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의 하루(2)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빌린 축구화를 신고 일어나자 동민은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자신은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미워하고 멀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준비 다 됐으면 나와! 가볍게 주고받기부터 하자!”
경태의 목소리를 들으며 동민은 운동장으로 향했다.
“형, 저 사람도 몸 풀어?”
운동장에 나서자 경태의 옆에 있던 남자가 경태에게 물었다.
“내가 억지 좀 부려서 시켰어. 예전에 축구 좀 해봤던 애라 니들보다 나을 수도 있을 걸?”
“형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동민은 황급히 경태를 말렸지만 그 말에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뭐 어때, 사실은 사실이잖아.”
“아니, 사고 나고 공 안 찬 지가 몇 년인데 그런 말을 해요!”
“알았으니까 이거나 받아.”
동민은 더 불평을 하려 했지만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공을 잡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공을 잡자 그의 두근거림은 더욱 커졌다.
한때 꿈의 일부이던 것을 자신이 다시 접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억지로 그 생각을 눌러 삼켰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할 필요도 없고, 해봐야 아무 쓸모없겠지.’
“안 차고 뭐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자 경태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아녜요.”
동민은 예전 자신의 꿈에 다시금 발을 대었다.
10여 분의 공 주고받기가 끝나고, 몸 풀기는 어느새 골키퍼가 있는 골대로의 슈팅 연습으로 바뀌었다.
“무릎 괜찮아?”
다른 사람들이 슈팅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동민에게 경태가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었고 형 말처럼 요즘엔 어느 정도는 뛰어도 괜찮으니까요. 한 30분 정도 계속 뛰면 모를까, 이 정도야 멀쩡하죠.”
사실 공을 차면서 동민이 가장 신경이 쓰인 것은 자신의 왼쪽 무릎이었다. 10여 분 정도 뛴다고 무리가 가진 않겠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럼 너도 한번 차봐.”
“제가요? 전 경기 뛰지도 않는데 뭐하러 슈팅 연습을 하고 있어요. 괜히 다른 사람들 연습하는데 방해나 되지.”
“너 몇 번 찬다고 방해가 되겠냐. 야! 여기 공 줘봐!”
경태는 동민의 말을 코웃음으로 넘기고 다른 부원들에게 말했다. 날아든 공을 동민의 앞으로 굴리며 경태는 웃고 있었다.
“한번 차봐. 예전에 자주 했을 거 아냐.”
“그건 그런데… 하아, 이상한 곳으로 가도 몰라요.”
“운동장 너머로 가면 네가 주워오면 되는 거지 뭘.”
동민은 찬 공이 저 멀리로 날아가고 경태가 폭소를 터트릴 걸 예상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공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도움닫기 후 찬 공은…….
“뭐야, 저거?”
“방금 누가 찬 거야?”
골키퍼가 반응하지도 못할 속도로 골대 구석에 꽂혔다.
골키퍼도, 그리고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들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슛이었다.
“어?”
그러나 그 슛에 가장 놀란 건 동민 자신이었다.
‘오랜만인데 아직 이 정도가 되네?’
사고 이후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한 몸이었지만 아직 킥력이나 정확도는 남아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예? 무슨 소리예요?”
옆에서 들려오는 경태의 혼잣말에 동민이 물었다.
“학교 골목 아래 오락실 있잖아. 거기 축구공 차는 기계 기록 안 깨지는 거.”
“갑자기 그건 왜요?”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빠진 경태의 이야기에 동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저번에 네가 술 겁나 처먹고 찬 거잖아. 너 그때도 필름 끊겼었냐?”
“제가요?”
“그래. 덕분에 주인아저씨가 기계 작살낼 일 있냐고 잔소리 하는 거 같이 술 마시던 나랑 경성이가 다 들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동민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체 내가 술 처먹고 안 한 짓이 뭐야.’
동민은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고 싶었다.
“방금 찬 게 뽀록이라고 생각하고 못 믿겠으면 한 번 더 차봐.”
경태는 다시금 동민에게 공을 굴렸다.
결국 동민은 연습이 끝날 때까지 열 번 정도의 프리킥을 더 찼고, 그 슈팅은 전부 골대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 아예 우리 동아리 들어오는 건 어때? 오래 못 뛴다지만 그래도 너도 아직 뛰는 게 좋고, 지금은 슈팅뿐이지만 연습 좀 하다 보면 감 다 돌아올 거 같은데.”
연습 경기 상대가 도착하고 경기 시작까지의 짧은 시간, 경태는 앉아 있는 동민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제가요? 30분도 못 뛰는 녀석이 어떻게 들어가요.”
“그래도 교체 선수나 전반만 뛰고 누가 교체하면 되잖아. 이번에 사회인 축구 대회 본선 진출도 거의 확정인데 본선에서 너 같은 녀석 한 명만 있어도…….”
“됐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반대로 저 때문에 누군가는 다 못 뛴다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요. 거기다 저는 예선부터 같이하지도 않았고.”
경태는 제안이 거절당하자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지만 이내 수긍하고는 몸을 돌렸다.
