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93화 (193/200)
  • # 193

    Chapter 49. 꿈에 그리던 중원으로 (1)

    쿠구궁…….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파괴적인 균열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정천우의 오러 블레이드는 키아벨리아스가 어쩌지 못할 만큼의 거력을 담고 있었다.

    무저갱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구덩이가 깊게 파인 채 열기를 내뿜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바닥이 용암처럼 녹아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크르르륵……?]

    키아벨리아스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상처 난 곳을 그을리며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아픔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생겨난 깊고도 거대한 구덩이를 힐끗 내려다본 순간 절로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 엄청나. 호비트 따위가 이런 엄청난 위력을…… 그런데 균열은?’

    [어, 없어?]

    “얍삽하고 더러운 도마뱀 새끼야, 없긴 뭐가 없어?”

    정천우는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화를 냈다.

    중원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면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겨우겨우 검 끝을 틀게 할 수 있었다.

    키아벨리아스를 찾아온 목적은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성질이 난다고 해서 저 밉살스러운 골드 드래곤을 죽였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균열이 어떻게 된 거지?]

    “이 새끼가 장난하나…… 그 망할 놈의 균열을 네가 없앴냐?”

    [아, 아니다!]

    “그럼 누가 없앴겠냐? 생각이란 걸 할 줄은 아냐?”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차라리 균열의 기운을 흡수할 게 아니라 버티기만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경험하는 기연을 얻었지만 그다지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첫 번째 환골탈태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받았다. 바늘로 육체를 한 땀 한 땀 뜯어내는 듯 끔찍한 고통 속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자신은 그렇게 고통을 받는데, 정작 원인을 제공한 누런 도마뱀은 옆에서 동굴을 무너트릴 듯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겪고 깨어난 정천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가 ‘중원’이라는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그렇다고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키아벨리아스는 균열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기쁨에 겨웠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균열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신력과 상당한 양의 마나가 필요하기에 잠부터 자야만 했다.

    그런데 균열이 사라졌다.

    드래곤 하트를 일부 희생할 각오까지 하던 그였기에 이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키아벨리아스는 자신의 몸에 회복 마법을 사용해 상처를 치유하고 정천우를 내려다보았다.

    [고맙다.]

    “닥쳐! 음흉하고 더러운 도마뱀 새끼 같으니, 긴말 필요 없어. 중원으로 보내 줘!”

    정천우는 말도 섞기 싫다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존재다. 같이 있는 것조차 불쾌했다.

    ‘생각해 보니…… 이 자식이 날 엉뚱한 곳으로 보내면 어떡하지?’

    정천우의 눈이 번들거렸다.

    만나자마자 자신에게 사기 친 놈이다. 중원으로 보낸다고 해 놓고서는 전혀 다른 세상에 보낸다면 큰일이다.

    “만약 중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보낼 생각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 그런 짓을 할 것 같으냐!]

    키아벨리아스가 말을 더듬었다. 속마음을 딱 들킨 것이다.

    지상 최강의 존재인 자신이 하찮은 호비트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대충 아무 곳에나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게 딱 걸리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정천우가 눈매를 좁히면서 살기를 끌어올렸다.

    “너 이 자식! 날 엉뚱한 곳으로 보낼 생각이었지!”

    [아,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야비한 새끼! 네 말을 믿을 수 없다!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거짓말을 안 한다더니, 다 개소리였어. ‘마나의 맹세’를 해라! 그럼 죽이지는 않겠다!”

    정천우는 샤칼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키아벨리아스를 향해 소리쳤다.

    ‘마나의 맹세’를 한다면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보내는 순간, 키아벨리아스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니, 지금 상황에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날 믿지 못하겠다니, 그렇게 하겠다. 나 키아벨리아스는…… 호비트! 네 이름이 무엇인가!]

    “정천우!”

    [나 키아벨리아스는 호비트인 정천우를 중원으로 보낼 것을 맹세한다. 만약 이것을 어길 경우, 마나의 맹세에 의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웃기지 마! 어디서 잔머리를 굴려? 지금 당장 보내 준다는 소리는 왜 빼? 내가 또 당할 줄 알아? 팔 하나쯤 잘라 놔야 진지해질 마음이 생기겠냐?”

    정천우가 버럭 화를 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종족이라고 하더니, 대신에 주둥아리를 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일부러 가장 중요한 ‘시간’을 빼먹은 게 티가 난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역천검을 들면서 파괴적인 오러 블레이드를 덧씌웠다.

    ‘제, 제길! 내가 호비트 따위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는 날이 오다니!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놈을 감당할 수 없어!’

    [자, 잠깐! 그게 아니다! 당장은 나도 곤란하다. 오랜 세월 동안 균열을 지키느라 마나 상태가 좋지 않아! 시공간을 초월하는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지금 내 상태가 나쁘다!]

    “그래서 어쩌라고?”

    [약간의 시간을 다오. 드래곤 하트에 마나를 채우면 곧바로 널 중원에 보내 주겠다.]

