 실수하면 평소 먹히던 패턴으로 먹힐 것 같으니까. 진짜 불안한데 이거.’

    요 몇 경기 동안 골을 먹힌 패턴은 경태도 기억하고 있었다.

    동민이 감독 역할을 하기 전까지는 혼자서 전체적인 전술까지 도맡아 짜던 그가 그런 것을 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최근 몇 경기 동안 클린 시트가 없던 것은 경태를 포함한 수비진 모두가 신경 쓰고 있는 문제였다.

    ‘롱패스로 우리 뒤로 넘기거나 아니면 저 키 큰 아저씨한테 헤딩 붙이고 그대로 세컨드 볼 노리겠단 건데… 동민이는 어떻게 나오려나. 아니, 난 어떻게 하는 게 좋지?’

    경태의 눈은 자연스럽게 동민이 있는 스탠드로 향했다.

    감독인 동민이 따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상대 9번에게 붙어 있자니 동민이 내릴 지시와 충돌할까 봐 불안했다. 반대로 이대로 계속하자니 지금까지처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엄습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또다시 이어진 상대 롱패스를 헤딩 경합에서 이겨 끊어내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신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질 때와는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긴장감이 새삼 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자신이 헤딩으로 끊어낸 공이 사이드라인으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긴장감과 불안감에 입술을 핥던 그에게 동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태 형!”

    동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골문 쪽으로 손짓을 하는 동민의 모습이 보였다.

    ‘뒤로? 수비 라인을 내리라고?’

    경태는 기다리던 동민의 지시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팀의 수비적인 약점은 분명 동민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더 고민했으면 고민했지 생각 안 할 리가 없는 동민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마다 수비진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근래 허용한 대부분의 실점이 실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동민의 머리 한구석에 있을 것이다.

    ‘그런 그 녀석이 이야기한 이상 방법이 있을 거야.’

    경태는 조금 전까지 불안감이 떠돌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다른 수비수들에게 소리쳤다.

    “진규야! 뒤로! 수비 라인 뒤로 내려! 수환아! 너희도 맞춰! 간격 유지해, 간격! 니들하고 우리하고 벌어지면 큰일 난다!”

    어느새 여기까지 동민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경태는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나머지 방법은 하나지. 저쪽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아예 뛸 공간 자체를 안 준다면 그걸로 해결 될 거야. 골대하고 수비진 사이의 공간 자체를 줄여 버리면 수비 뒤 공간으로 제대로 패스 전해주기도 어렵고, 공격수가 뛰려고 해도 가속도도 안 붙을 테니까. 골키퍼가 처리하기도 더 나을 테고.’

    동민은 상대 공격수를 쏘아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수비 라인을 내려서 공격수가 노릴 뒤 공간 자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을 택하면 공격 작업을 시작하는 위치 자체가 낮아지고, 공격을 하는 인원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지만 수비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가 잘못하면 수비진끼리 손발이 안 맞아서 수비 머릿수만 많고 효율성은 떨어지는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래도 경태 형이 수비 라인을 조율할 수 있고, 수비 라인 내리는 것도 어느 정도 연습해 뒀으니 괜찮겠지. 그리고 막아내기만 하면 공격 측에선 우리 팀엔 일개 대학 동아리 팀에서는 치트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으니까 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동민의 눈이 주현을 향했다.

    주현의 개인적인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이미 지났다.

    주현이 움직이는 것 또한 자신이 생각해 둬야 할 일이었다.

    ‘경태 형이 선수가 예상 이상의 능력을 펼칠 만한 무대를 만드는 것도 감독의 일이라고 했지. 그 말이 맞아. 다만 애초에 그런 걸 생각하고 무대를 만들면 그게 예상 이상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경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 쓴웃음에 어제와 같은 무거움은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공격 작업은 주현의 개인 능력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주현의 능력을 애초에 전술 안에 넣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생각을 바꿨어야 했어. 등에 업혀서 가는 승리가 아니라, 내가 직접 그 등에 타고 가는 거야.’

    동민은 마음을 정한 채로 곧바로 지시를 전했다.

    “경태 형!”

    골문 쪽으로 손짓을 하자 경태는 알아들었는지 수비 라인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수비 라인을 내리면 당연히 3선도 뒤로 물러나니까 결국 공격을 하는 건 유성연, 이종환, 박주현, 이영진. 그리고 더 가담해 봐야 때에 따라서 양쪽 풀백이나 중앙 미드필더에서 한 명 정도 인가. 결국 한정된 인원으로 뚫어내려면 박주현의 능력이 필요해. 이럴 때 개인 전술을 믿지 언제 믿겠어.’

    롱패스를 이용하는 상대 에게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동민은 자신의 얼마 되지도 않는 고집을 승리와 바꾸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주현아!”

    동민은 곧바로 주현을 사이드라인으로 불러냈다.

    “수비 라인이 뒤로 많이 물러나 있으니 골을 넣으려면 니 활약이 꼭 필요해. 네가 좌우 측면 돌아다니면서 상대 수비진을 최대한 흔들어줘. 아니, 꼭 측면이 아니어도 좋아. 너한테 수비적인 부담을 최대한 줄여줄 테니까 전방이든 후방이든,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골을 만들어내. 지금 골을 만들어내는 데 제일 필요한 건 네 개인 능력이야.”

