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8화 (198/200)
  • # 198

    Chapter 50. 세상에 믿을 놈 없다 (3)

    별생각 없이 물어보는 질문에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정천우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남궁세가라니!

    진미령이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다.

    역천검을 노리는 놈들이 진짜 남궁세가라면 이거야말로 범의 소굴에 스스로 걸어가는 꼴이 아닐 수 없었다.

    “뭐 잘못된 거 아니야? 마법 확실해?”

    “확실합니다. 이놈은 지금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나의 맹세’라도 해 드려야 믿으시겠습니까?”

    키아벨리아스는 자존심 상한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컨페션 마법이 조금 복잡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봐야 인간의 기준에서나 복잡하지 드래곤에게 쉬운 일이다. 실수했을 리도 없고 실수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제가 드래곤입니다, 드래곤! 이깟 마법 따위에 실수할 리가 없습니다.”

    키아벨리아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천우는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사기를 웬만큼 쳤어야 믿지. 아, 아! 알았어, 인마. 이놈하고 얘기 좀 하게 그만 노려봐. 그래, 우릴 공격하라고 누가 시켰어?”

    “가주님의 특별 지시.”

    “들통 나면 남궁세가가 눈총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그저 명령에 따를 뿐.”

    “이거 꼴통 새끼들이네? 정말 남궁세가 소속이 확실해?”

    “우리는 어둠의 존재들. 남궁세가의 숨겨진 힘.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는…… 그르륵…….”

    순순히 대답하던 복면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피 거품을 흘렸다.

    “이거 왜 이래?”

    “강제로 뇌를 제어하는 거라 지속시간이 길지 못합니다.”

    “얼마나 기다리면 돼?”

    “네? 죽은 겁니다.”

    “죽어?”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물었다. 겨우 말 몇 마디 섞었을 뿐인데 죽었단다.

    그러나 키아벨리아스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컨페션 마법은 피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합니다. 정신계 조작 마법으로 시전자의 통제력을 발휘…….”

    “아! 됐어. 몰라! 그러니까 마법에 걸리면 무조건 뒈진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금방 죽으니까 물어볼 거 있으면 빨리 물어봐야 하고.”

    “맞습니다.”

    “그럼 마저 걸어.”

    정천우는 나머지 복면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정 무사님,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요?”

    지켜보던 진미령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정천우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놈이란 걸 알면서 걱정을 해 주고 있다. 음모와 기계가 판치는 강호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성격이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잡스럽고 더러운 일은 자신이 다 해결해 주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를 노렸던 놈들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저놈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천우는 바닥에 쓰러진 복면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몸뚱이가 토막 난 복면인들의 시체에 눈을 돌린 진미령은 주먹을 말아 쥐고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더러운 음담패설로 자신을 희롱하던 게 생각난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진미령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머릿속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다. 남궁세가를 찾아 역천검을 전하려고 했는데, 이제껏 자신을 괴롭히고 살행을 저질렀던 존재가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니…….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진미령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사이, 키아벨리아스가 나머지 복면인에게 용언으로 마법을 걸었다. 정천우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네놈은 다른 놈과 다르군. 뭐 하는 놈이지?”

    복면인의 너덜거리는 옷에 수놓인 문양을 발견한 정천우가 물었다.

    검은색 야행복에 검은색 수실로 수를 놓아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놈들의 야행복과 확연한 차이였다.

    “폭풍대 대주 남궁경.”

    “폭풍대? 그게 뭔데?”

    “남궁세가의 숨겨진 무력 단체다. 암살과 정보 조작이 주임무다.”

    “그런데 우릴 왜 공격했지? 어차피 남궁세가로 역천검을 갖다 줄 텐데?”

    “가주님이 원하지 않는다.”

    “어째서?”

    “역천검이 남궁세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걸 원치 않으신다.”

    “……망할 자식들! 그러니까 그냥 날로 먹겠다는 거네.”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놈들은 역천검이 자신의 손아귀에 공식적으로 쥐어지는 걸 원치 않는 거다. 역천검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졌다는 전설을 파헤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역천검의 비밀을 정천우만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역천검은 뇌전의 성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저 재앙 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강호인들에게 백날 설명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얘기다.

    역천검에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골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기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역천검을 얻으면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비밀스러운 소문은 사람들의 이지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저주받은 마검(魔劍).

    하지만 매력적이다.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날름하겠다는 남궁세가.

    정파의 거장이라는 오대세가 중의 하나인 남궁세가가 이토록 더러운 짓을 벌이다니…….

    정천우가 열이 받아 분노하는 사이,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복면인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정 무사님…….”

