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6화 (196/200)
  • # 196

    Chapter 50. 세상에 믿을 놈 없다 (1)

    마음의 준비를 마친 진미령은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은 정천우의 품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복면인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는 복면인들을 보면서도 두려움이란 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나아…….’

    진미령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 힘들었다. 진선문의 식솔들이 하나둘 시체로 발견되고, 문주가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남궁세가에 의탁하고자 진선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 복면인의 습격.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녀의 처연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복면인들이 마침내 협봉검에서 검기(劍氣)를 피우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세상과 이별할 시간이었다.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마음을 준 남자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슬프면서도 한 줄기 달콤함을 느낄 수 있어 나쁘진 않았다.

    ‘안녕…….’

    진미령은 정천우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전신의 내공을 역행하기 위해서 단전에 의식을 집중했다. 이제 최후의 순간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아…….”

    최후의 순간,

    진미령이 탄성을 터트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금발의 사내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 손을 들자 날카로운 검기를 앞세우며 달려들던 복면인들이 무엇엔가 얻어맞은 것처럼 달려들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또 다른 복면인이 달려들었지만 마치 무형의 벽이 있는 것처럼 자신과 정천우가 있는 곳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지점을 침입하지 못했다.

    진미령은 역행하려던 단전의 내공을 다시 가라앉혔다.

    “지금…….”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정천우는 진미령을 품에서 살짝 떼어 놓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원래는 뒤에서 달려드는 놈을 자신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키아벨리아스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 깨닫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너무도 그리웠던 진미령을 안고 있었기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젠 놈들을 치워야 할 때였다.

    느긋하게 그녀를 곁에 두고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잠시만 놔주시겠습니까?”

    “아…….”

    정천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하자 진미령이 얼굴을 붉히면서 그의 목에 감은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봐, 너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정천우가 역천검을 어깨에 걸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동대륙에서 이를 갈며 살아온 그다.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복면 쓴 놈들을 어떻게 죽일까 수없이 고민했었다. 자신이 사라진 중원에서 진미령이 무슨 험한 일을 당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기 일쑤였다.

    이제 떠나왔던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와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복면인들에 대한 원한은 그대로였다.

    츠즈즈즈…….

    정천우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키아벨리아스, 이건 내 싸움이다.”

    “알겠습니다.”

    정천우가 냉막한 얼굴로 말하자 키아벨리아스가 공손히 대답하고는 실드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복면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복면인 무리의 우두머리인 푸른 점의 복면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사술이지?”

    “사술? 그렇게 생각해?”

    정천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저들에게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겠지만 자신은 중원이라는 세상을 벗어나 오랫동안 괴상한 세상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사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사술이 아니라면 뭐지?”

    “큭…… 너와 내가 그런 걸 얘기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가? 지금 네가 할 일은 하나야.”

    “그게 뭐지?”

    “뭐겠어? 개처럼 기어 다니는 거지.”

    “뭣? 미친놈!”

    푸른색 점이 복면 위에 찍힌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욕을 했다.

    번개에 맞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이제껏 자신들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던 주제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

    비록 이상한 사술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놈들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해치우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점의 복면인이 정천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쳐라!]

    푸른 점의 복면인은 다른 복면인들에게 전음을 보내 공격을 지시했다.

    파바밧!

    복면인들은 명령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푸른 점의 복면인 역시 부하들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다른 복면인들과 달리 푸른 점의 복면인이 손에 쥔 협봉검에는 선명한 푸른색의 검기가 맺혀 있었다. 최소한 일류의 경지는 뛰어넘었다는 증거였다.

    ‘죽었어!’

    푸른 점의 복면인은 눈에 살기를 뿜어내며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부하들이 놈을 공격하는 사이,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공을 사용해 일격에 죽일 생각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믿는다.

    특히 붉은 점의 복면인은 자신과 엇비슷한 정도의 능력을 지녔다.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

    다른 복면인들과 달리, 자신의 무공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까는 무슨 사술을 사용한 것인지 몰라도 자신에겐 통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놈이 더 수상해!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다!’

    붉은 점의 복면인은 유유자적한 태도 물러나 있는 키아벨리아스를 힐긋 쳐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를 중얼거린 순간, 놈을 죽이려고 튀어 나갔던 부하들이 우수수 튕겨 나왔다. 아까보다 더 괴상한 사술을 발휘하기 전에 정천우를 죽이고 곧바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모아 전신에 퍼뜨렸다.

