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Chapter 49. 꿈에 그리던 중원으로 (2)
“……지금 뭐라고 씨부렸냐?”
정천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키아벨리아스를 올려다보았다.
전과는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봐야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키아벨리아스가 천 년 동안이나 어쩌지 못했던 균열의 힘을 흡수한 상태다. 키아벨리아스를 두들겨 팰 때도 사실 온전히 힘을 다 사용하지 않았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단순히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정을 봐준 것이다.
그런데 조금 힘이 늘었다고 까불어 대는 드래곤을 보니 열이 확 받았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본데,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칭호가 아무렇게나 얻을 수 있는 거라 여겼나?]
“햐…… 이거 정말 더러운 새끼네? 중원에 보내 주겠다는 약속 따윈 잊은 거냐? ‘마나의 맹세’도 사기 치는 게 가능한 거야?”
[크크크크…… 내가 널 중원에 보내 준다고 했지, ‘살아 있는 너’를 중원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는데?]
“……장난하냐?”
정천우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화가 나긴 했지만 키아벨리아스의 말대로다. 어쨌든 보내 준다고 했지, 살아 있는 상태로 보내 준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 더럽게도 말장난을 좋아하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정천우는 내렸던 역천검을 다시 들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함께 시리도록 살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이젠 빌어도 소용없다!”
정천우는 반쯤 죽여 놓고 대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시는 말장난을 할 수 없도록 샤칼과 같은 종류의 맹세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흥! 누가 너와 드잡이질을 할 줄 알았냐!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토막을 쳐 주겠…… 으응?”
이를 갈면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던 정천우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키아벨리아스가 용언 마법을 사용한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정신이 아득해져 오기까지 했다. 키아벨리아스와 정천우의 몸에서 일어난 빛이 두 사람을 하나로 이었다.
[크하하하! 이제 네놈은 죽는 거다! 이 마법에 당하고도 살아난 존재는 이제껏 없었다!]
키아벨리아스가 시원하게 웃으면서 이미 승리한 것처럼 크게 소리쳤다.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그가 자신할 만한 마법이었다. 9서클 마법인 주제에 간단한 시동어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마법의 효과는 더욱 단순하다. ‘파워 워드 킬’ 마법을 사용한 대상을 정신력으로 찍어 눌러 자살하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시전자보다 정신력이 뛰어나다면 마법의 저주를 벗고 멀쩡할 수 있다. 그러나 시전자보다 정신력이 약하다면 죽어야 한다. 그게 바로 파워 워드 킬이다.
키아벨리아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드래곤보다 정신력이 뛰어난 존재는 없으니까.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마법이 끝날 때까지 시전자와 피시전자가 모두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개……자……시익…… 으윽!”
정천우가 잇새로 욕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끊임없이 자살 충동이 일어나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역겨움이 밀려들었다. 깨질 듯이 머리가 아파 참을 수 없었다.
―네까짓 게 살아서 뭐하지?
―여자 하나도 지키지 못한 놈이 뭘 할 수 있어? 그냥 죽어 버려!
―약해! 약해! 네놈이 사용하는 공기마저 아까워! 죽어 버렷!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이 나타나 그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자신을 기르다시피 했던 늙은 낭인들이 더럽다며 욕하고 짓밟을 때였다.
분명 엄청난 힘과 무공을 지니고 있음에도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철저한 무력감이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가 죽였던 사람들이 나타나 차례차례 자신의 목을 베기도 했다. 중원에서 죽였던 사람뿐만 아니라 동대륙과 서대륙의 인물도 나타났다.
나중에는 제인까지 나타나 그에게 칼을 내밀었다. 치욕스럽게도 수컷의 본능에 관한 것들을 이유로 목을 베었다. 수치스럽고,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 외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그의 몸에 칼을 쑤셔 박고 침을 뱉으며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끄으으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정천우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동자가 점차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의 정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져 극단적인 자기혐오 상태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키아벨리아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뇌가 녹아내리고 심장이 터져 죽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찮은 호비트치고는 훌륭한 정신력이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키아벨리아스는 벌써 두 시간이나 꿋꿋하게 버티는 정천우를 노려보며 살짝 감탄했다.
하지만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빛이 죽었다는 것은 ‘파워 워드 킬’ 마법에 거의 잠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법이 발현되는 즉시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정천우가 대단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장이었다.
9서클 마법 ‘파워 워드 킬’에 오래 버텼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 봐야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끄아아아악!”
정천우가 고개를 치켜들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과 코를 비롯해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조리 피가 흘러나왔다.
[끝났군.]
키아벨리아스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정천우의 상태로 보아 죽은 게 틀림없었다. 뇌가 폭발하면서 피가 흘러나온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내 몸이……?’
