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7화 (19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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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50. 세상에 믿을 놈 없다 (2)

    진미령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정천우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경계심?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천우가 내민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진철운의 옥패였다. 진선문을 상징하는 문주의 패(牌).

    “이, 이걸 어디서…… 아버님은! 혹시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어디 계시죠? 말 좀 해 보세요.”

    “진 소저의 부친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아…….”

    진미령은 옥패를 쥔 채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막연하게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버지인 진철운이 항상 지니고 있던 옥패를 마주한 순간 힘이 쪽 빠졌다.

    그리고 정신이 든 순간, 그녀의 눈엔 원한이 가득 맺혔다.

    “왜 우리 아버지를…… 아니, 어째서 우리 진선문을 멸문시킨 것인가요?”

    “네? 얘기가 왜 또 그렇게 흘러가는 겁니까?”

    정천우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난감해했다.

    오해를 풀려고 진철운의 옥패를 보여 주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더 의심하고 말았다.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껏 두 사람이 하는 짓을 지켜보던 키아벨리아스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답답하십니다.”

    “뭐, 인마?”

    “말로 설명한다고 이게 설명이 됩니까?”

    키아벨리아스는 발끈하는 정천우를 무시하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둥근 막이 진미령을 포함해서 세 명 모두를 감쌌다.

    간단한 실드 마법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이 실드에 막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무, 무슨!”

    진미령은 신기한 현상에 놀라워했다.

    복면인들을 막을 때 잠깐 사용하긴 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 빗방울이 일정 범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모습은 그녀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이건 마법이라는 겁니다. 다른 세상의 기술이지요. 정천우 님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역천검은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쇠입니다. 제가 정천우 님을 불렀다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이런 건 어떻습니까?”

    키아벨리아스는 손에서 불을 만들기도 하고 마법을 사용해 작은 산 하나를 평지로 만들었다.

    그 엄청난 위력에 진미령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 년을 넘게 산 키아벨리아스의 말빨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의심으로 얼룩졌던 진미령의 마음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흐흑…….”

    대략 30분의 시간이 지나자 진미령은 조금 전까지와 달리 정천우에게 다시 안겨 들었다.

    정천우는 눈만 멀뚱거렸다.

    키아벨리아스의 화려한 언변에 진미령이 잔뜩 감동한 상태였다. 정말 감정의 변화가 엄청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진미령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수고했다.]

    정천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키아벨리아스의 메시지 마법에 전음으로 답해 주었다.

    키아벨리아스는 영악하게도 역천검을 자신이 만든 거라는 사실은 쏙 빼놓고서 얘기했다. 정천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고는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정천우는 그 부분에 대해선 그대로 넘어가 주었다. 사실이 밝혀지면 피곤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오해가 풀린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럼 아버님의 시신은 동대륙이란 곳에 있다는 거죠?”

    “네, 이제껏 역천검에 의해 사라졌던 사람들은 다들 동대륙으로 넘어갔습니다. 뇌전의 기운을 간직한 무공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번개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겁니다. 진 소저의 아버님처럼 말입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정천우 님, 약속을 지켰으니 전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키아벨리아스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말을 꺼냈다.

    정천우와 떨어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섭혼술에 제어 당하는 걸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나 얘기 중이잖아.”

    “…….”

    정천우가 눈을 부라렸다.

    마법의 제왕이라는 드래곤을 부릴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게다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만일의 사태라는 게 생길 수 있으니 키아벨리아스를 지금 돌려보기에는 껄쩍지근했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하, 하지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동대륙에 도착하면 바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어?”

    “끄응…….”

    키아벨리아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속이 터지지만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거역하려고 하거나 반항하려고 하면 드래곤 하트가 쥐어짜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눈을 부라리는 정천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진 소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키아벨리아스를 노려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정천우가 진미령한테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계획했던 대로 우선은 남궁세가에 가고 싶어요. 백부님께서 신신당부하셨던 일이라…….”

    진미령은 씁쓸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말하는 백부가 위진충을 말하는 걸 알기에 정천우 역시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위진충이 자신에게 진미령을 맡기면서 했던 얘기도 남궁세가까지 호위해 달라는 거였다.

    “가신 다음에는 따로 계획하신 거라도…….”

    “일단은 가 보려고요.”

    “하지만 역천검의 비밀은 이미 밝혀졌는데, 굳이 남궁세가에 갈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정천우는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역천검의 비밀은 밝혀졌다. 동대륙으로 가는 워프 게이트로서의 존재다.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위험한.

    “……우리 진선문의 사람들이 역천검을 남궁세가로 보내기 위해서 멸문했어요.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멈출 순 없어요. 죽은 사람들의 희생이 너무 덧없어지잖아요. 그리고 정 무사님, 강하시다면서요.”

