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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을 위하여(6) (19/270)
  • 본선을 위하여(6)

    “오늘 진짜 지금까지 한 경기 중에 제일 잘했어요! 쓰리백 이라는 큰 변화에도 잘 적응한 수비진들도, 측면에서 전방, 후방까지 전부 뛰어다닌 두 윙백도, 최고의 호흡을 보여준 두 미드필더도, 그리고…….”

    “그냥 다 수고했다고 말해. 죄다 말하려다가 숨넘어가겠다.”

    광규와의 인사가 끝나고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칭찬을 하느라 바쁜 동민에게 종환의 야유가 날아들었다.

    “어쨌든 다들 후반전에 들어서 흠잡을 곳은커녕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하셔서 정말 놀랐어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동민의 입꼬리는 귀에 걸린 듯 내려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저 연습 경기 한 경기뿐인데 왜 그렇게 기뻐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동민에게 이번 경기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개인 기량이 차이가 나도, 그걸 훈련하고 전술로 뒤집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영대의 스테이터스는 KFC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그 개인 기량의 차이를 집중력과 전술로 이겨낸 것이다.

    “그리고.”

    “네?”

    동민은 다시 입을 연 종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보니까 쟤한테는 말 놓고 잘하드만 왜 우리한테는 계속 존댓말이야?”

    “네?”

    “아, 그러게. 다 같이 열심히 노력했는데 특정 선수만 편애하는 건 확실히 좀 그렇지.”

    “아이고, 서러워서 이거 경기 뛰겠나, 안 그래?”

    종환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말을 들으며 동민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아, 너무 신난다고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고 있었네.’

    그는 조금 전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아, 그건 좀 전에 이겼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그러면 아직 그 흥분이 안 가셨을 테니 우리한테도 편하게 말해도 되겠네.”

    동민의 변명을 경태가 웃으며 격추시켰다.

    “아니, 그게…….”

    “언제까지 죄다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려고 그래? 이제 본선인데 아직도 어색하지는 않잖아?”

    “그건 그런데…….”

    “주장으로서 감독의 어투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요청하려는데 불만 있는 사람 거수.”

    “없습니다.”

    경태의 말에 목소리가 겹쳤다.

    심지어 종환조차도 슬쩍 고개를 돌린 채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 좀 편하게 하지, 그러냐?”

    경태는 웃으며 동민에게 재촉했다.

    동민은 그런 경태와 부원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선배라는 호칭은 관두고 형이나 이름으로 부를게. 그러면 되지? 어쨌든 곧 본선 시작이니까 다들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동민은 이제야 정말 그들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본선 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냐. 가능하면 자격증 준비부터 했으면 했는데 갑자기 연락도 뜸해져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했다.”

    동민은 정말 오랜만에 현성고등학교에 와 있었다.

    KFC를 맡게 되고 그를 만나러 오는 횟수가 줄어서인지 병렬은 걱정하고 있던 듯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부탁드려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떠맡는 바람에 좀 정신이 없어서요. 자격증 준비는 이번 대회 끝나면 시작하려고요. 그래도 대회 준비는 나름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연습 경기는 다 이겼으니까요.”

    동민은 병렬을 보며 과장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순조롭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 박주현의 특성을 없애지 못한 것은 약간의 불안으로 남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 성적 안 좋으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텐데. 마음 놓고 있다가 괜한 실수하지 마라.”

    “하하, 알고 있어요. 그래도 마지막 경기까지 어찌어찌 이겼으니까요.”

    동민의 눈 안쪽에는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생생했다.

    지시대로, 아니, 지시 이상으로 움직여 주던 선수들의 모습과 그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던 자신까지.

    선수로 뛰었을 때 이상의 떨림과 흥분이 그를 감싼 그 순간은 명확하게 그의 가슴 안에 새겨져 있었다.

    “연습 경기라면 나한테 이야기해서 애들이랑 잡아도 되었을 텐데. 너는 사람을 써먹을 줄을 모르는구나. 나한테 이야기 한 번을 안 했으니.”

    병렬의 조금 서운한 듯한 말에 동민은 아차 싶었다. 병렬이 지도하는 현성고 학생들과의 경기에서도 분명 배울 것이 많았을 텐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아… 그게, 갑자기 연락드리기도 곤란할 것 같고, 또 저희 팀은 다 성인들이니까 학생들하고 하다가 혹시 충돌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넌 쟤들이 그냥 축구 좀 하는 아마추어들이랑 붙다가 그럴 거 같냐?”

    이런저런 변명으로 둘러대던 동민은 병렬의 이야기를 듣고 시선을 돌려 운동장을 보았다.

    한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운동장을 뛰고 있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동민은 자신의 변명을 다시 곱씹었다.

    ‘아니, 경태 형 정도라면 모를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동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말했어도 시간을 내긴 힘들었을 거다.”