싱겁게 미소 짓던 키아벨리아스는 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파워 워드 킬 마법에 의해서 대상이 죽으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마비 증상도 풀려야 한다. 그런데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큭…… 씨발 도마뱀!”
[뭣! 으윽! 컥! 으으윽!]
키아벨리아스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랄 사이도 없었다.
드래곤 하트에서 빠져나갔던 마나가 역류하면서 전신에 고통을 주었다.
이런 현상이 뜻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마법 실패에 따른 마나 역류!
“빌어먹을 새끼! 네놈 때문에 더러운 기억이 떠올라 버렸어. 알아?”
정천우가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얼굴도 모르는 부모 따위가 나타나 욕을 하다니,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정천우가 빠드득 하고 이를 갈았다.
다른 사람들이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서만큼은 아니었다. 다 죽어 가던 정천우를 분노의 힘이 일으켜 세웠다.
정천우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 대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올수록 키아벨리아스는 공포를 느꼈다. 더욱이 마나 역류로 인해 속이 뒤집어지는 상태였기에 미칠 지경이었다.
정신력이라면 자신을 따라올 존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제대로 꼬였다.
[쿠웨엑! 자, 잠깐!]
“닥쳐!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정천우가 눈에 내공을 퍼부으면서 능공허보의 수법으로 솟구쳤다.
파즈즈즛!
괴로워하는 키아벨리아스의 눈높이까지 몸을 띄운 정천우가 눈에 힘을 주었다.
[크으윽! 무슨 짓을…….]
“나만 당할 줄 알았냐?”
정천우가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순간, 그의 눈에서 광망이 터져 나왔다. 빛에 노출된 키아벨리아스는 눈동자를 타고 전신에 퍼지는 괴이한 기운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는 종이다!
―보잘것없는 놈아! 복종하라! 경배하라! 찬양하라!
온갖 환청과 환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키아벨리아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천 년이나 잠을 못 자서 쌓인 피로와 마나 역류로 인한 육체적인 약화, 그리고 정천우가 발휘한 섭혼술(攝魂術)…….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의 정신 공격을 거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쿠워어어어! 콰우우우!]
키아벨리아스가 포효를 터트리면서 섭혼술에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약해진 육체와 정신은 섭혼술의 끈적하고도 집요한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가 황금빛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키아벨리아스의 입은 쉬지 않고 비명을 질러 댔다.
마침내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붉은색이 되었다가 원래의 황금빛 눈동자로 돌아왔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두통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마나 역류로 발생한 고통까지 한 번에 말이다.
[크륵, 크륵…… 내게,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키아벨리아스는 레어가 떠나갈 정도로 으르렁거렸다.
분명 뭔가가 달라졌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인간이 두렵다는 점이다.
인정할 수 없었다.
위대하고도 강력한 존재인 자신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다니…… 그것도 그냥 두려운 게 아니라, 인간 따위를 자신보다 위로 놓고 보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마치 드래곤 로드 혹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 주었던 부모를 보는 수준의 두려움이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존경과 경외심을 담은 종류의 두려움.
그래서 키아벨리아스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감정에 빠져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일 거 같은데?”
[이건, 이건…… 쿠워억! 네놈! 똑바로 말하라!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키아벨리아스는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인간 따위한테 동족 의식까지 느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놈? 지금 네놈이라 했어?”
[그렇다! 짓이겨 버리고 말리라! 크워어억!]
“시끄러워. 닥쳐!”
[…….]
포효하던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포효를 터트렸는데, 단순한 말 한마디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모양인데…… 제길! 크기 좀 어떻게 안 되냐?”
츠즈즈즛!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아벨리아스의 몸이 작아졌다.
정천우는 거대한 덩치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바람에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고개를 숙였다. 동굴 밑바닥에 인간 남자가 서 있었다.
정천우가 내공을 사용해 바닥에 내려섰다.
“희한한 재주는 다 가지고 있군. 주둥아리 잘못 놀리면 영원히 입 다물라고 할 테니까 똑바로 해라. 알겠어?”
“…….”
금발 머리의 사내로 변신한 키아벨리아스가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 말해도 돼.”
“푸확!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대답해 봐! 대답해 보라고!”
“이 새끼가 또? 죽고 싶냐? 확 자살하라고 해 볼까? 어떻게 되는지?”
“……끄응!”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키아벨리아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생각하던 키아벨리아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정천우와 눈을 맞췄다.
“설마…… 섭혼술?”
“똑똑한데?”
“빌어먹을! 섭혼술 따위에 걸리다니! 뭐 이렇게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으아아아!”
키아벨리아스는 원통하다는 듯이 괴로워하며 화려한 금발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괴로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