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5화 (1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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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9. 꿈에 그리던 중원으로 (3)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섭혼술이 어떤 것인지 아는 까닭이다.

    절대복종.

    섭혼술이라는 것의 특징은 너무나 단순명료하다. 걸리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걸렸다 하면 그걸로 끝이다.

    섭혼술의 성공을 위한 절대명제는 시전자가 피시전자보다 내공과 정신력이 우월할 것.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인 자신보다 높은 내공과 정신력이라니!

    ‘하지만 당했어!’

    키아벨리아스는 눈앞에서 냉소를 짓는 정천우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봐도 이게 현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정천우의 한마디에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상태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다.

    “중원으로 보내 주마.”

    키아벨리아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을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붙들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차라리 그가 원하는 대로 깔끔하게 중원으로 보내는 편이 낫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이 세상에선 자신을 곤란하게 할 존재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말이다.

    “너도 가야지.”

    “나도? 내가 왜?”

    키아벨리아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서 자신을 중원에 데려가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천우에게 가기 싫다는 의지를 강하게 담아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정천우는 그의 바람을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중원이라고 해 놓고 다른 세상의 중원에 보낼지 내가 어떻게 믿어? 네놈을 끌고 가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같이 가는 거다.”

    “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맹세컨대 정천우, 그대를 무사히 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다급한 김에 애원하듯 말했다.

    중원까지 끌려가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닥쳐! 네놈은 믿음을 주지 못했어. 대신에 한 가지는 약속해 주지. 무사히 날 중원에 데려다준다면, 넌 이곳으로 돌아와도 좋아. 다만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안 되는 거 알지?”

    “끄응…… 정말 제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쯧쯧쯧…… 진작에 잘했어야지. 나한테 그렇게 사기를 치고서 믿어 달라고? 조금 무리라는 생각이 안 들어? 확 중원에 가서 못 돌아가게 하는 수가 있어?”

    “……정말 돌려보내 주시는 겁니까?”

    “내가 너냐? 사기나 치게? 치사스러운 새끼, 사기 칠 땐 좋았지? 인마, 세상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출발하자.”

    “지금 말입니까?”

    “그럼 언제 가려고? 준비 다 끝난 거 아니었어? 그것도 사기였냐?”

    정천우가 눈썹을 꿈틀대면서 인상을 벅벅 긁었다.

    키아벨리아스는 식겁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자신에게 이상한 명령이라도 내리면 끝장이었다.

    “아닙니다! 준비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출발하겠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하지만 그가 말했던 ‘금방’은 아니었다. 정천우가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할 때쯤에서야 키아벨리아스가 작업을 마쳤다.

    “이게 금방이냐?”

    “시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이라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동대륙의 제단을 통했…… 아…… 음…… 아무튼 다 됐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역천검이 꽂혀 있던 장소였다면 번거롭게 마법진을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바보짓이었다. 이동 마법으로 동대륙에 존재하는 동굴을 찾아갔으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괜히 말을 꺼냈다가 괴팍한 성격의 정천우가 한 소리 할까 봐 눈치를 보았다. 연속으로 난감한 일을 겪으니 정신이 없어서 저지른 실수였다.

    그렇지만 키아벨리아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정천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역천검이 필요합니다. 중원의 역천검에 남겨진 좌표와 시간을 읽어 내려면 공명을 시켜야 합니다.”

    “확실한 거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작별 인사를 나눌 사람은 없습니까?”

    “작별 인사? 음…….”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막상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자 동대륙에서 만들었던 인연들이 떠올랐다. 당장 레어 밖에만 해도 오랜 시간 함께해 왔던 샤칼과 헤이먼이 있다.

    그리고 마교와 한창 전투를 벌이는 의혈맹의 전우들과 자신이 마음을 준 제인.

    ‘제인…….’

    정천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떠나가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여인.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진미령을 구할 수 있다!

    자신이 구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복면 쓴 놈들에게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정천우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인사는 다 하고 왔다. 가자!”

    “알겠습니다.”

    키아벨리아스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며 정천우에게 역천검을 받아서 마법진의 중앙에 꽂았다.

    “정천우 님, 역천검에 손을 대어 주십시오.”

    키아벨리아스는 역천검의 손잡이를 왼손으로 잡은 채 정천우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정천우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잡기가 무섭게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라이트닝 인피니티(Lightning Infinity)!”

    용언 마법이 사용되는 것과 동시에 마법진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면서 번개가 내려쳤다.

    수십 개의 번개가 마법진에 떨어지자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활성화되고 난 후에 ‘라이트닝 인피니티’ 마법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한꺼번에 벼락이 마법진을 강타했다.

    파지직, 파직!

    지면에서 스파크가 일어나 역천검을 향해 몰려들었다.

    우우웅!

    번개의 기운을 빨아들인 역천검의 검신에 룬어가 생성되면서 빛을 발했다.

    역천검에서 시작된 빛은 키아벨리아스와 정천우의 몸을 집어삼키면서 동굴을 환하게 밝혔다. 점차 강해지던 빛이 더 이상 밝을 수 없을 때까지 빛을 발하더니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진동음이 일어났다.