“뭐, 알았어. 그럼 가끔 시간 날 때 와서 우리랑 연습이나 같이 해줘. 좀 전에 보니까 다른 애들도 눈 동그랗게 뜨고 있던데. 전반 끝나고 보자.”
경태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운동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동민의 눈은 경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축구를 뛴다, 라…….’
솔직히 동민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오래 뛰지 못해도 교체로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말은 아직 뛰고 싶은 동민에게 딱 들어맞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미안한 일이고, 뭣보다 아까 보는 사람들 중에 아니꼽다는 시선도 꽤 있었으니까.’
동민은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살고 나이가 들면서 가장 늘어난 건 눈치라고 생각했다. 30대 중반까지 아르바이트만 하던 삶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거나 깔보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그런 그의 감으로 아까 몇 사람이 자신을 보는 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경태 형은 사람은 참 좋은데 이런 곳에선 눈치가 없다니까.’
동아리 회장이 누군가를 데려와서 신경까지 써주는데 그 사람이 풀 경기도 못 뛰는 칠푼이라면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만약 그 녀석 때문에 자신이 뛸 시간이 줄어들 수도 있다면, 그런 반응은 더 하면 더 했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냥 가끔 와서 공이나 만지는 걸로 기분 전환이나 해야지. 이런 몸으로는 어디 조기 축구회 선수로도 못 들어갈 테고.’
동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경기가 시작되는 운동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경태]
26세
잘 쓰는 발 : 오른발
성장 가능성 7.2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6.4 / 20
선호하는 플레이 : 몸싸움 선호, 수비진 컨트롤
특성 :
장점 - 강철 몸, 리더
단점 - 현재 포지션밖에 소화하지 못함
현재 컨디션: 6/10
‘뭐야, 저게?’
급작스레 찾아온 두통과 함께, 뛰고 있는 부원들을 보는 그의 눈에 이상한 글자와 숫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잘 쓰는 발과 습관,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성장 가능성 등 온갖 글자와 숫자들이 그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는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지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지만 그 숫자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릿하게 떠돌던 숫자들은 더 뚜렷하게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이게 대체 다 뭐야?’
“저기, 무슨 일 있으세요?”
멍하니 그 숫자들을 읽고 있던 그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부원들에게서 보이던 숫자와 글자들이 사라지고 자신의 옆으로 걸어온 다른 부원의 얼굴만이 보였다.
“아, 아녜요. 그냥 좀 피곤한가 봐요. 좀 두통이 와서…….”
“약이라도 드릴까요? 의약품 통에 두통약도 있을 텐데.”
“아, 아니에요. 전 먼저 돌아가 볼게요. 경태 형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아, 예. 전해둘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는 그를 걱정해 주는 부원에게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운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동장을 나와 걷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에 본 숫자와 글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숫자들과 글자들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는 그 글자들과 숫자들이 눈에 익었다.
확실히 그는 그런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 화면 속에서지만.
‘분명히 내가 자주 했던 게임에서 선수들을 클릭하면 나오는 스테이터스랑 비슷해 보였지.’
과거로 되돌아오기 전,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만 빼면 매일매일을 전부 한 축구 게임에 쏟아붓고 있었다. 자신이 팀을 맡아 구성하고, 지휘해서 그 팀을 이끌어나가는 게임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될 수 없었던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지휘하며 대리만족을 얻고 있었다.
방금 그가 본 것은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분명히 그 게임에서 보던 화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게… 현실이 되었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본인의 생각이지만 스스로도 뒤통수를 후려갈길 만큼 어이가 없는 생각이었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다고 깨달았을 때보다 더 믿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오는 것은 그가 떨어지기 전에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게임에서나 보이던 것이 현실에 등장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정말 이게 말이 돼?’
그는 예상을 넘어서는 상황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신이 제정신이 맞는지,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만 해도 말이 안 되는데 저런 것도 보인다고? 이게 진짜 과거로 돌아온 건 맞나? 사실은 내가 지금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닌가?’
몇 번이고 자신의 생각이 헛된 망상이 아닐지 고민했지만, 어느새 조금씩 생각은 바뀌고 있었다.
‘아냐.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기적이야. 한 번 일어난 게 두 번 안 될 건 없지.’
애초에 그가 과거로 돌아온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이곳이 진짜 과거든 뭐든 내가 바란 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거였잖아. 이게 진짜든 가짜든 관계없어.’
그렇게 생각하자 점점 자신이 보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동시에 그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이 능력을 확인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어차피 선수로 복귀는 불가능하고, 내가 전에 살던 것처럼 막 살지 않으려면 일단 이게 뭔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야.’
집 앞에 도착할 때쯤, 그의 머릿속에는 혼란 대신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확인 방법까지도 어렴풋이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때까지는 가끔 연락을 했을 텐데. 분명히 번호가…….”
집에 도착한 동민은 씻지도 않고 자신의 수첩과 핸드폰을 뒤졌다. 들어왔으면 일단 손발부터 씻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급한 일이라며 둘러댔다. 동민의 눈과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역시 있을 줄 알았다니까.”
동민은 웃으며 그 번호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