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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길(2) (5/270)
  • 또 다른 길(2)

    “오늘은 무슨 일로 또 왔냐? 한동안 연락도 없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참. 선수로 다시 뛸 마음이라도 생긴 거냐?”

    병렬은 찾아온 옛 제자를 보며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쉽진 않을 것 같네요.”

    웃으며 대답하는 동민을 보며 병렬의 기분은 씁쓸해졌다.

    사고 전 다른 부원들보다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동민이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그놈의 무릎 부상만 아니면… 어쩌면 한국 최고의 재능이 될지도 모르던 놈이었는데…….’

    병렬의 깊은 한숨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사그라졌다.

    동민은 자신을 보고 찡그리고 있는 병렬의 표정 속 안타까움을 보았다.

    ‘옛 제자가 축구도 그만두고 백수처럼 찾아오는 게 기분이 좋으시진 않겠지.’

    동민은 졸업하고도 몇 번이나 연락을 해서 몸은 어떠냐, 축구 다시 시작했냐 물어보던 병렬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계속해서 축구부의 연습을 보고 있는 것은 병렬의 기대처럼 선수로서 복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저번 슈퍼 매치를 보게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이 복귀해도 선수로 대성하기는 힘들 거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볼 수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아무리 상대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를 보고 플레이를 한다고 해도 몸이 그만큼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도 없다.

    ‘그래. 선수로서라면 말이지.’

    그는 거기서 생각을 바꾸었다.

    선수로서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면, 그 선수들을 자신이 움직이면 된다.

    어찌 보면 간단한 생각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좋은 생각이었다.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를 볼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빛을 볼 수 있는 방법에 그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없다면 내 팀이 그렇게 하게 만들면 되니까.’

    그는 더 이상 선수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망가졌던 꿈인데 이제 와서 형태가 조금 바뀐다고 해도 서운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연습을 하고 있는 다른 부원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은 이미 선수보다는 감독의 그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지난 연습 시합 때 본 부원들의 스테이터스가 아른거렸고, 머릿속에서는 그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고민하고 있었다.

    “감독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기도 하고요.”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고 이야기하냐?”

    그 말에 병렬은 눈을 돌려 동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축구 감독이 되는 법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그 말을 하는 동민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병렬은 돌아가는 옛 제자, 아니, 다시금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제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감독이라… 생각도 못 했는데.’

    병렬은 동민이 지도자로서의 길을 생각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병렬이 가르쳤던 동민은 타고난 센스와 기술을 가진,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선수이긴 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동안 바뀌긴 바뀌었다는 건가.”

    그동안 몇 번이나 연락했을 때 들었던 텅 비어 있는 목소리와 말 대신, 사고 전과 같이 반짝이는 눈빛을 한 동민은 병렬에게도 옛날 생각이 나게 했다.

    병렬은 동민이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의 재능도 가지고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일단 저 녀석한테 그런 게 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구먼.”

    “감독님, 뭐가요?”

    병렬은 옆에서 들려오는 다른 제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콘이나 잘 정리해 놔.”

    “네. 근데 감독님, 저 선배는 저번에도 오셨던 것 같은데 어떤 선배예요?”

    “저 녀석? 앞으로 잠시 나 따라서 너희 봐줄 녀석이다.”

    ‘그리고 내가 제일 아까워하던 제자이기도 하지.’

    병렬의 다음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동민은 침대에 아까 있었던 병렬의 말을 되새겼다.

    ‘시간 나면 연습 때 나와서 견학하든가. 한동안 너를 코치로 써줄 테니까 와서 알아서 배우라고.’

    동민의 입가에는 자꾸만 미소가 삐져나왔다. 그가 예전에 꾸었던 꿈이 비록 모습은 달라졌지만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분명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그는 이런 기회를 꿈도 꿀 수 없었겠지만, 능력을 가진 지금은 달랐다.

    떨어지기 전에 간절히 바라던 달라진 삶이 보이는 느낌에 동민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할 수 있어.”

    동민은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잠이 들면서 그는 단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한수고랑 시합이요?”

    “그래, 시간 나면 와서 리그 경기라도 보라는 이야기다. 진짜 시합에서 감독이 어떻게 전술을 짜고 움직이는지 봐야 할 것 아니냐. 네가 바쁘면 별수 없다만.”

    “아녜요, 당연히 가야죠!”

    며칠 후, 오늘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성고에 들른 동민은 병렬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능력을 더 알아내기 위해서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경기를 보려는 그에게 이것은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병렬의 무뚝뚝한 반응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생의 리그 경기라고 해도 지금까지 몇 번 훔쳐보던 아이들 축구놀이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고, 경태의 축구 동아리에서는 코치가 아예 없으니 지금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프로 선수들 경기보다는 여러모로 가깝고 말이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미소를 지었다.

    시합 날, 그는 병렬의 옆에 앉아 곧 벌어질 경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동영이 너는 왼쪽에서 파고들고, 성현이가 벌려주면 차주 니가 우측에서 밀고 알았지? 한수고 애들 중에 니가 몸으로 밀고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애 없으니까 자신 있게 드리블 쳐.”

