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9화 (199/200)

# 199

Chapter 50. 세상에 믿을 놈 없다 (4)

“가, 가주님! 누, 누가 어서 가서 가주님을 모셔 와라!”

남궁세가의 무사 중 하나가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설로만 치부되는 용이 하늘에서 날갯짓하며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위압감과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고수 수십 명이 투기(鬪氣)를 드러내도 이렇게까지 위압적이진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겁에 질렸다.

“내가 남궁세가의 가주요!”

무사들이 가주를 부르기도 전에 내공이 충만한 사자후(獅子吼)가 먼저 터져 나왔다.

키아벨리아스의 존재감을 느낀 남궁가주가 장로들을 대동해서 건물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들로서도 용을 처음 보는 것이지만 무사들이 동요할 것을 저어해서 의연한 척하고 있었다.

가주가 나서자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하강했다.

“히이익!”

“내, 내려오고 있어!”

“으아아아!”

무사들은 엄청난 크기의 황금빛 용이 내려오는 것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궁!

크기뿐만 아니라 무게 역시 대단했다. 키아벨리아스가 바닥에 내려선 순간 남궁세가 전체에 진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초리로 용을 바라보는데 정천우과 진미령이 키아벨리아스의 어깨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이 내리기가 무섭게 키아벨리아스의 몸에서 빛이 났다. 눈부신 빛이 점점 줄어들더니, 거대한 크기의 용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금발 머리의 사내만 남았다. 사람들은 용이 무엇으로 변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들은 누구요!”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현현이 떨리는 심장을 겨우 다스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알 텐데?”

정천우는 삐딱하게 고개를 모로 틀며 한마디 툭 내던졌다.

복면인들을 몰살시킨 곳에서 한달음에 날아온 참이다. 거리가 상당했기에 날아오면서 중간에 하루를 쉬어야만 했다. 그래도 엄청난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는 키아벨리아스의 비행 능력에 힘입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껏 자신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녀 놓고는 정작 상대방이 알아보질 못하니 정천우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남궁 가주인 남궁현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비록 전설에나 등장하는 용이라고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청년은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두려웠던 감정은 사라지고 은근히 화가 솟구쳤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세 사람이 기환술 따위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수법을 썼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용이 현세에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이야기에나 등장하는 신수(神獸)가 실제로 존재할 리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대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래? 그럼 이건 어때?”

정천우는 허리춤에 걸린 역천검을 반쯤 뽑았다. 검신에 새겨진 룬어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중원에 존재하는 역천검은 이렇듯 약간의 내공만 주입해도 룬어가 빛을 발한다.

“……역천검?”

“눈깔은 제대로 박혔네. 그럼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겠어?”

정천우는 적대감을 가지고서 대하는 중이었다.

남궁세가에서 꾸미는 짓이 무엇이라는 걸 아는 마당에 예의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진미령과 남궁세가를 찾은 것은 그들이 역천검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공격한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온 것이다. 물론 확인 즉시 복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란 게 그렇게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네가 찾아온 이유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이게 역천검이란 걸 알아봤으면서 시치미를 떼시겠다?”

정천우는 허리춤에 매달린 역천검을 완전히 뽑으며 피식 웃었다.

“말을 삼가하라! 어디서 망발을 꺼내는 것이냐! 대남궁세가가 우습게 보이는가!”

남궁현현의 옆에 서 있던 우락부락한 중년 사내가 삿대질을 하면서 정천우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정천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웃기는군. ‘폭풍대’라고 알아?”

“그, 그게 무엇이냐!”

정천우를 나무라던 중년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남궁세가 비밀 조직의 이름이 정천우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놀란 것이다.

“이상하네? 남궁 가주에게서 역천검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던데? 남궁경이라던가? 폭풍대주라고 하더군.”

“…….”

중년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폭풍대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남궁경이라는 이름까지 흘러나왔다. 극비 중의 극비 사항이 술술 흘러나오자 가주인 남궁현현의 얼굴까지 차갑게 굳어졌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경이는 어떻게 되었지?”

남궁현현과 중년 사내의 입에서 동시에 각기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태도가 갈렸다.

남궁현현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려고 했다. 하지만 중년 사내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무학!”

“가주, 놈이 경이를 알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연락이 끊기지 않았습니까. 이제껏 경이에게서 연락이 끊어졌던 일이 없었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나 있는가?”

남궁현현이 눈을 부릅떴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온 남궁무학이 이렇게나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폭풍대를 맡은 대주가 바로 그의 아들인 남궁경이었다.

정천우의 입에서 ‘남궁경’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남궁무학이 덥석 미끼를 물고 말았다.

남궁무학의 부정(父情)은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서 잠시 억누를 줄도 알아야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사고를 친 것이다.

남궁현현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비웃음을 입에 문 정천우가 있었다.

“잘 아는 사람인가 보지?”

“닥쳐라! 우리 경이는! 우리 경이는 어떻게 되었느냔 말이다!”

“뒈졌는데?”

“…….”

