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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길(4) (7/270)
  • 또 다른 길(4)

    휘슬 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되고, 동민의 눈은 이차주에게 고정되었다.

    ‘이차주가 보이는 컨디션만큼 실력 발휘를 해줘야 할 텐데.’

    자신의 능력이 통하는 것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보다, 그와 이차주를 믿어준 병렬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제발 잘해다오…….’

    동민의 기도를 듣기라도 한 듯, 후반전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차주는 전반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반전 내내 현성고의 오른쪽 측면을 제집 드나들 듯 뚫고 들어오던 한수고의 왼쪽 윙인 손흥준은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거짓말처럼 그라운드에서 지워졌다.

    동 나이대에서 보기 힘든 괴물 같은 피지컬과 속도를 앞세운 이차주의 수비는 전반전 내내 구멍처럼 보이던 선수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매서웠다.

    “저걸?”

    또 한 번 이차주가 깔끔한 태클로 손흥준의 공을 따내자 병렬의 입에서조차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동민은 마치 자신이 직접 공을 뺏기라도 한 양 신이 나 소리쳤다. 그가 병렬에게 말한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이차주는 대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역시 문제는 컨디션뿐이었어!’

    동민은 머릿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이차주의 특성 중 장점인 ‘강철 몸’은 문자 그대로 그의 거대한 몸집을 보여주는 특성이었다. 이런 선수를 상대로, 피지컬이 약한 선수가 한정된 공간인 측면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타고난 스피드로 수비수의 뒤 공간을 노리는 것도, 현란한 발재간으로 수비수의 타이밍을 뺏는 것도 아닌 타입에게 이차주가 밀릴 리 없었다.

    ‘결국 내가 보고 생각한 게 맞았단 거야!’

    동민의 손은 벅차오르는 기대감과 긴장감에 굳게 쥐어져 있었다.

    차주는 이를 악물고 뛰고 있었다.

    전반전 내내 경기력이 형편없던 그였다. 하지만 코치인 동민에게 응원을 받고, 틀림없이 자신을 교체할 줄 알았던 감독에게 믿음을 받은 이상 보답하고 싶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몸이 엄청 가볍단 말이야.’

    어딘가 다리가 무겁던 전반전을 보냈지만 지금은 오히려 푹 쉰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아까까지 그를 농락하던 윙어의 움직임은 눈에 빤히 보였고, 자꾸만 마음대로 가지 않고 빗나가던 공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발에 달라붙었다.

    ‘이 정도라면…….’

    차주는 앞에서 그를 제치려던 윙어의 공을 간단히 빼앗고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평소에도 스피드와 몸싸움에는 자신 있던 그였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공을 빼앗아 달리다가 앞쪽의 공격수에게 패스를 하겠지만, 급작스러운 역습에 흐트러진 상대 수비와 가벼운 다리는 그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는 오른발에 힘을 주고, 그대로 내질렀다.

    공은 빠르게 그의 발을 떠나, 골 망을 찢을 듯이 뒤흔들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동민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이던 컨디션이 10으로 올라갔으니 전반전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후반전 내내 차주는 상대 왼쪽 공격을 틀어막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상대의 왼쪽 측면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좌측이 붕괴되자 전반전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한수고 선수들은 당황하다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수비는 병렬이 말했던 대로 들어오는 압박에 제대로 된 패스를 하기는커녕 황급히 걷어내기에 급급했다.

    급하게 걷어낸 공이 미드필더와 공격수에게 전해질 리가 만무했고 그 공은 그대로 다시 현성고 측의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후반전에만 다섯 골을 집어넣은 현성고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다들 고생했다. 전반전에 밀렸는데 후반전에 이렇게 뒤집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정말 잘했다.”

    병렬은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했다. 역전승의 흥분에 빠져 있던 모두를 다시 현실로 되돌리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모두를 칭찬하고 나서 병렬의 눈은 차주를 향했다.

    “그리고 이차주, 넌 기대에 잘 부응했다. 잘했어. 모두들 잘했지만 오늘의 MVP는 너다.”

    후반전에만 들어 2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첫 골까지 뽑아낸 이차주는 명실상부한 이 경기의 에이스였다.

    병렬의 말을 들은 차주는 우락부락한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고 내일 보자. 해산.”