    “예? 그럼 조금 전 말씀은…….”

    병렬을 보자 병렬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동시에 동민은 쓰게 웃었다.

    ‘놀린 거구먼.’

    “그냥 농담한 건 아니다. 꼭 내가 가르치는 팀이 아니라도 내가 연결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니놈은 아예 생각도 안 했잖냐. 하여간 지가 도와달라고 해놓고 제대로 도움 받을 생각이 없으니 바보 같은 놈.”

    “…이제부터는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니가 이 길을 가겠다는데 내가 안 도와줄 거 같냐? 그렇게 내가 말했으면 니가 얻어먹으려고 움직여야지. 도와달라고 말해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내가 다 입에 떠멕여 주랴?”

    병렬의 말에 동민은 새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코치로서의 길을 가는 것을 도와준다는 병렬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본인이 그 길을 가고 있어서인가.’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시시콜콜한 것들로 연락드릴지도 몰라요. 귀찮게 굴라고 하셨으니까요.”

    “너무 귀찮게 굴면 걸자마자 끊을 거다. 야, 임마, 고상한! 너 똑바로 뛰어!”

    밝게 웃으며 말하는 동민을 보며 병렬은 고개를 돌리고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동민은 그런 병렬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이래저래 사람들 운은 좋다니까.’

    동민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가는 길을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병렬도, 자신에게 감독을 맡아달라며 기회를 준 경태도, 자신을 감독으로 인정해 준 다른 부원들도 모두 동민에게는 감사한 인연들이었다.

    ‘이렇게 해놓고 우승을 놓칠 수는 없지. 단순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로 받아놓고 결과를 못 내는 건 나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니까.’

    동민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우승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그나저나 온 김에 애들이나 보고 가라. 너보고 날 도와줄 녀석이라고 소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발길이 뜸해졌잖냐. 애들 앞에서 무안하게시리.”

    “아하하, 죄송합니다.”

    동민이 현성고에 온 것은 단순히 병렬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훈련을 보러오는 것이기도 했다.

    훈련에서는 단순히 콘을 놓고 드리블 연습을 시킨다고 해도 콘을 몇 개를 놓아야 하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두고 넣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그런 디테일한 부분은 아직 그에게는 어려운 부분이었다.

    ‘내가 할 때는 그냥 단순히 드리블 연습이라고만 생각하고 했으니… 나도 참 단순했구먼.’

    선수로 뛸 때를 생각해 보면 훈련은 그저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그것을 짜는 입장이 되자 그 차이는 엄청났다.

    과거로 돌아온 뒤 감독을 꿈꾸는 입장이 되고서 그런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절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짠 훈련도 감독님 훈련 보면서 참고하거나 논문 같은 곳에서 찾거나 하지 않았으면 정말 엉망진창이었을 테니까.’

    자신이 부원들에게 시켰던 훈련들의 대부분은 병렬의 훈련을 보고 따라하거나 논문을 보고 참고한 것이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동민은 부원들에게 어떤 연습을 시키는 것이 좋을지 제대로 감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빈말로라도 대단한 훈련은 아니지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해야 할지 배워가려고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배워가야죠.”

    병렬의 말에 동민은 웃으며 말했다.

    “니가 배울 때를 참고해서 해야지. 어떤 훈련이 어떤 면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때 내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니가 하면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네가 하는 건 반쪽짜리 훈련일 뿐일 거다.”

    “음…….”

    병렬의 말에 동민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내가 그때가 기억이 나야 말이지.’

    동민에게 자신이 선수를 하던 시절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나버린 낡은 기억일 뿐이었다. 몸에 새겨진 기술은 고작 몇 년간의 공백이었지만 기억은 너무나도 멀어서 지금은 그저 ‘이런 것을 했었지’ 정도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표정은 뭐냐? 해봐야 몇 년이나 지났다고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아, 그게…….”

    동민은 우물거릴 뿐 말할 수 없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 아니라 나한테는 20년 가까이 지나 버린 일이라고 어떻게 이야기하냐고…….’

    “그때는 크게 생각 없이 그냥 ‘열심히 하자’ 정도만 생각하고 해서…….”

    결국 동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100퍼센트의 진심이 아닌 말이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심 한숨을 내쉬는 동민을 보며 병렬은 고개를 저었다.

    “에휴, 그때도 머리는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습하는 건 무식하기 짝이 없게 하고 있었구먼. 미련한 놈 같으니.”

    그 말에 동민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 네가 다시 한 번 직접 다 해보던가. 그때 기억을 못하면 별수 있겠냐. 네가 직접 뛰어보고 나서 하는 수밖에 없지.”

    “예?”

    “어느 정도 뛸 정도까진 회복됐다고 했잖냐. 그럼 네가 직접 하면서 생각하란 이야기다.”

    병렬은 무심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동민의 고민 중심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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