    부원들을 보며 꼼꼼히 설명하는 병렬을 보며 동민은 자신이 감독이라면 어떻게 전술을 짤지 상상하고, 자신이 봤던 부원들의 스테이터스를 떠올렸다.

    벌써 몇 번이나 연습을 보았기에 이제 직접 보지 않아도 그들의 스테이터스가 기억이 날 정도였다.

    ‘확실히 주장인 차주라는 애는 몸이 강점이긴 하지. 아직 상대 팀의 스테이터스가 보이질 않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측면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움직이기엔 더할 나위 없을 거야.’

    그는 자신이 봤던 스테이터스를 생각했다. 이차주의 특징 중에 있던 ‘강철 몸’이란 단어를 생각하며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다 알아들었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상대니까 빡세게 가서 시원하게 이긴다. 알았지!”

    병렬의 말이 끝나고 선수들은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그의 시선은 운동장 전체의 선수들을 모두 훑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곳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어?’

    이차주, 그리고 그와 맞붙는 상대 윙어의 스테이터스에서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병렬이 하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차주]

    19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8.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5.6 / 20

    선호하는 플레이 : 우측 측면 돌파 선호, 얼리 크로스 선호, 몸싸움 선호

    특성 :

    장점 - 강철 몸

    단점 - 아둔함

    현재 컨디션: 1/10

    [손흥준]

    18세

    잘 쓰는 발 : 양발

    성장 가능성 8.6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5.4 / 20

    선호하는 플레이 : 좌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강하게 차는 슈팅 선호

    특성 :

    장점 - 양발잡이

    단점 - 유리 몸

    현재 컨디션: 9/10

    동민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상대의 특성이나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가 아니었다.

    이차주의 컨디션은 동민이 스테이터스를 보게 된 이후로 처음 볼 정도로 낮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1? 컨디션이 최악이라고?’

    반대로 이차주를 상대하는 상대 윙어의 컨디션은 9, 하늘과 땅처럼 극명한 차이였다.

    ‘이대로라면 타입이고 실력이고 필요 없이 이차주가 혼자 무너질 수도 있겠는데…….’

    동민은 등골을 타고 스며 올라오는 냉기를 느끼며 자신의 생각이 제발 틀리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차주의 수비는 상대 윙어의 드리블에 몇 번이나 뚫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기본적인 패스조차 실수를 연발했다.

    “차주 저거 오늘 상태가 영 아닌가…….”

    상대 윙어가 헛발질을 하는 이차주의 공을 빼앗아 골 망을 찢을 듯한 강슛으로 마무리를 짓자 말이 없던 병렬에게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동민의 꼭 쥔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왔다. 그가 보았을 때도 병렬의 전술은 틀리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맞는 옷을 입히고 상대에 대한 대비를 한 전술을 짠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기 시작 전에 컨디션을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이러면 아무리 스테이터스를 봐도 의미가 없잖아…….’

    상대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고, 자신의 팀을 잘 알고 있어도 단 한 번의 실수와 분위기가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스포츠다.

    동민은 자신을 파고드는 무력감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경기의 흐름은 평소 잘하던 선수라도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얼마나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차주의 활약 아닌 활약으로 전반에만 3골을 내리 실점하며 전반전은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또다시 가볍게 자신을 제치는 상대 윙어를 보는 이차주의 표정은 자신의 교체를 예감하는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이차주를 바라보는 동민의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이차주]

    19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8.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5.6 / 20

    선호하는 플레이 : 우측 측면 돌파 선호, 얼리 크로스 선호, 몸싸움 선호

    특성 :

    장점 - 강철 몸

    단점 - 아둔함

    현재 컨디션: 1/10

    거기까지는 지금까지 봐온 스테이터스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는 새로운 문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본 포인트 : 1]

    [얻은 포인트 : 0]

    [현재 포인트 : 1]

    [1 포인트로 강화 가능]

    ‘포인트?’

    처음 보는 문장에 동민의 머리는 그대로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다른 숫자들과 스테이터스에 눈이 쏠려 있던 동민이 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하던 게임에도 포인트라는 제도는 없었다. 오직 선수들을 평가하고, 그들이 각자의 위치와 능력에 맞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그 게임의 목적이었다.

    ‘이게 뭐야? 정체도 모를 게 갑자기 튀어나온 거잖아.’

    그의 이성은 급작스럽게 등장한 ‘포인트’라는 것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믿을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그는 지금까지 보이지도 않았고, 검증되지도 않은 것을 쉽게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성과 행동이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용하겠어.”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이성적으로 뭔지도 모를 것에 기대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고 싶지 않다.’

    어린아이 같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봐도 뒤집힐 수 있는 게 스포츠라면 그걸 또다시 뒤집을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비록 자신의 팀은 아니지만 병렬에게 코치라는 말을 들은 이상 팀이 지는 것을 그대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싶지 않았다.

    유치하다고 볼 수 있을 법한 그의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

    “차주야!”

    그는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차주에게 달리듯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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