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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남은 것 (25/270)

마음속에 남은 것

심판의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고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경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경기 결과는 4 대 1.

전반전에 한 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에 나온 주현의 연속 골이 KFC의 골 폭격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 이후 집중력이 흔들린 상대 수비진을 상대로 주현의 크로스를 땅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영우의 골, 그리고 보기 드문 수환의 중거리 골까지 나와 후반전을 완벽하게 압도한 것이다.

‘그리고 경기의 MVP를 꼽으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 저 녀석을 꼽겠지.’

동민은 후반전 들어 상대 수비를 붕괴시킨 주역인 주현을 보았다.

주현은 평소의 어딘가 어색한 웃음 대신, 정말 즐거워 보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야, 진짜 너 오늘따라 아주 날아다니더라. 뭐 잘못 먹었냐?”

“그냥 오늘따라 되게 다 쉬워 보이더라고요. 그냥 될 거 같은 날이라고 해야 하나? 형도 그 중거리 슛 장난 아니었잖아요. 맞으면 죽을 거 같던데요?”

주위의 놀림 섞인 축하의 말에도 주눅 드는 일 없이 대답하는 주현을 보며 다른 이들 또한 그가 어딘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 자, 이겨서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여기 모여줘.”

동민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일단 오늘 이긴 거 축하해. 전반전에 상대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가긴 했어도 후반전 들어와서 완전히 뒤집어 버렸으니까 진짜 잘한 거야. 덕분에 내 돈으로 소고기를 쏘는 일은 한 발자국 더 멀어졌고 말이야.”

그는 미소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주현이 너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이제 쫄지 말고 더 잘 해보자. 다음 경기는 저번에 연습 경기도 했었던 BU야. 저번에 이겨봤으니까 자신감 가지고, 그리고 반대로 저번에 이겼다고 자만하지 말고. 정신 줄 놓지만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그럼 오늘 푹 쉬고 내일 경기 때 보자.”

동민은 드물게 말을 하자마자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경기에서는 이겼지만 이 개운치 않은 기분은 대체 뭐지. 뭔가 찝찝함이 잔뜩 남은 느낌인데.’

분명히 전반전 내내 밀리던 경기를 완전히 뒤집고 대승을 거둔 경기인데도 마지막 연습 경기나 BU와의 경기 때보다 오히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심지어 대회에서 거둔 첫 승인데 왜 이런 거람.’

어딘가 흐릿하게 어두워진 기분을 느끼며 동민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뭘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집에 뭔 일이라도 있대?”

그때 등 뒤에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경태가 평소처럼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요. 직접 뛰는 게 아니어도 경기는 피곤하잖아요. 그리고 내일 시합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둬야죠.”

“그전에는 안 그랬잖아?”

“연습 경기랑 실전은 다르잖아요. 형도 얼른 집에 가서 쉬시는 게 나을걸요. 내일 당장 또 시합이잖아요. 괜히 내일 피곤해서 경기 망치면 안 되죠.”

동민의 목소리가 점점 더 퉁명스럽게 변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가 딱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찝찝한 지금의 기분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싫었다.

“걱정하지 마. 체력은 예전부터 자신 있었으니까. 너도 내가 체력 떨어진 거 본 적 없잖아?”

“형은 몰라도 저는 꽤 지쳤어요. 빨리 가서 좀 쉬고 싶은데요.”

동민은 스스로의 말에 혐오감이 들었다.

‘분명히 기분 좋아야 할 승리인데 왜 경태 형한테까지 짜증을 내면서 이러는 거람.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동민 스스로가 자신의 태도와 기분에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에서도 경태는 그저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거 되게 급하네. 잠깐 이야기나 하고 가도 되잖아, 안 그래? 뭘 그렇게 비싸게 굴고 그러냐.”

웃으면서 달라붙는 경태의 말에 결국 동민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뭐 별건 아니긴 한데…….”

경태는 슬쩍 말을 흐리며 표정을 바꿨다.

“니 표정 꼬라지 보니까 이야기 좀 해줘야겠다 싶어서. 그냥 지나가자니 무진장 마음에 걸리거든.”

“예?”

동민은 얼굴을 굳히며 말하는 경태를 보고 멍하니 물었다.

“너 솔직히 오늘 경기 어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아까 말했잖아요. 지고 있던 경기 뒤집어놓았으니 정말 잘했다고요.”

“근데 표정은 그 모양이야? 그런 표정으로 하는 칭찬을 다들 잘도 믿겠다. 애들이 바보냐?”

경태의 빈정거림에 동민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니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몰라. 애들한테 뭐라고 안 하고 너 혼자 그러고 있는 거 보면 전술 쪽 뭔가가 스스로 불만이란 건 알겠는데, 그런 걸 티 낼 필요는 없지 않아? 왜 니가 혼자 가진 불만을 다른 애들이 받아줘야 하는 건데?”

경태의 말은 동민의 마음을 찔러 들어왔다.

“나 포함에서 다들 이런 대회 본선까지 올라온 게 처음이야. 경험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없어. 그런 상태에서 겨우 이겼는데 감독 반응이 그런 식이면 다들 어떻게 느꼈을지 알아?”

“…죄송해요.”

동민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경태의 말은 지난번 종환이 했던 말과 결국 같은 것이었다.

‘감독이라면 일단 선수들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저번 예선 때랑 달라지질 못했어.’

