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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1) (20/270)
  • 폭풍 전야(1)

    “직접… 이라.”

    집에 돌아온 동민은 아까 전 병렬과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감독님이 하는 훈련들과 논문 등에서 찾은 훈련들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조금씩 바꿔가면서 했을 뿐이지, 내가 직접 더 생각을 한 게 아니니까. 감독님 말이 맞지.’

    그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서 자신 있어 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지금 당장 연습 메뉴를 바꿔서 하기엔 본선이 코앞인데…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제대로 된 공부가 필요하겠어.’

    동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너 또 안 씻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니? 얘,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침대에 누워 씁쓸한 마음을 달래려는 찰나에 닥친 어머니의 방문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신데요?”

    “요즘 공부 제대로 하고 있니? 네가 선배 동아리 돕는다는 건 좋은데 그것 때문에 괜히 성적이라도 떨어지는 거 아닌지 걱정이 돼서.”

    “어?”

    그 말에 동민은 저번에 어머니에게 아는 선배의 동아리를 돕는 중이라고 둘러댄 말을 떠올렸다.

    “아, 응. 괜찮아요. 동아리 돕는 것도 공부도 잘 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면 다행인데 요즘 들어선 집에 와서 과제 하는 일도 없고, 매일 늦게 들어오길래 걱정돼서… 수업이나 그런 건 잘 듣고 있는 거지?”

    동민은 그 말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서 수업은 거의 얼굴만 비추고 도서관에서 논문 찾거나 연습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혹시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셨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축구 감독이 되겠다는 꿈은 가졌지만 아직 부모님께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 그였다.

    ‘아직 제대로 보여 드릴 게 없으니 말을 할 수가 있나.’

    부모님에게 자신이 축구를 하는 사람들의 능력치가 보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축구 감독의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면 당장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말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서 자격증 준비할 때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럼요. 당연하죠. 이제 정신 차렸다니까요.”

    “알았다. 괜한 걱정했나 보네. 얼른 가서 씻으렴.”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방문을 나섰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의심이 남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욕실로 향하는 동민의 발걸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한국의 낭만주의는 일반적으로 3.1 운동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이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다음 날, 교수의 자장가에 가까운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동민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부모님한테 확실히 말씀은 드려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날려먹은 시간이 많으니 쉽게 받아들이실 거 같지는 않은데.’

    “뭐야, 어제 잠이라도 잘못 잤냐?”

    얼굴을 감싸 쥐고 고민하는 그에게 뒷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민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경태가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요.”

    “어이구, 그러셔? 근데 말 편하게 한다더니 또 웬 존댓말이냐?”

    “지금은 감독으로서가 아니니까요.”

    동민의 말에 경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잡도 하지. 그런 거치곤 얼굴이 죽을상인데? 또 뭘 가지고 밤을 지샜길래 그런 꼴이야?”

    동민은 슬쩍 넘기려고 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왜 항상 이럴 때만 눈치가 좋은 거야, 이 인간은. 저번에는 진짜 더럽게 눈치 없더만.’

    “별일 없었다니까요.”

    동민은 한 번 더 말을 돌려 보려 했지만 경태는 그저 웃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휴, 알았어요. 이번 수업 끝나고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어차피 오늘은 연습도 없고 형도 이거 마지막 수업이시잖아요.”

    “진작 그럴 것이지.”

    결국 동민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동민은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경태에게서 다시 교수의 설명으로 의식을 되돌렸다.

    “…이상 수업을 마치겠고 저번 수업 때 레포트 제출 못 한 사람은 제출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동민은 술집에서 경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예전을 생각해 보면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과거로 돌아와 둘이 술을 마시는 일은 처음이었다.

    “술 좀 들어갔으니 이야기 좀 꺼내봐. 결국 무슨 일인데 그래? 그냥 대회 관련 문제로 고민하는 얼굴은 아닌데.”

    “그게 얼굴로 보여요?”

    경태의 말에 동민은 무당이 따로 없다며 기가 막힌 얼굴로 말했다.

    “그냥 느낌이 그래. 그런 문제라면 뭔가 답을 짜내려는 표정인데 지금은 그냥 답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라서.”

    “…와, 제 표정 읽는 거 반 정도만 예현이한테 쏟았어도 지금쯤 둘이 팔짱 끼고서 걸어 다녔을 텐데.”

    “얌마,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동민의 감탄 섞인 야유에 경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동민은 조금 더 놀리면서 보복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은…….”

    동민은 아직 부모님에게 축구 감독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지금껏 시간을 낭비하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말했을 때 그들이 과연 믿어줄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단 해보면 되는 거 아냐?”

    경태의 답변은 단순했다.

    “아니, 말을 하긴 할 거지만 지금 당장은 지도자 자격증 준비도 안 되어 있고 해서요. 대학교 와서 항상 알아서 한다고 말해놓고 술 먹고 노는 게 다였으니 보여 드릴 만한 거 없이 믿어주실지도 좀…….”