    “예?”

    동민의 말에 주현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첫 경기 이후로 자신감이 붙긴 했지만 동민이 자신에게 이 정도로 절박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가 아니야. 수비 라인이 뒤로 물러나 있는 이상 미드필더 라인에서 전방으로 지원해 주기 힘들어. 스루 넣어서 종환이 형 주기엔 거리가 멀고, 그대로 다이렉트로 전방에 넘기자니 수비 숫자가 너무 많아. 저만한 수비를 흔들어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서 길게 내주든 짧게 내주든 니 쪽으로 공이 많이 향하게 할 테니까 왼쪽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공격해. 항상 말하지만 네 실력을 믿고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동민의 눈은 더 이상의 의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현은 어제 첫 경기가 끝나고 스스로의 활약에 기뻤지만, 어딘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붕 떠 있는 동민의 태도에 불안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동민의 표정은 그때의 불안을 날려 버릴 정도로 진지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등 뒤로 동민의 말을 들으며 주현은 다시 그라운드로 달려갔다.

    ‘내가 해야 한단 거구나.’

    사실 동민의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저번 연습 경기에서 자신이 골을 넣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주현의 가슴은 큰 부담감과 약간의 기쁨으로 두근거렸다.

    자신이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부담과 자신을 믿어준다는 기쁨이 함께 공존했다.

    그러나 이번에 동민이 말한, 아예 수비적인 부담까지 최대한 없애고 공격에 매진시키겠다는 말은 가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예전 같으면 절대 못한다고 말했을 것 같은데.’

    예전이라면 말을 듣는 즉시 긴장해서 몸이 굳어질 법했다.

    자신에게 오는 기대가 전부 부담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공 잡고 생각만 많이 하고 있다가 그대로 허무하게 뺏겼겠지.’

    동민이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골을 넣기는커녕 제대로 된 슈팅조차 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너무 많은 생각과 부담감에 제대로 된 타이밍을 놓치고 골대와는 거리가 먼 슈팅을 날리기 일쑤였다.

    ‘형들도 패스랑 개인기는 좋은데 마무리는 진짜 꽝이라는 소릴 듣고 있었으니… 오죽하면 농담이라도 내가 공 잡으면 긴장이 안 된다던 사람도 있었고…….’

    그러나 동민이 오면서 서서히 달라졌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주현을 믿는다는 말을 동민이 계속할수록, 주현은 조금씩 더 자신감이 붙었다.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골도 기록했고, 어느덧 팀 내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어제였지만.’

    동민이 처음 있던 큰 경기에서 얼어 있던 그의 등을 쳐주면서 격려했던 것은 그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장면이었다. 그 격려 덕인지 주현은 멀티 골을 기록했고, 왠지 모르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할 수 있을 거야.”

    주현은 다짐하듯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말을 내뱉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서 왼쪽 측면 수비 지원을 주로 하되, 공격 시엔 가능하면 주현이 쪽으로 볼을 배급해라, 라고 했었지.’

    병원은 조금 전 전해 들은 동민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상대의 롱패스에 대한 대책으로 수비 라인 전체를 뒤로 빼고, 그와 수환 또한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면서 공격진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자 동민이 내린 지시였다.

    ‘감독은 진짜 주현이를 믿고 있네.’

    얼마 전까지는 드리블과 패스는 좋아도 결정적인 때에는 항상 도움이 안 된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던 주현이었지만, 어느새 그는 팀 공격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주축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감독이 온 이후지.’

    사실 병원은 처음 오자마자 주현을 특별 취급 하던 동민을 보았을 때는 의심과 불만이 가득했었다. 지금까지 함께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주현은 그럴 만한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상황에서는 삽을 파기 일쑤였고, 상대 팀이 강팀이라는 이야기나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딱딱하게 굳어져서 평소 실력의 반 정도밖에 못 내는 녀석을 어째서 그렇게 특별 취급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틀렸다.

    몇 번의 경기를 거쳐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주현이 팀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을.

    ‘어제도 혼자서 멀티 골에 1도움, 오전에 있던 경기에서도 후반전에 1골 1도움. 혼자서 우리 팀 7골 중 5골을 만들어낸 셈이네. 특히 본선에 들어와서 갑자기 확 커버린 느낌이란 말이지. 태도도 예전처럼 움츠러들지 않고 좀 달라진 것 같고.’

    본선 첫 경기 전반만 해도 긴장으로 몸이 얼어 있던 주현이었지만, 후반전부터는 아예 사람이 달라진 듯한 플레이를 펼치던 것을 생각하며 병원은 웃었다.

    ‘그래도 진짜 공격의 핵심이면 이럴 때 뭔가 좀 보여줘야지. 위기 상황에서 진면목을 보이는 게 에이스란 소리도 있잖아.’

    경태에게서 공을 받고 달려드는 상대 윙을 제치면서 병원의 눈은 주현을 쫓았다.

    주현은 어느새 왼쪽 측면에서 중앙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감독이 그만큼 믿고 있으니 믿음에 보답해 달라고!’

    병원은 주현이 달려 들어가는 방향으로 힘껏 공을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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