    츠즈즈즈…….

    지면을 박차고 날아가는 푸른 점의 복면인에게서 하얀색 기류가 흘러나와 전신을 감쌌다.

    “최후…… 뭣?”

    푸른 점의 복면인은 호기롭게 소리치다가 이내 황망한 감정이 뒤섞인 탄성을 질렀다.

    부하들의 몸이 마구 갈라지고 있었다.

    허공으로 비산하는 붉은색 피.

    믿었던 붉은 점의 복면인 역시 관자놀이 부근에 혈선이 생겨나면서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부하들의 육신이 조각나면서 생기를 잃어 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필살기를 사용한 상태였다.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내공이 역류해 몸을 망가뜨릴 게 뻔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푸른 점의 복면인은 협봉검을 중신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흡사 하나의 거대한 송곳으로 변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꺼져!”

    쾅!

    정천우는 비웃음을 흘리면서 역천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맹렬한 회전을 머금은 푸른 점의 복면인은 전신이 부서지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정천우의 역천검이 협봉검과 부딪친 순간, 맹렬하게 회전하며 전신을 감싸던 하얀색 기류가 단번에 흩어졌다.

    쿠당탕!

    “크억! 우욱…….”

    푸른 점의 복면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세를 바로잡기 무섭게 속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참으려고 해 봐도 튀어나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웨에엑! 크억…… 어째서, 어째서…… 너 따위 천한 낭인 따위가!”

    으드득!

    푸른 점의 복면인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아붙였다. 정천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이걸 원하는 거였지? 이깟 쇠붙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가치가 있었나?”

    “크윽…… 가치는 사람에 따라 변하는 법. 내가 힘이 없어 가질 수 없었음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대답하는 푸른 점의 복면인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슴을 폈다.

    “당당한 척하지 마, 역겨운 자식아! 역천검을 원한다고? 그래, 주지. 받아.”

    정천우는 이를 드러내며 푸른 점의 복면인에게 역천검을 내밀었다.

    눈에서 기쁜 빛을 드러내는 푸른 점의 복면인.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은 고통과 공포로 물들었다.

    “그, 그만…… 그만…… 끄윽! 커흑…….”

    “죽도록 원하던 거였잖아. 받아. 사양하지 마!”

    정천우는 살기를 내뿜으면서 역천검을 내밀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역천검의 칼날이 푸른 점의 복면인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명치에서부터 파고든 역천검의 검날을 밀어내려 푸른 점의 복면인이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을 움켜쥔 손가락이 후두둑 잘려 나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칼날을 밀어내려 했다.

    “크아아아! 아아악! 더러운 자식! 차라리 빨리 죽여라!”

    “원한다면!”

    정천우는 상대의 몸속에 한 뼘가량 들어갔던 역천검을 뽑아 수평으로 휘둘렀다.

    깔끔한 일격이었다.

    복면을 쓴 머리통이 둥실 떠올라 핏물을 한차례 쏟아 내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

    정천우의 뒤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진미령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천우가 뜻밖에도 복면인들을 몰살시켰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급 무인 정도의 실력밖에 되지 않았던 정천우가 너무나도 쉽게 복면인들을 해치우자 허무하기까지 했다.

    “정 무사님……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요? 어째서…….”

    진미령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보여 주었던 정천우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보다도 내공이 부족해 조금만 경공을 사용해도 숨을 헐떡이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겹쳐지지가 않는다.

    “아니죠? 설마 그런 건 아니죠?”

    진미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상상이 잘못된 것이길 바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정천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역천검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이 일부러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가 다가오자 진미령은 겁을 집어먹었다.

    진선문의 사람들을 도륙하던 복면인들을 한순간에 해치운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무엇인가!

    저런 힘을 숨기고서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미령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역천검 때문입니다. 진 소저가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 역천검?”

    “네, 역천검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다른 세상에 넘어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말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 끝에 가서는 말끝을 흐리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날 만나기 위해서?”

    진미령은 정천우의 뒷말을 따라 하면서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스러운 얘기였지만,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천우는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경계하는 눈빛의 그녀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등에 맨 마법 배낭을 풀어 뒤적거렸다.

    “이거 기억나십니까?”

    마법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낸 정천우가 진미령을 향해 내밀었다.

    “그,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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