    “네, 진 소저.”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진미령은 처연한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남궁세가가 사실은 진선문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는 게 그녀에겐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정천우는 그녀의 눈빛을 받아들이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당사자가 아니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기에 분노를 참기 힘들었지만 결정은 진미령이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피의 복수를 선언하기에는 그녀의 마음씨가 너무나 곱다. 결국은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진미령은 번뇌에 싸여 정신이 황폐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갑시다.”

    “……어디를요?”

    “남궁세가지 어디겠습니까.”

    “하지만…….”

    “진 소저를 남궁세가까지 데려다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뢰비를 받을 생각입니다.”

    “의뢰비라면…….”

    진미령은 정천우의 눈과 마주쳤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굴에서 그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정천우에게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게 생각 난 것이다.

    “그냥 해 본 얘기였습니까?”

    “……아니에요.”

    “그럼 됐습니다.”

    정천우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진미령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스해졌다. 비록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에서 나쁜 기억을 털어 낼 수 있었다.

    키아벨리아스에게서 정천우의 처절한 삶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강의 고수가 되어 중원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안다.

    사실 믿기지는 않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사람이 변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가장 기분 좋은 건, 중원에 돌아오려고 했다는 이유가 오직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이제야 겨우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중이지만 정천우는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세상에서 자신만을 그리워했다고 들었다.

    연민의 감정과 함께 맹목적이다시피 한 그의 감정이 와 닿아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

    진미령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정천우에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냈다.

    “그래요. 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키아벨리아스, 가자.”

    “예, 정천우 님.”

    키아벨리아스는 자신을 쉽게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천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정천우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출발하자고 했잖아.”

    “네, 출발하시면 됩니다.”

    “바보냐?”

    “네?”

    “언제 걸어갈래?”

    “그러면 어떻게…….”

    “뭘 망설여? 너 날아갈 수 있잖아.”

    “여기서 말입니까?”

    “문제 있어?”

    “숙녀분이 놀라실까 봐서…….”

    “헛소리하고 있네.”

    정천우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말해 놓은 상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이동 수단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에 저러는 게 확실했다.

    “두 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까 이 녀석이 얘기하는 거 들으셨으면 아실 겁니다. 이 녀석은 드래곤…… 그러니까 용(龍)입니다. 남궁세가까지 태워 달라고 했더니 뻗대는 겁니다.”

    “뻐, 뻗대긴 누가 뻗댔다고 그러십니까? 합니다. 폴리모프!”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의 눈빛이 곱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마법을 펼쳤다.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나오더니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갔다.

    진미령은 그 놀라운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마침내 키아벨리아스의 몸이 번쩍이는 황금빛 거대한 드래곤의 몸체로 변했다.

    “……세상에.”

    진미령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용이 진짜로 현세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림으로 전해 오는 용의 모습과는 약간 달랐지만 얼굴의 생김새는 비슷했다.

    “저 녀석의 정체입니다. 그럼 올라갑니다.”

    “어맛!”

    정천우가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몸을 띄웠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솟구친 두 사람은 드래곤으로 변신한 키아벨리아스의 어깨 부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개운치 않은 목소리로 애써 말하며 거대한 날개를 활짝 폈다.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죽은 복면인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비 들이친다!”

    [끄응…… 실드!]

    정천우가 쏟아지는 빗방울에 인상을 쓰자 키아벨리아스는 승객(?)의 쾌적함을 위해 실드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감쌌다.

    몇 번 신경질적으로 날갯짓하던 키아벨리아스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

    강호상에 수많은 문파(門派)와 무가(武家)가 존재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아홉 개의 문파를 구대문파라 칭했고, 무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가문을 일컬어 오대세가라고 불렀다.

    남궁세가는 오대세가에 속한 강력한 가문으로서, 정파의 기둥을 자처하는 곳 중에 하나다.

    검법을 주무공으로 사용하며 대표적인 무력 집단으로는 창궁검수(蒼穹劍手)를 주축으로 구성한 창궁검수대가 있다.

    무인의 기상을 강조하며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남궁세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의 가르침은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난리가 벌어졌다.

    “괴, 괴물이야!”

    “요, 용! 용이 나타났다!”

    “가주님! 가주님을 불러라! 어서! 어서!”

    “으아아아! 천벌이야!”

    “미친 자식! 우리가 무슨 짓을 했다고 천벌이란 말이냐! 닥쳐라!”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황금빛의 무언가가 하늘에서 나타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점차 황금빛 덩어리가 커질수록 무공을 배운 무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일반 사람들보다 시력이 월등한 무인들은 그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의 정체는 용(龍)이었다.

    황금빛 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남궁세가의 건물 위에 멈췄다.

    경악한 얼굴로 위를 쳐다보는 남궁세가의 무사들.

    “남궁가주는 앞으로 나서라!”

    그런 그들의 귀에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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