    파악!

    최고점에 달한 빛이 어느 순간 일시에 사라졌다.

    키아벨리아스의 레어에는 생명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괴괴한 적막에 휩싸였다.

    ***

    우우웅…….

    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정천우와 키아벨리아스의 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몸은 빛의 기둥 속에 있었다.

    “……진짜였어!”

    “전 거짓말 안 합니다.”

    키아벨리아스는 억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중원으로 보내 준다고 했음에도 억지로 같이 오게 되었다. 애초에 자꾸 사기를 친 때문이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정천우가 감탄하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천우는 키아벨리아스가 억울해하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빛의 기둥 바깥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령 소저…….”

    정천우가 눈을 꼭 감은 채 겁에 질린 모습을 발견하고선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여인인가!

    동대륙에 떨어져 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그녀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다시 보게 될 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라고 또 원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가련하다.

    지켜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천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정천우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진미령의 반대편…… 그러니까 빛의 기둥을 중심으로 반대편이라는 의미다.

    협봉검을 앞세운 복면인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놈의 눈에는 반드시 정천우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붉은 점의 복면인이 냉소하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드득!

    “개자식!”

    정천우의 주먹이 떨렸다.

    동대륙에 넘어가기 전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나고 말았다. 진미령을 보호하면서 빗속을 도망쳤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름답지 않은 기억.

    비참하게 토끼몰이를 당한 더러운 기분.

    이제 와 생각하니 우습기만 했다. 별 볼 일 없는 놈들에게 쫓겨서 죽음을 생각했다는 게 말이다.

    “도마뱀!”

    “저기…… 키아벨리아스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닥쳐! 사기꾼 도마뱀!”

    “끄응…… 말씀하십시오.”

    키아벨리아스는 코웃음을 치는 정천우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말았다.

    그의 눈빛을 받으면 절로 위축되어 반항할 엄두도 낼 수 없다. 섭혼술을 해제하려면 시전자인 정천우보다 정신력이 더 높은 고수가 풀어 줘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건 이제 정천우가 자신더러 다시 동대륙으로 넘어가라는 말만 해 준다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약속만 지켜진다면 섭혼술로 이어진 영적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거기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표현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왜 그대로 멈춰 있는 건데?”

    “역천검을 손에 쥐어야 이 세계에 완전히 동화가 됩니다. 지금은 아직 시공간을 초월해 현신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

    정천우는 눈에 빛을 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진미령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고 그녀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려 왔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허공에 떠 있는 역천검에 손을 뻗었다. 당시 역천검을 버리기 위해서 치켜들었던 그 위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쩌저정!

    정천우가 역천검을 손에 쥔 순간, 빛의 기둥에 무수히 많은 실금이 생겨났다가 한순간에 굉음과 함께 깨져 나갔다. 물론 그것은 정천우와 키아벨리아스에게만 들렸다.

    빛의 기둥이 깨져 나간 것과 동시에 정천우가 손을 뻗었다.

    콰직!

    “웃!”

    협봉검과 하나가 되어 쏘아지던 복면인이 당혹성을 흘렸다. 정천우의 왼손이 협봉검을 와락 움켜쥐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몸무게가 고스란히 실렸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 복면인은 황급히 협봉검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무슨 사술이냐!”

    붉은 점의 사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번개가 치면서 번쩍하는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다.

    정천우의 모습은 이제 무인이라기보다는 전쟁 낭인과 같아 보였다. 낡아 보이는 갑옷을 입었으며, 신발까지 쇠로 만들어진 것을 신었다.

    복면인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번개가 치는 짧은 시간에 옷이 바뀌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 늘어난 사람은 심지어 색목인이었다.

    사술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정천우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고개만 돌리면 그녀가…….’

    정천우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왼손에 쥐었던 협봉검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퉁…….

    흙구덩이의 빗물이 흙탕물로 변해 튀면서 협봉검이 떨어졌다.

    순간 복면인들의 눈에 기광이 맺혔다.

    협봉검의 검날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진 검날처럼 손자국대로 검날이 망가져 있었다.

    복면인들이 믿기지 않는 신위(神威)에 놀라는 사이, 정작 정천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근대는 심장이 그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정 무사님?”

    “진 소저!”

    정천우는 빗물과 눈물로 얼룩진 진미령을 끌어안았다.

    그녀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겠지만 정천우에게는 엄청난 시간을 지나 만나는 거였다. 진미령은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놀랐지만 이내 몸에 힘을 뺐다.

    ‘좀 더 일찍 만났었더라면…….’

    진미령은 그의 품에 안기며 최후를 준비했다.

    이렇게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인들은 자신과 정천우에게 몹쓸 짓을 할 게 분명하다. 걱정되지만 지금 당장은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사람 품에서 차라리 자결을…….’

    진미령은 주춤거리던 복면인들이 무기를 들면서 살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복면인들이 달려들면 전신의 내공을 역행시켜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정 무사님, 고마웠어요.”

    진미령이 처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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