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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200화 (완결) (2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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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50. 세상에 믿을 놈 없다 (5)

    남궁현현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심검(心劍)!

    검 없이도 검을 만들어 내는 경지를 일컫는다.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천우의 능력을 확인한 남궁현현이 느낀 감정은 질투였다. 만약 역천검의 비밀을 자신이 풀었다면 심검의 경지를 자신이 개척했을 테니까 말이다.

    “심검……이란 말이지?”

    남궁현현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역천검이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신에 비밀을 아는 정천우가 눈앞에 있다.

    심검의 경지는 초절정을 뛰어넘는 조화경의 단계.

    조화경과 초절정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역천검은 사라졌지만…… 조화경으로 올라서는 비밀을 손에 쥔 자가 남았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들어라!”

    남궁현현이 내공을 사용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남궁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정천우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모욕을 당했다. 한낱 신외지물 따위에 내가! 아니, 대남궁세가가 흉계를 꾸몄다고 모욕하는 자가 있다! 참을 수 없다! 남궁세가의 혼(魂)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다! 나는 저 후안무치한 자에게 우리의 기상을 보여 주려고 한다!”

    남궁현현은 정천우 일행을 손으로 가리키며 격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흥! 제아무리 조화경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하나, 혼자 힘으로 우리 남궁세가 전체를 감당할 순 없을 것이다.’

    남궁현현은 정천우를 노려보며 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자신의 경지는 초절정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정천우가 심검을 보여 주었으나 자신도 그와 엇비슷한 수준의 경지다. 수적인 우세를 통해 주의력을 분산시킨 다음 자신이 공격을 가한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정천우가 얻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급 형태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했다. 조화경에 오를 수 있는 비급만 있다면 오대세가의 일원 따위가 아닌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우뚝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저놈이?’

    흐뭇한 표정을 짓던 남궁현현은 자신을 쳐다보는 정천우의 기분 나쁜 표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거냐?”

    “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이냐! 무학 장로가 비록 광증에 시달렸다고는 하나, 우리 남궁세가의 사람이다. 그 대가는 받아 내야겠다.”

    “이 새끼는 뻑하면 말을 바꾸네? 아까는 광증이 있으니 지 혼자 까불다 뒈져도 상관없다고 그러지 않았어?”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단지 광증이 있다고 했을 뿐이지.”

    살짝 켕겼지만 남궁현현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말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남궁세가의 기상을 위해서라도 치부가 드러나지 않게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든든한 존재감도 남궁현현의 간을 키워 주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모든 전력이 집결된 것이다.

    조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총력을 다한 공격에는 힘을 쓰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킥! 쪽수가 불어나니까 이제 좀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제대로 본색을 드러내는데?”

    “네놈에게 우리 남궁세가의 무서움을 알게 해 주겠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면 팔 하나로 용서해 주마!”

    [죽고 싶지 않다면 비급을 내놓아라! 그렇게만 한다면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

    남궁현현은 입으로 흘러나오는 말과는 약간 다른 내용의 제안을 정천우에게 전음으로 보냈다.

    “지저분한 새끼들이 날 웃기는군. 와라! 모조리 저세상으로 보내 주마!”

    [좆까!]

    정천우는 남궁현현이 겉으로 한 말과 전음으로 한 제안을 동시에 대답해 주면서 기수식을 잡았다. 이제껏 정천우를 지탱해 주었던 혼원벽력도법이었다.

    그에 반해 키아벨리아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정천우의 부탁에 의해 진미령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앱솔루트 실드를 사용한 게 전부였다.

    “악적을 처단하라! 남궁의 무인들이여! 공격하라!”

    남궁현현이 청강검으로 정천우를 가리키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와아아아! 악적을 죽여라!”

    솨솨솨! 파바바바박!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정천우의 주변을 에워쌌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듯 보였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하나의 흐름을 만들면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대창궁무애검진(大蒼穹無涯劍陣).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진법이었다. 진(陣)을 이루는 무인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흐흐흐…… 네놈은 이제 끝이다!”

    남궁현현은 정천우가 검진에 둘러싸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음침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놈이 지치기만을 기다렸다가 암습을 가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제아무리 떠들어 봐야 결국에는 승자의 말이 진리요, 진실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남궁현현은 전신의 내공을 청강검에 주입한 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단 일격!

    조화경에 들어선 상대인 만큼 암습을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야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확실한 기회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설혹 남궁세가의 피해가 커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화경에 이르는 비밀을 서술한 비급이 있다면 언제든 남궁세가는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다.

    “어억!”

    기회를 엿보던 남궁현현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대창궁무애검진(大蒼穹無涯劍陣)이 펼쳐진 중앙에서 맹렬한 회전을 일으키면서 강기로 이루어진 원반이 쉴 틈 없이 튀어나왔다.

    “인간이 아니야…….”

    강기를 발출하려면 초절정 이상의 고수만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저처럼 수없이 많은 숫자의 강기를 발출하면 누구라도 내공이 고갈되어 쓰러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검조차 없이 심검을 사용해 검강을 쏘아 보내고 있으니 내공의 소모가 더욱 심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고 검강으로 이루어진 원반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무형, 무상, 무완! 안 돼! 안 돼애!”

