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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을 위하여(4) (17/270)
  • 본선을 위하여(4)

    “자, 오늘 연습 끝낼게요! 모두 모여주세요!”

    해가 저물어가는 운동장에 동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일이 본선 전에 마지막 시합이에요. 그동안 쉴 새 없이 연습 경기 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지. 2, 3일 만에 한 번씩 경기 뛰는 게 아무나 해볼 만한 경험을 아니니까… 아니, 그냥 아무나 못할 경험이었다고. 왜 그런 식으로 보고 그래?”

    동민의 말에 종환의 비아냥이 뒤따랐다. 물론 째려보는 경태의 표정을 보며 슬쩍 말을 덧붙였지만.

    “그래도 전부 이겼잖아요.”

    동민은 비아냥거리는 종환의 말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첫 경기 이후에도 종환의 말투는 여전히 거칠고 비꼬는 말이 많았지만, 그 안에 있던 적의는 사라져 있었다.

    “이제 다음 주가 본선이니까 내일 시합 후엔 며칠 동안 푹 쉬시다가 본선에서 잘하시면 됩니다. 컨디션 무너지면 안 되니까요. 그럼 내일 선발 라인업 불러 드릴게요. 골키퍼에 호재 선배, 수비에 우측부터 영우 선배, 경태 형, 지승 선배…….”

    동민이 말하는 라인업을 듣는 팀원들의 표정에 예전 같은 의아함은 없었다. 그저 내일 있을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왼쪽 윙에 경수 선배, 그리고 원톱에 종환 선배. 이상이 내일 선발 명단이고요, 내일 경기할 신영대 축구부는 경태 형이 연습 경기 잡을 수 있는 팀들 중에서는 가장 잘하는 팀들 중 하나래요. 조는 다르지만 본선 토너먼트에서 만날 수도 있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너무 쫄지 말자고요.”

    “가장 잘한대 봐야 첫 시합이었던 부광대도 사실 우리보다 훨씬 잘한다는 소리 듣고 있었잖아. 쫄 필요 있겠냐. 좀 밀린다 싶으면 또 감독이 뭔가 요상한 전술로 이길 테니까.”

    지승의 웃음기 섞인 말에 동민이 고개를 젓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마음 놓았다가 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선배 내일도 그러시면 곧바로 교체할 거니까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뵐게요.”

    동민은 엄격하게 말을 맺고는 연습을 끝마쳤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조금씩 자라났다.

    ‘이런 식으로 방심해 버리면 진짜 곤란한데. 내일 경기도 별 일 없으면 좋겠지만… 근데 왜 이렇게 뭔가 불안하지.’

    다음 날, 그의 좋지 않은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경태 형! 그 공격수 놓치면 안 되죠! 정신 줄 놓지 말고 따라붙어요!”

    “영진 선배! 패스 길 똑바로 봐요! 공간 막혀 있는데 측면에 주면 어떻게 해요!”

    동민은 유례없이 흥분해 있었다.

    ‘젠장할, 수비 실수에서 두 골이나 먹히고 공격은 망가지고 미치겠네!’

    KFC는 전반전이 끝나가는 지금 0 : 2로 끌려가고 있었다.

    첫 번째 골은 경태의 패스 미스가 상대 공격수와 골키퍼의 일대일 상황을 만들었고, 두 번째 골은 날아오는 크로스가 시영의 발을 맞고 그대로 골대로 들어갔다.

    두 골 다 수비진의 실수에서 나온 골이라 동민은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진짜 나쁜 예감은 틀리질 않냐.’

    공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드필더진에서 종환에게 가는 부정확한 패스는 모두 끊어졌고, 측면으로 넘긴 공은 상대 수비수에 막혀 그대로 라인아웃 되기 일쑤였다.

    최전방에서 이를 악물고 뛰고 있는 종환만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공격, 수비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골을 먹힌 건 수비 실수지만 결국 내 책임이기도 해. 상대 스테이터스를 봤으면 더 조심스럽게 전술을 돌렸어야 하는데…….’

    동민은 돌아오는 선수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 팀의 전체적인 스테이터스는 지금까지 연습 게임을 하면서 본 어떤 팀보다도 높았다.

    ‘그중에서도 저 두 사람은…….’

    동민의 눈은 상대 팀 쪽으로 향했다.