    동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갔던 과거를 바꾸려 하는 자신의 상황에도, 그보다 더 예전의 행동 때문에 고민을 한다는 상황이 한숨을 자아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지. 사고 나기 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거랑 똑같은 억지야. 이러느니 조금이라도 대회를 생각하는 게 더 이득이 되겠지만…….’

    동민의 이성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되게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고 있네.”

    “그런 거 말 안 해도 알고 있다고요…….”

    동민은 경태의 말에 대답하며 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자신의 기분만큼 씁쓸한 맛이었다.

    ‘솔직히 고민이라기보단 내가 전에 했던 행동들 탓에 신뢰받기 힘들다는 후회일 뿐이지만.’

    답이 나와 있는 고민은 고민이 아니라 그저 푸념일 뿐이었다.

    “결국 가능하면 빨리 부모님한테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지금 보여 드릴만한 뭣도 없는 널 못 믿으실 거 같다, 이거잖아. 쉬운 이야기를 더럽게 어렵게도 한다. 전술 이야기 할 땐 간단하게 설명 잘도 하면서 왜 평소에는 못 하냐?”

    “그거랑 그거랑 어떻게 똑같아요.”

    경태는 동민의 대답에 고개를 젓고는 소주잔을 입에 댔다.

    “하여간 이상한 놈이라니까. 그럼 대회 때 오시라고 하는 건 어때?”

    “예?”

    경태의 말에 동민은 무슨 이야기냐는 듯 소주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우리 대회 4강부터는 주말이니까 부모님보고 구경할 겸 오시라고 하면 안 되나? 두 분 주말에 출근하신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에 동민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나름 괜찮은 생각 아니야? 네가 지금 맡고 있는 팀이라고 말하고 너 하는 거 보시면 나름 괜찮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뭐, 그것도 보여 드리려면 4강까지는 가야겠지만. 우승 못 하면 꿈이고 뭐고 그전에 금전적인 타격이 먼저 올 테니까 별로 상관없을 테고.”

    술 탓인지 매끄럽게 돌아가는 경태의 혀는 다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괜찮을 거 같은데. 응? 얌마,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대답을 해봐.”

    그 말에도 동민은 묵묵부답인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저기요? 강동민 씨? 너 듣고 있…….”

    “그래! 그거예요!”

    술에 취해 눈뜬 상태로 정신이 나간 건가 경태가 생각하던 찰나 동민의 입에서 환호성이 나왔다.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요! 자격증 아니어도 부모님한테 보여 드릴만한 게 있었네요! 형 진짜 가끔은 머리 좋네요!”

    상이 흔들리도록 열정적으로 말하는 동민을 보며 경태는 지금 이것이 칭찬인지 욕설인지 고민해야 했다.

    “이놈이 오랜만에 술을 처먹어서 그런가, 뭔가 말이 좀 이상한데… 어쨌든 그러면 된단 거지? 거봐, 별거 아닌 걸로 너 혼자 고민하고 있던 거 맞다니까. 나한테 상담하자마자 딱 바로 해결책이 나오잖냐.”

    경태는 동민의 반응을 술김으로 넘기고 우쭐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꼭 필요할 때는 눈치도 더럽게 없었는데 오랜만에 쓸모… 악!”

    “이 자식이 그냥 넘겨줬더니만 한 번 더 치네. 아주 매를 벌어요, 벌어.”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동민을 쏘아보며 경태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럼 이겨야 할 이유가 늘었네. 우리가 실수해서 져도 결국 네 책임으로 보일 거 아냐. 아끼는 후배를 부모님 앞에서 쪽 줄 순 없지.”

    그 말을 하는 경태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형, 고마워요.”

    한참을 말없이 머리를 붙잡고 엎드려 있던 동민에게서 감사의 말이 흘러나왔다.

    “뭘 새삼스레. 그러면 오늘 술은 네가 사던가. 다음 안주는 제육 어떠냐?”

    “가능하면 제육 말고 탕 종류로 합시다.”

    술자리를 잠시 뒤덮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야, 근데 지인짜 뉘가 보기에 우리가 우승할 쑤 있을 거 간냐?”

    일곱 번째 소주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경태가 반쯤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걸 말이라고. 당여나지! 내가 춰음부터 말해차나!”

    그리고 그 말에 반말로 대답하는 동민의 목소리도 그가 마신 술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아니, 그래도 부울안한 건 이따니깐. 난 우리가 본선에 올라간 거만 해도 뒈단한 거라고 생가캤는데, 우승은 진짜 생각또 모태서… 나한텐 대학 졸업 쩐 마지막으로 있는 대회기두 하구…….”

    경태의 목소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암것두 못 남기고 그냥 갈 쭐 알았는데 너도 이러케 오고… 그게, 내 말은, 고맙다고. 시이벌. 우승을 하든 모타든 그냥 고맙따고.”

    결국 경태는 그 말을 마치고 술상에 머리를 기댄 상태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 형은 뭔 얘길 하는 거야. 붕명히 우승한다니칸. 그리고 고맙단 이야기능 눼가 할 소린데 이 인간이 뭔 소릴 하능 거여…….”

    동민 또한 대답을 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결국 두 사람의 술자리는 잔뜩 술에 취해 다음 날 기억하지도 못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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