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 다른 길(3) (6/270)
  • 또 다른 길(3)

    이차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몸이 무거웠던 그는 상대의 좌측을 밀고 들어가 공격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기본적인 패스마저 실수하며 공격권을 전부 내주었다. 심지어 상대의 좌측 윙에 완전히 유린당하며 실점까지 허용했다.

    주장이면서 팀의 발목만 잡았다는 자괴감과 무력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차주야!”

    악몽 같은 전반전이 끝나고, 교체를 예상하며 걸어 나오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며 다가왔다.

    “코치님?”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곳엔 얼마 전부터 병렬이 자신을 도와줄 코치라며 데려온 동민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코치로 나선 동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누구든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오늘 그의 경기는 여기까지고 곧 감독은 그를 불러 교체를 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차주야! 잠깐만!”

    “죄송합니다. 바로 들어갈게요. 주장 완장은 누구 주면…….”

    “무슨 소리야. 후반전에도 니가 끼고 있어야 하는데.”

    “예?”

    동민의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하고 있던 차주의 등에 충격이 달렸다.

    “악! 코치님?!”

    동민이 차주의 등을 후려갈긴 것이다. 차주는 갑작스러운 동민의 기행에 항의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차주를 보며 동민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그, 뭐야, 감독님이 나 선수 시절에도 힘내라고 가끔 등 쳐준 게 생각나서. 하하… 아무튼 후반전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내.”

    “이게 대체 무슨… 응?”

    동민에게 말을 하려던 차주는 등의 충격이 사라지자 몸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오히려 뭔가 가벼워진 느낌인데. 뭐야, 이거?’

    [강화 조건 충족]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포인트를 사용했습니다]

    [현재 포인트 : 0]

    한편 동민은 눈앞에 떠오른 문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 보이는 것은 그의 놀라움을 한층 더 높였다.

    [이차주]

    19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8.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5.6 / 20

    선호하는 플레이 : 우측 측면 돌파 선호, 얼리 크로스 선호, 몸싸움 선호

    특성 :

    장점 - 강철 몸

    단점 - 아둔함

    현재 컨디션: 10/10

    [포인트로 강화 성공]

    [현재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 0]

    ‘정말 컨디션이 바뀌었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포인트 사용 조건이 ‘신체 접촉을 통해 강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 등짝을 후려갈기긴 했는데…….'

    그는 1이던 컨디션이 단 한순간에 10으로 전부 차오른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제야 그는 포인트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저 포인트라는 걸 쓰면 단번에 선수의 컨디션이 최고로 오른다는 거였어.’

    이런 것은 그가 미래에 하던 게임에서도 없었다. 오히려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사기라며 화를 낼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열한 명의 선수 중 단 한 명의 컨디션이 무너졌을 때 그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 수 있는지 보았다.

    ‘그렇다면 그게 반대로 될 수도 있단 거지.’

    그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단순한 스테이터스를 보는 것을 넘어 그것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생각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포인트라는 녀석은 아예 그런 범주를 넘었다.

    어쩌면 그는 경기를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견에 전율을 느낄 시간이 없었다. 전반전동안 이차주의 플레이는 보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병렬이 그를 교체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병렬을 말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 동민이 이차주의 컨디션을 올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일이 되고 말 테니까.

    ‘어떻게 해서 감독님을 설득한다…….’

    뚜렷한 방법은 없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동민은 병렬이 선수들을 모두 소집하기 전에 그에게 달려갔다.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이따가 말해. 지금은 바쁘니까.”

    예상한 그대로 병렬은 그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동민은 거기서 알았다고 돌아설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바로 병렬을 설득하지 않으면 동민이 한 일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니, 무용지물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야.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놓고도 그걸 못 쓰고 끝나는 거지.’

    본인의 새로운 능력을 알게 된 동민에게 지금의 시합은 단순한 고등부 리그전이 아니었다. 이번 시합을 그대로 놓쳐 버리면 아까 느낀 무력감을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차주에게 전반전에 탈탈 털리기만 하고 그대로 교체를 당하는 최악의 기억을 주고 싶진 않았다.