    “그리는 동안 중원에 두고 온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봤어?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사람 꼭지 돌게 만드네? 일단 팔 하나 떼 놓고 얘기하자!”

    정천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에서 불을 뿜었다. 역천검에 흐르던 오러 블레이드가 더욱 증폭되면서 파괴적인 기운을 사방으로 줄기줄기 뿜었다.

    키아벨리아스는 뜨악한 얼굴로 서둘러 두 손을 활짝 펼쳐 마구 손사래를 쳤다. 엄청난 덩치의 그가 뒷걸음질을 치며 손을 마구 흔들어 대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지, 진정해라! 중원이라면 걱정할 거 없다!]

    “뭔 개소리야! 일단 좀 맞자!”

    [빌어먹을, 좀 멈추라고! 중원이란 곳의 시간은 멈춰 있다.]

    “……뭐?”

    살기를 뿌려 대며 막 역천검을 내리치려던 정천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희망적인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가 잠깐 멈칫한 사이, 키아벨리아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중원의 역천검과 이 세상의 역천검이 이어져 있다는 건 알 것이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건데?”

    [네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면 이쪽 세상에 넘어온 그 시간일 것이다.]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고통이라는 감각은 익숙하지 않았다.

    생소하기만 한 감각에 생전 처음 두려움이라는 걸 느끼는 중이다. 다른 드래곤에게서조차 느껴 보지 못했던 희한한 감정이었다.

    “……정말이야?”

    정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중원에서 사라진 당시로 되돌아갈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시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미령이 아직 몹쓸 짓을 당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녀가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지 노심초사했던 일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 그게 확실한 얘기야?”

    [물론이다. 필요하다면 ‘마나의 맹세’까지 하겠다.]

    “해!”

    으득…….

    [나 키아벨리아스는 중원의 시간이 멈춰 있다는 말이 진실임을 보증한다. 만약 이것이 거짓일 경우, ‘마나의 맹세’에 따라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자연의 품으로 사라질 것이다.]

    키아벨리아스는 이를 뿌드득 갈면서 ‘마나의 맹세’를 중얼거렸다.

    감히 호비트 따위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이렇게 한마디 할 때마다 맹세를 시켜 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호비트 따위’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지나치게 강하긴 했지만 말이다.

    “좋아, 사기는 아니었군.”

    정천우의 표정이 풀렸다.

    진미령이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상태라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서대륙의 최강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강해졌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는 드래곤조차 이제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중원에 간다면 천하제일인도 꿈이 아니다. 자신의 경지라면 초절정을 넘어서 조화경의 경지에서도 끝자락에 해당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조화경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강호인은 전설로 회자되는 뇌전검황밖에 없으니, 지금 당장 중원으로 가도 자신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게 뻔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진미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안심되었다. 가장 큰 스트레스가 해결되자 정천우의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아까도 말했듯이 약간의 시간을 다오. 드래곤 하트에 마나를 채워야 시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 얼마나 걸리지?”

    [마나 드레인 마법을 사용할 것이라 얼마 걸리진 않을 거다. 균열의 에너지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으니 더욱 빨리 마나를 모을 수 있을 거다.]

    “좋아, 믿겠어. 하지만 한 번만 더 개수작 떨면, 알아서 해.”

    [그런 일은 없을 거다. БЙЖЙПБЫЭб…… 마나 드레인(Mana drain)!]

    정천우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아벨리아스는 주문까지 외우면서 신중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거대한 그의 몸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겨났다. 정천우는 주변의 기운이 키아벨리아스에게로 빨려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호신강기를 펼쳐 자신의 내공이 빼앗기는 것을 막았다.

    마나가 부족하다는 키아벨리아스의 말이 사실이었던지, 주변의 마나가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는 현상이 한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키아벨리아스의 몸에서 점차 빛이 나기 시작했다. 골드 드래곤 특유의 황금빛이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동굴 내부를 밝혔다.

    ‘지루해 죽겠네.’

    정천우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키아벨리아스의 마나 흡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바람이 통했는지, 점차 회오리치던 마나의 흐름이 약해지고 있었다. 마나의 움직임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서야 키아벨리아스의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크하하하! 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힘인가!]

    키아벨리아스는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로 감탄하며 크게 웃었다.

    천 년간이나 균열이 폭발하지 않게 지키면서 마나가 소진되기만 했다. 드래곤 하트가 성장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마나를 오버 충전할 정신이 없었다. 균열을 지키느라 빠져나가는 마나를 끌어다 쓰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긴 탓에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오버 충전시켜 확장된 드래곤 하트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전신에서 힘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잠이 부족해 약간은 정신이 흐릿한 느낌이었지만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이봐, 처웃지만 말고 약속을 지켜야지?”

    정천우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기다려 줬더니 웃고만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중원으로 돌아가 진미령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그래서 키아벨리아스의 눈빛이 변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빌어먹을 호비트 놈! 잘도 까불었겠다?]

    키아벨리아스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천우를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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