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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의 감독(1) (8/270)
  • KFC의 감독(1)

    “확실히 사람한테는 햇빛이 필요하다니까.”

    동민은 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다. 아직 이른 오전의 햇빛이 그의 머리 위로 기분 좋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가 이런 이른 시간부터 학교를 향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나중에 팀을 이끌기 위해서는 최대한 공부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아무리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니 뭐니 안다고 해도 제대로 된 지식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게다가 감독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전술뿐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생활체육이나, 스포츠 심리 쪽에서 뭔가 알아놓으면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런 쪽으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독이 될 수 있을 리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논문이나 학술지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그래도 학교 도서관에서 찾는 게 집에서 찾는 것보다 낫겠지. 만약 찾아서 막상 읽었는데 아예 이해가 안 되면 기초 서적부터라도 읽는 수밖에.’

    그가 기대인지 다짐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여자의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여자의 비명에 몸을 돌리자 그의 코앞에 블루 데빌즈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탄 채로 멈춰 있었다.

    “아니, 길 한복판에서 뭐하는 거예요! 지나가는 데 거치적거리게!”

    “예?”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전거전용도로가 꺾이는 길이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뭔 소리야?’

    동민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렸다.

    “아니, 자전거 타는 사람이 조심해야 하는 일을 왜 보행자한테 그래요!”

    “자전거 도로에서 멍하니 서 있는 사람이 이상한 거죠! 자전거전용도로라는 말 몰라요? 자전거전용도로가 사람 멍 때리라고 있는 줄 아나. 아이, 하여간 정신 차리고 다녀요!”

    여자는 그 말만 남기고 홱 하니 다시 달려갔다.

    “아니, 앞에 걷는 사람 칠 뻔해 놓고는 그게 할 말이냐!”

    동민은 울컥해서 소리를 질러봤지만 어느새 그 여자는 코너를 돌아 모퉁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저 여잔 뭐야?!’

    동민은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 상황에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멈춰 있다가, 그는 문득 그 여자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블루 데빌즈의 유니폼, 싸가지 없음, 미인… 어라?’

    동민의 기억이 예전 슈퍼 매치 때의 진상녀에서 멈췄다.

    ‘에이, 아니겠지. 거기서 본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살 리가 있나. 블루 데빌즈 유니폼 입는 여자가 한둘도 아니고. 물론 저런 싸가지는 닮긴 했지만… 에라, 됐다 됐어. 저런 이상한 사람 생각해서 뭐하겠어.’

    동민은 애써 짜증을 달래며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서 가서 책과 논문을 찾으면서 방금 있었던 불쾌한 일들을 전부 잊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동민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졌다.

    도서관에서 책과 논문을 찾다 보니 아침에 있었던 사소한 시비 정도는 까맣게 잊을 수 있었지만…….

    ‘내 상식과 외국어 능력이 이렇게 부실한 줄 몰랐네.’

    논문과 책들을 보는 것은 그에게 아침의 시비보다 몇 배는 더 큰 고통과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논문이 이해가 안 돼서 기초 서적을 찾은 것은 좋았지만, 그 기초 서적조차 읽어 보니 머리가 아파올 정도라는 것은 그의 예상을 아득하게 넘고 있었다.

    ‘공부는 사고 나고 나서 대학 가려고 반짝 한 거 외에는 반쯤 무시하고 살았으니 당연한 건가.’

    동민은 스스로의 무식함에 자괴감이 들었다.

    분명히 오전에 들어왔건만 어느새 창문 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는 돌아가는 길에 관련 서적이라도 몇 개 사 가기로 다짐했다.

    “어? 너 여기서 뭐 해?”

    쥐가 날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도서관을 나오자 운동장을 향하던 경태와 마주쳤다.

    “형, 안녕하세요. 도서관에 있다가 이제 집에 갈까 해서요.”

    “도서관? 너 과제 있었어?”

    “아뇨, 그냥 개인적인 공부를 좀…….”

    말을 하던 동민은 경태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공부? 네가? 시험 기간에도 안 하던 공부를 했다고?”

    있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경태를 보며 동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형은 절 뭐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건데요. 저도 필요할 때가 있으면 공부한다고요.”

    “네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저번 학기 전공 수업에서 D는 안 나왔을 텐데. 그건 착각이냐?”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놀리는 경태를 보며 동민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하이고, 됐어요. 형은 어디 가세요?”

    “난 오늘 연습 있어서.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경기 보다가 그대로 내뺐더라. 너무한 거 아니냐?”

    “네?”

    동민은 무슨 이야기인지 머릿속을 뒤져보다가 그것이 처음으로 스테이터스를 보았을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병렬을 만나러 현성고등학교에 오락가락하느라 바빠서 잊었지만, 처음으로 스테이터스를 본 것은 확실히 경태의 축구 동아리에서였다.

    “아, 그날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아져서…….”

    “괜찮은가 걱정해서 문자했더니 답장은 없고. 그리고 시간 날 때 와서 연습이나 같이 하자니까 그날 이후로는 연습도 안 오고. 이거 참, 이 후배 때문에 서러워서 살겠나.”

    동민은 듣고 보니 그날 저녁에 경태에게서 문자가 왔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물론 동민은 그날 자신이 본 스테이터스와 그것을 써먹을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병렬에게 연락하느라 문자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경태는 그런 동민을 바라보며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그날 진짜 급한 일이 생겨서 정신이 없는 바람에…….”

    “아이고, 걱정한 선배한테 연락 한 번 해주는 일은 급한 일도 아니지. 그렇고말고. 내가 저런 녀석을 술 사주고 안주 사주고 했으니. 이런 정 없는 놈인 줄 몰랐지.”