    남궁현현은 장로급 무인들이 연달에 들이닥치는 검강에 사지가 잘려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무사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세가의 주축을 이루는 중요한 인물이 장난처럼 죽어 가는 모습에 남궁현현은 공황 상태가 되었다.

    암습?

    그따위 것으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강함 앞에 남궁현현은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콰과광! 콰광! 쾅! 쿠구궁!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검강이 건물들을 부수며 굉음을 일으켰다.

    파괴력의 정점에 선 검강에 건물들이 맥없이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휘유…… 먼지…….”

    정천우는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키아벨리아스가 눈치 빠르게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한순간에 날린 덕분이다.

    먼지가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참혹함뿐이었다. 정천우를 중심으로 사방에 남궁세가 무인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싸움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하급 무인들은 정천우의 공격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손에 사정을 둔 까닭이었다.

    “자식이 아주 정신줄 놨네, 정신줄 놨어.”

    정천우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검조차 놓친 남궁현현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평소의 버릇은 어쩔 수 없는지, 검강으로 이루어진 심검을 어깨에 걸친 채 남궁현현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어째서…….”

    “뭐가?”

    “다 죽일 필요까지 있었느냐!”

    “이거 뭐하는 새끼야? 그러는 너는? 진선문 사람들을 다 죽일 필요까지 있었어? 진짜 짜증 나는 새끼일세? 너 따위 쓰레기하고는 말하는 것도 시간 낭비다. 가라!”

    “아직 내 말이 끝나지…… 끝나지…….”

    남궁현현은 정천우가 등을 돌리기 직전에 뭔가 빛이 번쩍하는 걸 깨달았지만 그게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공격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화끈한 감각이 가랑이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걸 느낀 순간, 세상이 반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지겨운 새끼들…… 저런 놈을 믿고 우리 진 소저가 그렇게 고생했다니, 하여간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

    정천우는 강기로 이루어진 심검을 사라지게 하고선 진미령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내내 사냥감의 위치에 있다가 한순간에 포식자의 위치로 돌변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포식자가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노련하긴 했지만 내공도 부실하고 무공도 그저 그런 정천우였다. 그런 그가 천하제일인을 넘볼 정도의 초고수가 되어 있는 현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남자라는 점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눌러 참았다. 사방에 시신이 그득했지만 그가 있다면 두렵지 않았다.

    “진 소저, 끝났습니다.”

    “……그렇군요.”

    “허무합니까?”

    “조금요. 그리고 무섭기도 해요.”

    진미령은 바닥에 흩어진 사람들의 토막 난 시체와 한쪽 구석에서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하급 무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진선문에서 겪었던 끔찍한 그날, 쫓기면서 경험했던 숨 막히는 추격전, 내내 두려웠던 기억들…….

    이제 세상에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정천우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 잊고 싶어요. 너무 끔찍한 일들이었어요. 중원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네요. 좋은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진미령은 심란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역천검 때문에 벌어졌던 모든 일이 끔찍했다. 부모, 일가친척, 가족처럼 지내던 진선문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강호의 삶이 싫었다. 피비린내 나는 삶에서 벗어나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여유를 즐기면서 살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쓰라린 아픔을 발견한 정천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 소저.”

    “네, 정 무사님.”

    “중원과 아주 먼 곳으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중원과 아주 먼 곳이요? 거기가 어딘가요?”

    “이 녀석이 사는 곳입니다. 중원과는 아예 다른 세상입니다. 아버님의 시신도 거기에…….”

    정천우는 은근슬쩍 진미령의 아버지인 진철운을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진미령은 복잡한 심정인 와중에도 은은하게 얼굴을 붉혔다. 끔찍한 주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훈훈하기만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아니, 드래곤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정천우와 동대륙으로 넘어갔다가는 섭혼술의 영향을 계속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위대한 존재인 자신이 겨우 인간 따위한테 휘둘려 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정천우 님!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낄 데에 껴라, 좀! 뭐! 뭐가 약속이 다르다고?”

    정천우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키아벨리아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만 돌아가기로 했잖습니까! 이건 약속 위반입니다!”

    “닥치고 동대륙으로 넘어갈 준비나 해!”

    정천우는 키아벨리아스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는 다시 진미령에게 다가갔다.

    “제기랄…… 진짜 세상에 믿을 놈 없네.”

    키아벨리아스는 아까 정천우가 남궁현현에게 했던 말을 흉내 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 들린다!”

    “예, 합니다! 하면 되잖습니까!”

    키아벨리아스는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면서도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 정천우에게 속으로 쌍욕을 날리면서.

    ‘쳇! 잘 어울리긴 하네.’

    키아벨리아스는 진미령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은 정천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침내 마법진이 완성되고, 세 사람이 밝은 빛에 휘감겼다. 빛의 기둥 속에서 둥실 떠오르며 정천우는 품속의 진미령이 아닌 다른 여인을 떠올렸다.

    ‘아…… 제인에게는 뭐라고 하지……?’

    훗날 생존자의 입을 통해 정천우는 ‘용검제(龍劍帝)’라는 별호로 무림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동대륙으로 넘어간 그는 알지 못했지만 황금빛 용과 함께 나타난 용검제의 신위는 고금제일로 일컬어지며 무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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