남궁무학은 뜻밖의 소식에 몸이 굳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전서구를 보내 잘 있다고 안부 인사를 전한 아들이다. 죽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소식이 뚝 끊겼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전서구로 연락을 보내야 한다. 그게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폭풍대의 의무다.

더욱 남궁무학을 불안하게 한 것은 오늘 아침 전서구가 아무런 서신도 없이 날아왔다는 점이다. 전서구를 실수로 놓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서너 마리나 되는 전서구를 실수로 놓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정황을 맞춰 보던 남궁무학은 정천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망과 분노가 뒤범벅된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너도 죽고 싶은 거냐?”

정천우는 어쭙잖게 자신의 앞에서 살기를 흘리는 남궁무학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개자식! 우리 경이를!”

“웃기는군. 너희 남궁세가 놈들이 멸문시킨 진선문 사람들의 목숨은?”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정천우의 냉랭한 물음에 가주인 남궁현현이 나섰다.

진선문의 얘기에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의문을 갖게 만들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넌 빠져! 어차피 죽여 버릴 생각이니까. 너같이 음흉한 놈이 남궁세가의 가주라니,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어. 더러운 자식들.”

“경이가, 경이가 죽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으아아아!”

“무학! 정신 차려라, 무학!”

남궁무학이 그르륵거리는 모습에 남궁현현이 놀란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은 남궁무학의 이성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가는가 싶은 순간, 이미 지면을 박차고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목표는 정천우.

흉험한 살기를 풍기며 날아가는 남궁무학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이기적인 살심(殺心)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차앗!”

맑은 기합성과 함께 검자루를 쥔 남궁무학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때를 같이해 정천우와 남궁무학의 사이에서 빛이 번쩍였다. 워낙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파바밧!

착지와 동시에 발검술로 정천우를 공격하려던 남궁무학이 석상처럼 그대로 멈췄다.

검을 뽑으려던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힘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남궁무학의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네놈은…….”

“걱정하지 마라. 나머지 놈들도 곧 뒤따라 보낼 테니까. 약속하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개자…….”

남궁무학이 인상을 구기며 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혈선이 생겨나더니 육체가 조각조각 나뉘어 와르르 무너졌다. 한순간이 핏물이 바닥에 흘러내렸고, 그걸 지켜보던 남궁세가 무사들의 얼굴엔 경악이 드리웠다.

“들어라! 남궁세가는 이것을 얻기 위해서 진선문을 멸문시켰다!”

정천우는 남궁무학을 베고도 핏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 역천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편안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인간을 초월한 그의 내공은 남궁세가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멀리멀리 퍼졌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근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황금빛 용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뜻밖의 얘기에 웅성거렸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인근에 사람 사람들이 몰려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남궁무학의 죽음.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펼쳐진 정천우의 무공.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투기와 살기가 일어났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남궁세가 무사들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다.

가주인 남궁현현마저 제멋대로 행동하는 정천우를 감히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쇠붙이가 사람들의 생명보다 소중한가? 그래! 소중하다고 치자! 진선문은 이것을 너희 남궁세가에 주려고 했다. 그러나 너희는 어땠지? 말해 봐!”

“……우리 남궁세가는 모르는 일이다!”

남궁현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천우와 눈을 피하려 드는 모습에서 남궁세가 무사들의 의구심만 증폭시켰다.

“몰라? 진선문에서 남궁세가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 남궁세가는 어째서 지원은 하지 않고 살수를 보냈지?”

“모함하지 마라!”

“이놈의 아들이라던데?”

정천우는 사실을 부정하는 남궁현현에게 손가락을 들어 남궁무학의 토막 난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요즘 광증(狂症)이 있었다. 단지 그뿐이다. 네놈이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 그럼 이 역천검은 필요 없다는 거겠네? 키아벨리아스!”

“말씀하십시오.”

“이거 없어도 되지?”

정천우는 손에 들린 역천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키아벨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검 없이도 동대륙에 돌아갈 수 있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없애!”

정천우가 역천검을 키아벨리아스에게 맡겼다.

그러자 남궁현현은 코웃음을 쳤다.

역천검은 절대로 파괴할 수 없다고 알려진 검이다. 가짜라면 몰라도 이미 진품임을 확인한 남궁현현이다. 역천검에서 흘러나오는 사이한 기운과 예기는 결코 속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검신에 새겨진 룬어의 빛은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없앨 수 있을 리가 없다. 남궁현현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흡수!”

키아벨리아스가 역천검을 손에 쥐고 용언 마법을 사용하자 역천검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빛으로 변한 역천검은 키아벨리아스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애초에 그의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검이었기에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아,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정천우는 비명을 지르는 남궁현현에게 비틀린 웃음을 내보였다.

“역천검의 비밀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 역천검의 비밀은 내가 풀어냈으니까.”

“웃기지 마라!”

“이래도?”

정천우가 비웃음을 흘리면서 오른손으로 검을 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정천우의 손에서 생겨나 검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심검(心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