    경태는 이제 거의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결국 동민은 항복하기로 했다.

    “에휴,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선배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데.”

    체념한 듯 말하는 동민을 본 경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동아리 연습이나 가자. 그걸로 퉁 쳐줄게.”

    결국 동민은 경태의 억지에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수업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던데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거야? 술자리에도 안 나오더니만.”

    팀원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풀면서 경태는 동민에게 물었다.

    동민은 솔직히 대답해도 될지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옛날 고등학교 때 축구부 감독님을 좀 찾아뵙고 있어서요. 가서 여쭤볼 것도 있고 배워야 할 것도 있거든요.”

    “감독님? 갑자기 왜? 너 다시 선수 하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경태를 보며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선수 복귀는 아예 포기했고요. 코치 쪽으로 혹시 진로를 잡을 수 있을지 조언을 좀 듣고 있어요.”

    동민은 낮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과거로 돌아와 다시 찾은 자신의 꿈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하겠지만 만약 대놓고 부정당하면 역시 그건 좀…….’

    그런 동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태는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코치?”

    “네.”

    “너 그럼 지금 그때 그 감독님한테 코치 배우고 있다, 그 말이지?”

    “그렇죠. 이제 막 시작한 거긴 하지만요.”

    동민의 말을 들은 경태는 표정을 굳히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왜 그러세요?”

    경태는 동민의 말을 듣지 않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막 시작했어도 나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일 테고… 어떻게 보면 기회인데… 확실히 나 혼자서 전술에, 연습에 다 짜는 건…….”

    “경태 형?”

    경태는 동민의 말에도 한동안을 더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길래 그러세요?”

    “야, 동민아.”

    “네?”

    “그, 뭐냐. 너 혹시 괜찮으면…….”

    경태는 말을 멈추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우리 팀, KFC의 감독, 해줄 수 있어?”

    경태의 그 말은 그저 평소의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동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경태의 설명은 이랬다.

    그들은 이번 사회인 축구 대회 예선에 운 좋게 올라갔지만, 제대로 된 감독도 없이 주장인 경태 혼자 모든 것을 떠맡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본선에서는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부상자도 있어 백업 맴버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대로라면 힘들게 간 본선에서 곧바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졸업 전에 지금 얘네들하고 최대한 올라가는 게 목표거든. 선수로 뛰어달라느니 뭐 그런 말은 안 할게. 가능하면 우리들 봐주고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경태는 진지한 표정으로 동민에게 말했다.

    동민은 경태의 표정에서 그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나한테 괜찮은 기회는 맞아.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병렬에게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칭찬을 들었고, 점점 더 스테이터스를 보는 데 익숙해진 동민이었지만 그래 봐야 이제야 걸음마를 하는 아이와 같았다.

    ‘확실히 경험도 되고 좋긴 하지만…….’

    고민을 하는 동민을 보며 경태가 말을 이었다.

    “너한테 부담을 주고 싶은 건 아니야. 그래도 나보다는 네가 전술이나 그런 쪽으로 훨씬 나을 테고, 너도 코치 준비하는 데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해서…….”

    경태는 말끝을 흐리며 동민을 보고 있었다.

    동민은 대답 없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코치 준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경험도 아예 없어서…….”

    “그게 뭐가 중요해. 그래도 네가 배우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지금처럼 내가 전부 준비하고 말하는 건 이제 한계야. 날 돕는다 생각하고 맡아줄 순 없을까?”

    동민은 입에서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막히자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형을, 아니, 저 사람들 전부를 이끌 수 있을까?’

    동민은 눈을 돌려 몸을 풀고 있는 다른 부원들을 보았다.

    “제가 한다고 해도 다른 부원들이 그리 마음에 들어할 것 같진 않은데요.”

    동민은 저번 연습 때 그를 보던 몇몇 사람들의 눈빛을 생각했다.

    ‘분명 이 형이야 내가 감독을 맡는 게 팀에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겠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은 다를 테지.’

    연습에 나오는 것만 해도 아니꼽다는 반응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 반푼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면, 그 반응은 볼 것도 없었다.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저번에 네 얼굴도 봤으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혹시 그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거라면 오늘 내가 잘 말해볼게. 어때?”

    경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경태의 반응에 동민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부원들이 오케이하면 제가 해볼게요.”

    “그 말 진짜지?! 그래 바로 이야기해 볼게!”

    안 될 것이 분명하다며 동민은 고개를 저었지만 경태는 그저 기쁜 듯 웃으며 다른 부원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래서 이 녀석이 앞으로 본선까지 우리 감독을 맡아줄 거야. 다들 괜찮지?”

    경태의 폭탄 발언에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경태는 그런 반응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 지금 코치 준비하고 있다니까 아마 내가 봐주고 연습 짜는 거보다는 나을 거야. 경태 너도 정식으로 소개하고.”

    ‘설마 진짜로 이런 식으로 끌고 나갈 줄은 몰랐는데… 다들 당황해서 별말을 못 하는 상황이잖아. 하이고…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동민은 생각보다 더 막무가내인 경태의 행동에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감독을 맡을 강동민입니다. 저보다 나이 있으신 분들도, 어리신 분도 계시지만 제가 늦게 들어왔으니 선배로 모시겠습니다. 선배님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민의 말이 얼떨떨한 부원들에게 퍼져 나갔다.

    그 말이 그가 감독으로서 처음 하게 된 말이었다.

    동시에, 훗날 세계 최고의 감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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