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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의 결과 (27/270)
  • 재회의 결과

    결국 전반전은 내내 KFC가 주도했지만, 골이라는 마지막 한 발짝을 떼지 못해서 스코어는 0 대 0으로 끝나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수고했어. 골은 없었어도 전반전 내내 우리가 주도했잖아. 지금 당장 골이 없다고는 해도 우리가 못했다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냥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뿐이야.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고, 후반전에 한 골이라도 들어가기 시작하면 저쪽 와르르 무너질 거야. 정신 차리고 조금 더 힘내자. 정신 차리고 이 상태로만 경기 풀어가다 보면 분명히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동민은 선수들을 격려하고는 들고 있던 노트를 펼쳤다.

    “후반전에는 영우 형이 조금 더 앞쪽으로 가줘. 저쪽 11번이 좌측으로 나오거나 우측으로 나왔어도 어느샌가 스위치해서 올 거라고 생각해서 계속 과하게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건데, 좌측에 없으면 굳이 형 속도를 낭비할 필요 없지.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상대 수비진 정신을 빼버려. 상대 풀백은 계속 라인 유지하랴, 성연이한테 붙으랴 정신없어 보이니까 거기에 형까지 가세하면 분명히 뚫릴 거야.”

    동민은 원래 나머지 세 명과 같은 높이에 있던 영우의 이름을 펜으로 긋고는 그보다 조금 더 위에 다시 이름을 적었다.

    “또 이 경우에 상대 11번을 계속 묶어둬야 하니까 주현이 니가 좌측으로, 경수가 영진이랑 교체해서 중앙으로. 종환이 형은 저번 경기처럼 좌우 측면 쪽 같이 공간 만들어줘. 기회 되면 주현이랑 성연이는 바로바로 달려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이번에는 아예 공격진의 이름을 전부 지우고 다시 이름을 쓰고서 화살표로 설명을 보충했다.

    “이걸로 공격 쪽 변화는 끝이고. 참, 경태 형, 진규 형.”

    “응?”

    한창 공격진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경태는 어리둥절했다.

    “저번에 그 성깔 더럽고 헤딩 잘하던 놈 있지? 걔 이따가 들어올지도 몰라. 아니, 십중팔구 들어올 거야. 시간 지날수록 저쪽이 더 초조해질 텐데 걔 아니면 골 넣을 만한 애 없어 보이니까 걔를 끝까지 아껴둘 리 없어. 걔 나오면 괜히 감정적으로 말려들지 말고 그냥 무시해 버려. 측면으로 공 가면 무조건 진규 형 하고 둘 중 한 명이 그놈 잡고 나머지 한 명이 공간 커버. 이해했지?”

    “알았어, 걱정하지 마.”

    경태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으며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동민의 예상은 후반전이 시작한 지 5분 만에 들어맞았다.

    역습 골이 필요한 BU가 결국 정기주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여기까진 아예 예상대로야. 이제 선취점만 따면 무조건 저쪽은 무너진다.’

    동민의 생각은 확신이 되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거지!”

    측면에서 공을 끌고 들어오던 주현이 바깥으로 빠지던 종환에게 패스를 내주고, 종환이 지체 없이 골문으로 크로스를 올려 성연이 헤딩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KFC의 선제골이었다.

    모든 것이 동민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제 그의 확신대로 BU가 무너지는 일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확실히 아예 압박 자체가 잘 안 들어오네. 기주 쪽 신경 쓰다 보니 그런가. 아니면 내가 오른발은 아예 못 쓰는 편이라서 여기서는 크로스 못 올리는 거 알고 저러나.’

    오한석은 우측면에서 느릿느릿 걸으면서 최전방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기주는 들어오자마자 상대 수비수들을 자극하는 말을 열심히 쏟아내고 있었다.

    ‘쟤는 입으로 축구 하는 사람 뽑으라면 진짜 국가 대표는 우스울 것 같은데. 아니, 국가 대표가 뭐야. 우주 대표도 하겠다.’