    [정윤석]

    23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8.2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6 / 20

    선호하는 플레이 :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측면에서 볼을 끌고 들어옴

    특성 :

    장점 - 드리블러, 스프린터

    단점 - 종잇장 체력

    현재 컨디션: 7/10

    [홍시원]

    22세

    잘 쓰는 발 : 왼발

    성장 가능성 8.1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7.7 / 20

    선호하는 플레이 : 패스 루트를 차단, 아래쪽에서부터 공을 끌고 올라옴

    특성 :

    장점 - 천리안, 두 개의 심장

    단점 - 느린 발

    현재 컨디션: 8/10

    그의 눈은 상대 팀의 공수 핵심인 두 사람에게 닿아 있었다.

    ‘적합도가 7.7에 7.6? 돌아버리겠네, 진짜.’

    상대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홍시원이 볼을 끊고 넘겨주며, 측면 공격수인 정윤석이 수비진을 헤집어놓는다. 그런 상대의 공격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다.

    ‘개인 기량도 저쪽이 훨씬 우위인 데다 저 둘한테 전부 신경을 쏟자니 나머지가 무너질 게 뻔하고… 대체 여기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동민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미안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경태가 얼굴을 구기며 서 있었다. 경태뿐만 아니라 그 뒤의 다른 인원들의 표정도 모두 어두웠다.

    “내가 그런 실수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을 텐데.”

    경태는 경기 초반 자신의 실수를 계속해서 담고 있는 듯했다. 상대 스루패스를 인터셉트하려던 것이 잘못 맞아 완벽한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낸 것은 경태의 마음속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다.

    “…….”

    그 뒤의 시영 또한 자신의 실수에 얼굴을 찡그리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녜요. 이미 지났으니까요. 후반전에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거예요. 아직 반밖에 안 지났으니까요.”

    동민이 억지로 희망적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선수들에게도, 그리고 동민 자신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돌릴 수 있는 거지? 압박으로 홍시원이 공을 잡는 일 자체를 줄여야 하나? 아니면 우측 윙인 심재원을 빼고 김영우를 넣어서 우측 자체를 튼튼히 해야 하나? 아, 젠장. 어떻게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거란 생각이 안 드는데.’

    동민의 머릿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하게 꼬여만 가고 있었다. 전술을 생각해 내야 할 머리는 멈춰 버리고, 선수들에게 희망을 줘야 할 입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동민의 눈에는 불안과 절망만이 보였다.

    “아니, 죄다 풀 죽어 있으면 쟤네가 아이고, 불쌍해라~ 하면서 봐준대? 왜 죄다 이러고 있어?”

    그런 침묵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꿰뚫었다.

    그 말의 주인은 이종환이었다. 전반전 내내 공과 공간을 쫓아 뛰어다니느라 지친 듯, 그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고 숨도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반대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네가 악영향 끼치지 말라고. 네가 더 풀 죽어 있으면 뭐 어쩌란 거야. 그리고 경태 형, 형은 5분 만에 실수한 거 40분 우려먹었으면 됐지 45분 더 우려먹게? 저번에 예현인지 뭔지한테 차인 건 아예 10년 우려먹겠네.”

    종환의 빈정거림은 동민을 넘어 경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종환의 말에 경태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어졌다.

    “아, 아니,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옛날 일이고 지금 아무 상관없잖아!”

    “아니야? 그럼 이건 왜 이따위로 오래 끌고 있어. 꽃다발 들고 갔다가 후배한테 차인 게 더 쪽팔리지. 시합에서 실수 한 번 한 게 더 쪽팔려? 어이구, 거참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시구먼.”

    종환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뿜어버리는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건 맞긴 맞네. 그때 여자 친구 생길 거 같다고 경태 형이 설레발치던 거 생각하면 내가 다 소름이 돋으니까.”

    스탠드에 말없이 앉아 있던 영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까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고 있…….”

    “그럼 종환이 말처럼 아까 실수한 건 왜 계속 붙잡고 있는 거야? 솔직히 나라면 두 개 비교했을 때 100퍼센트 그때 차인 쪽이 더 쪽팔릴 텐데 그건 바로 넘겼잖아.”

    “아니, 그건…….”