    “강해지긴 했습니다만, 그게 남궁세가에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천검을 노리는 게 이들이 전부는 아니겠죠? 남궁세가까지 가다 보면 이들의 배후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무리한 부탁일까요? 하아…… 아니에요. 그냥 남궁세가에 가지 않는 편이 낫겠죠?”

    진미령은 말을 바꿨다.

    키아벨리아스의 말을 듣고서 복수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정천우가 이쪽과 다른 세상에서 엄청난 고수라는 말을 듣고 나서다.

    실제로 진선문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던 복면인들을 너무나 쉽게 해치우는 모습에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말을 하다 보니 지나치게 자신이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역천검을 노리는지 모르는데 정천우가 아무리 강해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선 안 되는데…….

    진선문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을 지옥의 불구덩이에 넣어선 안 되는데…….

    “하아…….”

    진미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잊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잠시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삶을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젠 좀 쉬고 싶다.

    복수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여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할 짓이 아니었다.

    “일어나십시오.”

    “네.”

    “남궁세가로 갑니다.”

    “네? 위, 위험해요.”

    “진 소저가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게 힘듭니다. 그리고 전 강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뭐, 이미 발 빼기에도 늦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놈들이 벌써 찾아온 모양입니다.”

    정천우는 놀란 얼굴의 진미령에게 방긋 웃어 주면서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복면을 쓴 놈들이 바글바글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면인들이 꼬물거리면서 산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키아벨리아스, 손 좀 봐줘라.”

    “라이트닝 캐논!”

    파지지직! 파지직!

    간단하게 용언 마법을 사용하자 커다란 빛줄기가 쏘아졌다.

    콰과과광!

    샤칼이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꼬물대며 내려오던 복면인들 사이로 떨어진 라이트닝 캐논의 위력은 천재지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산 중턱이 흉물스럽게 파였고,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음에도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세상에…… 이게 마법?”

    진미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광경에 입을 쩍 벌리면서 놀라워했다.

    마법이라는 이름의 무공은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보였다. 이 정도면 진천뢰를 동시에 터뜨려도 나오기 힘든 위력이었다.

    진미령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키아벨리아스와 정천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쩌면 복수라는 게 뜬구름 잡는 얘기만은 아닐 것 같았다.

    “무식한 놈.”

    “손 좀 봐주라고 하셔서…….”

    “저게 손 좀 봐주는 거야? 다 죽었겠는데? 정보를 캐내야 할 것 아냐!”

    “사, 살아 있는 놈이 있습니다.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가 인상을 험악하게 쓰자 어마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블링크 마법을 사용해 사라졌다.

    “사, 사라졌어?”

    “아, 그쪽 동네에선 별것도 아닙니다. 아마 생존자를 찾으러 갔을 겁니다.”

    정천우가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동대륙이나 서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키아벨리아스의 마법이었지만 구태여 길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후, 키아벨리아스가 두 명의 복면인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살아남은 놈이 겨우 둘이야? 근데 사람이 맞긴 하냐?”

    “사람 맞습니다. 아! 힐링!”

    키아벨리아스는 걸레처럼 변한 복면인 두 명에게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죽은 듯이 늘어졌던 두 명의 복면인이 꿈틀거렸다.

    “으으으…….”

    “크윽! 대체 무, 무슨 일이…… 헉!”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뜬 복면인 중의 하나가 자세를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키아벨리아스가 마법을 사용해 단단히 고정한 상태라 복면인의 몸부림은 단순한 꿈틀거림으로 끝났다.

    “네놈들의 소속은 어디지?”

    “마, 말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정천우의 말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하기 싫다는데? 방법 없어?”

    “죽어도 됩니까?”

    “죽든지 말든지 그거야 제 놈들 팔자지. 알아내기만 하면 돼.”

    “컨페션(Confession)!”

    키아벨리아스가 왼손에 쥔 복면인의 눈을 보며 용언 마법을 사용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키아벨리아스를 노려보던 복면인의 눈동자가 풀리며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키아벨리아스는 컨페션 마법이 걸린 복면인을 정천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궁금한 걸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래? 너무 쉬운 거 아니야?”

    “하, 하하…… 네, 간단한 마법입니다.”

    키아벨리아스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정천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피시전자의 뇌를 직접 건드려서 비밀을 술술 말하게 하는 자백 마법을 쉽다고 하니, 그의 입장에선 화딱지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섭혼술로 묶여 있는 몸이라 화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정천우는 반쯤 맛이 간 복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은?”

    “남궁청.”

    “우릴 왜 노리는 거지?”

    “역천검의 회수.”

    “네놈의 소속은?”

    “남궁세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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