    으르렁대면서 잡은 공을 다시 뒤로 내주는 기주를 보며 한석은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쟤가 계속 저러면서 시선을 끌어줘야 할 텐…….”

    기주에게서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혼잣말을 하던 한석의 입이 멈췄다. 그의 눈은 기주 쪽을 향해 날아가는 롱패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이다!’

    한석은 어느새 최대한의 속도로 골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공은 기주와 수비수의 머리에 맞나 싶었지만 아주 약간의 차이로 뒤쪽으로 빠졌고, 공이 흐르는 자리는 한석이 달리는 방향의 종착점이었다.

    뒤쪽에서 뒤늦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타이밍도, 속도도 늦은 달리기에 발 빠른 한석이 따라잡힐 리 만무했다.

    흐르던 공은 한석의 왼발에 걸리고, 그대로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잘했어! 그거야!”

    수연은 신이 나서 외치고 있었다.

    왼발잡이이면서 좌측에만 익숙했던 한석을 우측면에 위치시킨 이유는 지금 이런 장면을 위해서였다.

    왼쪽 발만 주로 쓰는 한석에게 우측면에서의 크로스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들 중에는 다리를 엇갈려 차는 라보나 킥으로 우측면에서 왼쪽 발로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들도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한석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한석이 우측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속도를 이용해 오프사이드 트랩을 부수고 측면에서 내달려, 긴 패스를 슈팅으로 연결시키는 것뿐이었다.

    ‘저번 연습 경기 이후에 건의해서 우측에서도 뛸 수 있게 연습시키자고 하길 잘했어. 슈팅도 그렇고.’

    수연은 익숙하지 않은 우측면에서의 위치와 슈팅을 연습시키기 위해 한동안 고생했던 것들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적어도 한 방은 먹인 거겠지.’

    “이건 예상 밖인데.”

    동민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현의 돌파를 신경 써서 수비 목적으로 우측에 뒀다고 생각한 오한석에게 예상하지 못한 골을 허용한 상황이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건 진짜 황당하네. 골게터로 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원톱은 미끼고 측면에서 잘라 들어오게 했다… 내가 하던 짓을 비슷하게 당한 기분이야. 뭔가 무진장 씁쓸한데.’

    정기주의 제공권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게 일부러 롱패스로 겁을 주고, 정기주의 머리에 닿지 않는 높이의 롱패스로 수비진 뒤를 노리는 수법은 동민에게 감탄사를 이끌어냈다.

    저번 경기에서 원톱인 종환이 수비수들을 끌고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맡게 하고는 양 측면 공격수가 골을 노리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동민은 자신이 생각했던 수에 똑같이 당한 느낌이었다.

    “아냐, 아냐. 한 골 먹혔을 뿐이고 두 번은 안 당해. 경태 형!”

    멍하게 있던 동민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경태를 불렀다.

    “방금 그렇게 당했다고 원톱 놓치지 마!”

    경태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동민의 머리는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슛까지 할 수 있었던 건 텅 빈 공간 그대로 다 내준 탓이니까 전체적으로 더 좁혀야 해. 그리고 공을 달고 돌파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무조건 측면으로 밀어만 놓으면 될 테고.’

    동민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상대 스탠드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런 전술을 쓴 것은 상대 코치가 아닌 수연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어제 경기 봤다고 들었을 때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노리는 건 생각도 못 했어.’

    자신의 생각 부족을 책망하면서도 동민은 웃고 있었다.

    어제 경기와는 다르게 오늘의 그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경기 종료를 울리는 휘슬이 울리고, 동민은 웃으며 상대 벤치가 있는 건너편 스탠드로 향했다.

    경기 결과는 3 대 1.