한 번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고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동민은 마음이 무거웠다.

‘내 감정이니 뭐니 그런 것보다 경험이 부족한 팀원들을 이끄는 걸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경태의 목소리가 다시 밝게 바뀌었다.

“뭐, 됐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대충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대충 마무리 짓자. 이런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 오래하는 건 나도 피곤하고. 근데 정말로 넌 뭐가 마음에 안 든 거였어? 전반전에 실수로 실점한 일? 아니면 전반전에 상대한테 끌려갔던 거?”

경태의 물음에 동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전반전 실점은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한 이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실수였고, 그것은 별로 분하지 않았다.

전반전 내내 끌려간 것도 자신이 상대 리베로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탓이지만 실점 이후에는 그에 맞는 전술을 짰다.

‘내가 가장 분하고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동민은 조용히 입을 열고 답을 말했다.

“…주현이요.”

“응? 무슨 소리야? 걔가 왜? 평소보다도 훨씬 잘했잖아. 뭔가 잘못 먹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도 시원시원하기도 했고.”

경태는 동민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후반전에 주현이가 혼자서 수비 다 무너뜨렸던 거, 저 거기까지 전술 짜고 준비한 게 아니었어요. 상대 공격 시작 부분부터 끊고 종환이 형이 수비 끌어내고 흔들면서 공간 만들어내는 건 생각했었는데, 주현이가 측면에서 그냥 다 무너뜨리는 건 제 계획이 아니었다고요.”

풀 죽은 동민의 말을 듣고 있던 경태의 눈이 의문으로 찌푸려지더니 이윽고 허탈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오늘 이긴 건 니 탓이 아니라 박주현이 혼자 잘해서 이겼다, 그게 너는 지금 마음에 걸린다 이거야?”

동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머리로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업혀가는 듯한 느낌의 승리는 동민의 성에 차지 않았다.

‘거기다가 다른 입장에서라면 모를까 스테이터스를 볼 수도, 심지어 포인트를 이용해서 한정적이나마 손댈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그냥 업혀가는 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민의 머리에 경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니가 애새끼냐? 열 살짜리 초딩 꼬맹이야?”

“악!”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동민을 보여 경태는 말을 이었다.

“니가 승부욕하고 의욕이 넘치는 건 좋아, 근데 그런 거 신경 쓰다가 정작 신경 써야 할 건 못 쓰잖아. 니 말대로 오늘 이긴 건 주현이 공이라고 하자, 그럼 그걸 걔한테 제대로 칭찬해 줬어야지. 표정 뚱해져서 그러면 애가 그걸 칭찬으로 듣냐? 어이구, 이 화상아. 이럴 땐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냐?”

고개를 젓는 동민을 보면서 경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구 한 명이 바꿀 수도 있는 게 경기지만, 그 무대를 만드는 게 감독이잖아. 니가 오늘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주현이가 됐든 다른 사람들이 됐든 오늘처럼 니 예상 이상으로 잘 할 수 있게 무대를 짜도록 생각해 보던가. 내 말이 틀려?”

“아뇨…….”

잔뜩 수그러든 동민의 대답 소리를 들으며 경태는 다시 한 번 동민의 머리를 후려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멍청이처럼 이러고 있지 말고, 기분 풀고 가서 내일 경기 준비나 해. 아까 끝날 때 보니까 그때 그 BU 매니저였나 하던 여자 우리 경기 봤던데 지면 겁나 쪽팔린 거야, 알지?”

“그 사람이 있었다고요?”

동민의 목소리가 급격히 높아졌다.

“그래, 경기 끝나고 나서 슬쩍 훑어보는데 중간쯤에 앉아 있더라고. 니가 저번에 분명히 다 알려줘도 질 리가 없니 뭐니 했으니까 지면 개망신이야. 애들한테 니가 미인계에 홀려서 상대 팀에 작전 유출 다 했다고 다 소문낼 거니까.”

“아니, 자꾸 이상한 소리 퍼뜨리려고 하지 마요!”

경태는 뒤에서 들려오는 동민의 항의를 무시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동안 뒤에서 따라오던 항의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결국 동민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관두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거는 갈수록 묘한 놈이네.’

경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향하는 후배를 보며 생각했다.

서로 안 지 3년이 되어가지만 근래의 동민은 전과는 다르게 꽤 복잡했다.

어느 때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무거운 소리를 내뱉는가 하면, 조금 전과 같은 때에는 사춘기 꼬마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원래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음울한 면이나, 조금 제멋대로였던 면은 있었지만 요즘의 동민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정신이 없었다.

연습 때 혼자서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중얼거리지를 않나,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면서 표정을 굳히기도 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알던 그의 후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뭐, 감독으로라도 다시 축구랑 가까워졌으니 그러려나. 맨날 기분이 시궁창 바닥에 있는 거보다는 나으니 괜찮겠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 내 걱정이 먼저지. 진짜로 내일 경기 망쳐놓으면 안 되니까.”

경태는 고개를 흔들어 동민에 관한 생각을 그만 털어버렸다.

모두의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관객들이 훨씬 많은 곳에서 축구를 한다는 것은 예상 이상으로 그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다.

주장이라는 책임감으로 경기가 끝나고까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였지만 이제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내일 잘 해야 할 텐데…….”

혼잣말을 하는 경태의 머리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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