    “고생하셨습니다!”

    아직도 역전승의 기쁨에 빠져 있는 선수들이 가는 것을 보고 있던 동민에게 병렬이 어느 샌가 다가와 있었다.

    “강동민.”

    “예?”

    “아까 네가 보기엔 후반전에 차주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일 거라고 했었지.”

    “아, 그게…….”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동민의 어깨에 병렬의 손이 내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감독으로서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난 의심스러웠다. 너에게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 그렇죠.”

    승리의 기쁨으로 높아져 있던 동민의 목소리는 순간 낮아졌다.

    “혼내는 게 아니니 풀 죽지 마라. 처음에는 몰랐지만… 어쩌면 너한테는 선수를 보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니까.”

    “어… 네, 감사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네가 감독으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수고했다. 다음 연습 때도 맞춰서 와라.”

    병렬은 그 말만 마치고 몸을 돌려 걸어갔고 이내 동민도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등을 돌린 병렬의 귀가 붉은 것을 동민은 미처 보지 못했다.

    “선수로서 최고의 재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쪽으로도 그랬나…….”

    병렬의 혼잣말은 또다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흩어져 갔다.

    병렬과 헤어진 동민은 어떻게 자신이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병렬이 한 말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리고 이미 떠나온 미래에서도 병렬이 동민에게 칭찬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퉁명스러운 말투로 잘못된 점부터 지적하던 병렬의 칭찬은 동민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칭찬… 한 거지? 그 감독님이?”

    동민은 자신의 능력이 통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보다도, 병렬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날 밤 동민의 방에서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다음 날, 공강이지만 동민은 일찍 일어나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어제는 이겼다고 기분 좋아서 웃다가 까먹었지만 그놈의 포인트제인가 뭔가에 대해서 아는 걸 적어놓긴 해야지.”

    어제의 흥분에서 벗어난 동민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어제 처음으로 발견한 포인트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그게 무슨 사기냐며 화를 낼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단, 어제 가지고 있던 것은 1포인트였고… 정확히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동민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승리의 흥분에 제대로 된 기억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에휴, 하여간 이놈의 머리는. 어쨌든 생각나는 것만 적어봐야지. 첫 번째, 어디에서 왔느냐. 이건 아직은 모르겠고.’

    포인트를 소비해서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 포인트를 얻는 방법 또한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어제 포인트라는 존재를 알고 사용하기 전까지 그런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혹시 1년에 1포인트씩 오른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면 평생에 한 번은… 에이, 설마.’

    동민은 어제 자신이 1년, 아니, 평생에 한 번 있을 기회를 소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기회는 중요할 때 이용했어야 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고 고등학교 리그 경기에 쓴 건 아니겠지? 제발.’

    갑자기 떠오르는 불안감을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털고는 펜을 밑으로 내렸다.

    ‘두 번째는 포인트를 활용해서 컨디션을 조정하는 것만 할 수 있는가, 인데. 글쎄…….’

    어제 이차주의 컨디션을 올리는 것에는 1포인트가 들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포인트들을 모으면 더 대단한 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동민 스스로도 희망 사항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컨디션을 올리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인 이상, 다른 일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포인트를 활용해서 선수들 전원의 컨디션을 올리거나 한다면… 생각만 해도 장난이 아니네. 뭐 어차피 이건 가능하든 아니든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면 불가능하니까 지금 생각해 봐야 의미 없네.’

    동민은 늘어만 가던 공상에 X 표시를 하고는 공책을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가능하든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더 생각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국 포인트니 뭐니 해봐야 내가 공부하고 스테이터스를 토대로 전술을 짜는 게 먼저구나.”

    동민은 던져 버린 공책을 주워 책장에 꽂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 그가 공강이면서도 일찍 일어난 이유는 단순히 포인트에 관한 공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웬일로 이 시간부터 일어나 있어? 너 오늘 학교 안 가는 날 아니었니?”

    동민이 머리를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그의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좀 일찍부터 나가보려는 곳이 있어서요. 아침은 안 차려주셔도 돼요. 나가서 먹을게요.”

    “너 이 아침부터 어디를 가려고 그래? 놀러 가니?”

    어머니의 질문에 동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도서관 가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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