    BU의 동점 골로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다시 차이를 만들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우측 풀백인 영우였다. 후반전 시작 후에 더 공격적으로 나서라는 동민의 말을 들은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상대의 골을 그대로 답습해 내는 것처럼 긴 패스가 우측 사이드 깊은 곳으로 흐르자, 영우가 그것을 그대로 크로스로 올렸고 이를 주현이 다이빙 헤딩으로 골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영우는 경기 종료 직전 상대 수비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중거리 슈팅으로 또 한 골을 더 뽑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진 않았네.’

    비록 예상치 못한 상대의 수에 당황하긴 했어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이 빛을 보자 동민은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굳은 표정을 한 BU의 코치와 악수를 나누고 시선을 돌리자 시선 끝에는 수연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시선이 마주치자 웃으며 눈인사를 했지만 그 웃음 속에서도 조금은 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즐겁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기분 좋은 느낌이 동민을 감쌌다.

    “다들 고생했어. 특히 영우 형은 내가 말한 거 이상으로 움직여 줘서 대단했어. 특히 뒤 공간 노리고 빠르게 파고드는 거 진짜 좋았어.”

    동민은 영우를 보고 미소 지은 뒤, 말을 이었다.

    “수비진은 골 하나 먹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상대가 워낙 빠르기도 했고, 아예 노리는 게 그거라고는 예상 못 했을 테니까. 거기서는 원톱 붙잡는 게 맞는 선택이었어. 시영이 형도 그 정도 거리에서 가속도 붙은 상대 잡긴 어려웠을 테고. 그건 우리가 못한 게 아니라 저쪽이 잘한 거야.”

    거기서 탓을 하자면 오한석이 우측에 있는 상황을 오직 수비를 위한 포석이라고만 생각한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동민은 생각했다.

    “밥 먹고 이따가 오후에 4강전 곧바로 시작하는 거 알지? 연락 온 걸로는 4강 상대도 결정 났다던데, 알게 되면 바로 이야기할게. 일단은 쉬고 있어. 곧바로 뛰는 게 힘들겠지만 힘내자. 경태 형, 종환이 형 두 명은 나랑 같이 4강 상대 듣고 좀 알아보자.”

    “그래, 그래. 이럴 때 또 주장을 부려먹는 거지.”

    동민의 말에 경태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야, 이 형은 늙어서 못 가겠다는데? 어쩔래? 그나마 젊은 사람들끼리 가자고.”

    “그러게. 노인 공경하는 셈치고 그냥 둘이 갈까요? 나이 많이 드신 형님은 여기서 푹 쉬시면 되겠네요. 어이구. 여기에 노약자석이라도 미리 만들어둘 걸 그랬네.”

    곧바로 파고드는 종환과 동민의 말에 경태는 짐짓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새끼들이 사람 놀릴 때만 쿵짝이 척척 맞네. 됐다, 이것들아.”

    “원래 다 그런 거죠, 뭐. 뭘 새삼스레.”

    “늙은이 대우해 준대도 싫다고 하네. 늙어서 심술만 늘어난 거 봐.”

    세 사람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끝나고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오늘도 어제처럼 그 지랄했으면 한 대 걷어차려고 했는데.”

    경태를 놀려먹는 장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경태가 동민을 보면서 말했다.

    “아, 그게…….”

    “오늘도 그랬으면 머리 뽑아서 축구공이랑 바꿔야지. 말해도 안 듣는 텅텅 빈 대가리면 그런 거 외에는 쓸 일도 없을 걸. 아니면 그냥 묻어서 비료로 쓰던가.”

    “충고든 위로든 부디 좋은 말로 부탁드립니다.”

    동민은 곤란한 듯 웃으며 말을 하려다 종환의 뒤숭숭한 말에 정색하며 대답했다.

    “뭐, 어쨌든 예전에 종환이 형한테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고, 제가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뭣보다 감독인 이상 제가 불안하거나 그런 거 선수들한테 넘기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는 동민을 보며 경태와 종환은 잠시 눈을 맞추고 각자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을 즐기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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