    “아뇨,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병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아는 동민은 그의 앞에서 강하게 주장을 펼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주위 의견을 듣고 조용히 생각하는 편이었다. 지금처럼 바쁘다는 말에도 고집을 부리는 것은 그가 동민을 본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코치랍시고 완장 하나 줬다고 태도가 바뀔 녀석은 아닐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의심의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를 바라보는 동민의 눈빛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확실히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동민의 눈은 그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 말해야 하는 일이냐?”

    “네.”

    결국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지 않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자리를 옮겼다.

    “간단하게 말해라. 하프타임 안에 애들한테 말할게 산더미니까.”

    병렬의 말에 동민은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이차주를 교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뭐?”

    돌아오는 병렬의 차가운 대답은 당장에라도 번복하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그는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이차주가 후반전에도 계속 뛰게 해주세요.”

    “…선수 교체건, 전술이건 전부 내 권한이다. 그걸 말하는 이유가 뭐냐? 코치랍시고 이름표 하나 던져주니까 네가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아서 그러는 거냐?”

    병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화내고 있겠지? 100퍼센트 욕먹거나 한 대 맞을 것 같은데. 괜히 직구로 말했나.’

    동민은 차가운 목소리에 몸을 떨며 후회했지만 이미 말을 시작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닙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차주는 후반전에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지금 교체하지 말고 시간을 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이십 년 가까이 애들을 봐 온 내 눈보다 요 몇 번 코치랍시고 애들을 본 네 눈이 정확하다는 소리냐?”

    돌아오는 병렬의 대답은 점점 더 냉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동민은 필사적이었다.

    자신에게 스테이터스가 보이고 그걸 이용해서 컨디션을 올려주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해봐야 병렬이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차주는 정말로 후반전에는 달라질 겁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내 권한이다. 할 이야기는 그것뿐이냐? 그러면 이야기는 여기까지 듣는다.”

    ”아, 아니 그게…….“

    동민은 필사적으로 병렬을 설득할 말을 찾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병렬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먼저 자리를 떴다.

    멍하니 떠나는 병렬의 뒷모습을 보던 동민 또한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윤영수 니가 앞에서부터 뛰어다니면서 압박을 넣어야 후방 애들 부담이 줄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그리고 정현이랑 기수 너흰 마크해야 할 저 9번 놓치지 마라. 세 번째 골은 너희가 집중력 잃지 않았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상항이었어. 안 그래?”

    돌아온 병렬은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후반전의 전술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마지막으로 이차주를 향했다.

    “그리고 차주 넌…….”

    “예.”

    대답을 하는 이차주의 눈빛에는 벌써 약간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전반전에 있었던 그의 경기력은 최악이었다. 지금은 왠지 모르게 몸이 가볍지만 지금까지 그가 했던 온갖 실수들을 생각하면 병렬이 당장 그를 교체해도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교체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넌 이제 왼쪽 쟤 놓치지 마라. 후반전에 더 지켜볼 거다.”

    “예?”

    틀림없이 교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주의 눈이 커졌다.

    “귀에 뭐 박아뒀냐? 후반전에 지켜볼 테니까 제대로 하라고. 시간 다 됐다, 나가라. 전반전에 했던 거 잊어버리고 내가 한 말대로 똑바로 하면 후반전에 충분히 뒤집을 수 있으니 낙담하지 마. 이상.”

    병렬의 말을 듣고 놀란 건 동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억하는 병렬의 스타일대로라면 이 정도로 무너진 페이스를 보여주는 선수는 그대로 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혹시 아까 내 말을 들어서?’

    동민은 운동장으로 향하는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고 병렬을 바라보았다.

    “난 네 눈을 믿은 게 아니다. 내가 감독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한 거지. 그러니 내 결정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 마라.”

    그런 동민의 생각을 읽은 듯 병렬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동민은 깨달았다.

    ‘혹시 내가 말한 걸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으신 건…….’

    “결정은 감독의 권한이자 책임이다. 네가 진짜 감독으로서 이 길을 걷고 싶다면 그건 꼭 기억해라.”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병렬은 굳은 말투로 말을 끝냈다. 그제야 동민은 병렬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병렬은 만약 동민의 말 때문에 그가 차주를 남기는 선택을 한 것처럼 된다면, 그 책임을 동민이 스스로 끌어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동민은 가만히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얼마나 생각이 깊은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