    종환과 영우의 말로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느새 바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멍하니 있는 동민에게 다시금 종환의 말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너, 감독 너. 너도 전반전 가지고 생각하지 말고 빨리 후반전에 어떻게 하는 게 맞을지 생각하고 말해봐. 저번에는 딱딱 맞게 잘했잖아. 네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말해봐야 뭐하냐. 빠지라면 군말 없이 빠질 테니까 일단 이기는 전술부터 짜서 이야기해.”

    그 말에 동민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자신 없으면 안 되지. 저번에도 내가 악영향 끼치면 안 된다고 이야기 들어놓고 또 이러네.’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동민은 다시 눈을 떴다. 그 눈에는 조금 전과 같은 불안 따위는 사라지고 자신감만이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잡담 거기까지만 해주시고 지금부터 후반전 전술 설명할게요.”

    동민의 대응책은 상대의 전술만큼이나 단순했다.

    종환에게 향하는 볼을 끊고 공을 배급하는 홍시원에게 압박을 넣고, 동시에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정윤석을 끊는다.

    “영우 선배, 재원 선배랑 바꿔주세요. 영진 선배, 지승 선배랑 교체해 주시고 경수 선배는 주현 선배랑 교체해 주세요. 수비진은 경태 형, 진규 선배, 지승 선배 쓰리백으로 합니다. 민혁 선배랑 시영 선배는 아예 더 올라와서 측면 전체적으로 맡아주시고요.”

    동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대적인 전술 수정을 가했다.

    “수환 선배는 계속해서 중앙 맡아주시는데 언제든 민혁 선배가 있는 우측 같이 커버할 수 있게 생각해 주시고요. 그리고 공격은…….”

    동민은 조금 전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의 밝은 표정으로 전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거참, 이제야 내 진가를 제대로 안다니까.”

    영우는 오랜만에 자신의 본래 포지션인 측면 공격수로 돌아온 것이 즐거웠다. 물론 측면 수비로 뛰는 것이 끔찍하게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익숙한 자리가 마음이 편했다.

    ‘뭐, 세세한 부분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영우는 조금 전 동민의 말을 떠올렸다.

    “영우 선배는 발이 빠르니까 우측면에서 계속 상대 측면을 찔러주세요. 무조건 드리블해서 돌파해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상대 풀백이 뒤에서 못 나오게 계속 뒤 공간 노려주시는 걸로도 충분해요. 계속 그러다보면 저쪽 측면 수비가 신경 쓰여서 저쪽도 제대로 못 나올 테니까요. 덤으로 수비진까지 벌려두면 금상첨화고요.”

    정말로 그렇게 될지 확실하지 않은 동민의 말이었으나 영우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감독이 말했으니 그렇게 되겠지. 지금까지 속고만 산 것도 아니고.”

    몇 번이나 해온 연습 경기는 동민의 지시에 대한 의심을 눈 녹이듯 없애 버렸다.

    ‘그리고 뒤 공간 노리는 걸로 충분하다는 말은 좀 자존심 상하기도 하니까.’

    영우는 감독의 얼굴에 나타날 놀라운 표정을 기대하며 미소를 지었다.

    “종환 선배는 원톱 자리에서 그대로 플레이하시지만 실제로는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종환 선배가 공을 받을 패스 길을 상대가 계속 막으려 하니까 그걸 흔들고 눈속임해 주실… 그, 이렇게 말씀드리면 자존심 상하실수도 있지만 미끼 역할을 해주셨으면 해요. 죄송합니다.”

    종환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던 동민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하는 동민의 표정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걸로 자존심이 상하겠냐.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무것도 못하고 쟤네 페이스에 질질 끌려 다니다 지는 거였으니까. 이걸로 충분하지.’

    종환의 입가에는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주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주현 선배는 위치는 측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마무리 역할을 해주셔야 해요. 위치를 잡는 것도, 한 명 이상의 수비를 혼자 힘으로만 돌파할 수 있는 것도 선배뿐이니까요. 부담스럽겠지만 부탁드릴게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전 선배가 잘할 거라고 믿으니까요.”

    ‘내가 마무리라니, 할 수 있을까.’

    주현은 조금씩 떨려오는 주먹을 움켜잡고 고개를 흔들어 불안을 쫓아냈다.

    ‘아냐, 지금은 해야만 해. 감독님도 말했잖아. 난 잘할 수 있다고.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주현은 결의를 담아 입을 굳게 다물고 골문을 보았다.

    그리고,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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