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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91화 (191/200)
  • # 191

    Chapter 48. 키아벨리아스 (2)

    지상 최강의 존재.

    모든 생명체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자.

    키아벨리아스라는 골드 드래곤은 그렇게 지고한 위치에 선 생명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쾅! 콰광! 쾅!

    [크아악! 그만! 내가 쓰러지면 이 세계가 위험하단 말이다!]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천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역천검을 내려쳤다.

    한계까지 확장한 오러 블레이드가 키아벨리아스의 몸뚱이를 두들겼다.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비늘이 타격을 받을 때마다 깨져 나갔다.

    퍼걱!

    [끄아아악!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비늘이 벗겨져 나간 곳에 역천검이 틀어박히자 키아벨리아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지상 최강의 존재인 그가 언제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겪어 봤겠는가!

    고통이라는 생소한 감각을 느낄수록 그의 비명은 더욱 처절하고 높아져만 갔다.

    [크악! 내가, 내가 손을 놓으면 돌이킬 수 없다! 제발 멈춰라!]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개 같은 도마뱀 새꺄!”

    정천우는 애원하는 키아벨리아스의 말을 살포시 씹어 주면서 전신의 내공을 담아 옴팡지게 내려쳤다.

    꽈아앙!

    [컥! 마, 망할 호비트 자식!]

    살점이 무더기로 파헤쳐지면서 키아벨리아스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거대한 몸뚱이에 비한다면 상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몸속에 퍼지면서 내부를 휘저은 탓에 외상보다는 내상이 문제였다.

    우우우웅…….

    “또 무슨 일이야?”

    정천우가 인상을 구겼다. 귀를 울리는 거북한 소리 때문이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던 정천우는 몸이 굳어졌다.

    시커먼 균열을 뇌전의 기운으로 지져 대던 키아벨리아스가 약해지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뇌전의 기운이 스러지면서 시커먼 균열이 꿈틀댔다.

    정천우가 놀란 것은 단순히 균열이 커졌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균열 사이로 무언가가 튀어나와 꿈틀거렸던 까닭이다.

    검은색 뻣뻣한 털로 잔뜩 뒤덮인 손이었다. 인간의 손은 분명히 아니었다. 길게 자란 손톱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쿠워어어어어!”

    “다 죽여 버리겠다! 캬아악!”

    손만 내미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어떤 놈들은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섬뜩한 목소리가 가슴 저 밑바닥에 숨은 두려움을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정천우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시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

    [빌어먹을 호비트 놈! 저건 마족이 아니라 마신들이다! 내가 죽으면 이놈들이 와르르 풀려 나온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네놈을 물어뜯겠지!]

    키아벨리아스는 지친 목소리로 정천우에게 으르렁거렸다.

    벌써 천 년이나 홀로 균열을 막아 내는 중이다. 지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은 자고 싶었다. 한숨도 못 잔 채로 천 년이나 우직하게 균열만 막고 있었다.

    원래에도 성격이 더러웠지만 고독하게 지낸 천 년의 시간 동안 그의 성격은 더 이상 더러워질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

    “제길…….”

    정천우는 균열 사이로 노란 눈을 번뜩이는 마신이라는 것들의 모습에 역천검을 내렸다.

    분위기로 보아, 이제껏 눈앞의 골드 드래곤인 키아벨리아스가 마신들을 막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겨우 신체의 일부분이 균열 밖으로 나온 것뿐인데도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상대는 아닐 것 같았지만 저런 것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다구리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뭘 망설여! 막아, 등신아!”

    정천우가 이를 드러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박력에 놀란 키아벨리아스는 다급하게 뇌전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열리려던 균열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키에엑!”

    “캬아아아! 열어라! 열어!”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어! 크아악!”

    억지로 균열이 줄어들자 마신들이 저주의 말을 내뱉으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정천우의 공격에서 해방된 키아벨리아스는 능숙하게 균열을 봉쇄하며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치료했다.

    “어이, 싸가지 없는 도마뱀.”

    [죽고 싶나! 하찮은 호비트 따위가 감힛!]

    “맞고 시작할까?”

    [끄응…….]

    키아벨리아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놈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균열을 막느라 힘이 분산되는 중이다. 이런 상태로 싸워 봐야 자신에게 승산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계에서 초대한 조력자가 강한 건 반길 일이지만 정도 이상으로 강한 게 문제였다.

    [……말하라!]

    “폼 잡기는…… 네가 날 이쪽 세계로 불렀냐?”

    [그렇다.]

    “왜지?”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가 인정하고 나오니 그동안 쌓인 악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너도 봤겠지만, 마계와 인간계 사이에 생겨난 균열 때문이다. 널 여기로 부른 건 이 균열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다.]

    “왜 하필 나지?”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이면 자신이란 말인가!

    물론 좋은 점은 있었다. 중원에서는 꿈도 꿔 보지 못할 능력을 얻었다. 지금 상태로 중원에 돌아간다면 천하제일인을 노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 와서 겪었던 기억들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생전 처음 진심이 담긴 사랑을 속삭이던 진미령과 강제로 헤어졌다는 게 가장 화가 났다. 지금쯤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듯이 괴로웠다.

    [마나를 정제할 줄 아는 존재가 필요했다.]

    “다른 드래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드래곤도 마나를 정제하는 능력은 없다. 그랬다면 벌써 이 균열을 없앴겠지. 아니, 애초에 내가 혼자 해결했겠지. 하지만 내 힘으로는 균열이 열리지 않게 막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닥치고 널 도우라는 거야? 이 새끼, 더럽게 양심 없네?”

    정천우는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키아벨리아스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마신이라는 놈들이 균열 밖으로 나오면 피곤해진다는 건 그도 안다. 하지만 화가 난다. 당연히 균열을 막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키아벨리아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도와다오.]

    키아벨리아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참으면서도 정천우에게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넌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정천우는 드디어 본심을 꺼냈다.

    벽력대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역천검을 만든 것은 눈앞에 있는 키아벨리아스다. 중원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도움이고 뭐고 그냥 등을 돌릴 생각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 내 힘이 닿는 한 모두 들어주겠다.]

    키아벨리아스의 어조는 평온했다.

    하지만 실상은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균열을 막느라 벌써 천 년을 넘게 이 지긋지긋하고 힘든 작업을 계속해 왔다.

    자고 싶다.

    실수로 몇 번 졸았던 적도 있다. 그때마다 몸체가 작은 마족들이 균열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마신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힘을 가진 놈들이었다. 놈들이 빠져나가 봐야 별다른 힘을 쓰진 못하겠지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자신의 레어 부근에 인간들이 진을 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들은 황당하게도 균열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노렸다.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흑마법의 기운이 끊이지 않고 느껴진다는 점이다. 균열을 통해 빠져나간 기운을 바탕으로 마족 소환진 같은 걸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누구는 기껏 마계와 이어지는 통로를 막느라 죽을 똥을 싸고 있는데, 간악한 인간 놈들은 그 기운을 이용해 마족을 소환한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균열이 열리면 지상계는 암흑으로 뒤덮일 테니까 말이다.

    이제 그토록 염원하던 존재가 이계에서 넘어와 자신의 앞에 서 있다. 아니꼽고 더럽지만 어떻게든 구슬려서 균열을 닫아야만 한다.

    키아벨리아스는 평온함을 가장하며 정천우의 입이 열리기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능해?”

    [중원? 네가 살던 곳을 말하는 것인가?]

    “맞아!”

    [가능하다.]

    “……그렇군. 정말이었어.”

    키아벨리아스의 입에서 확정적인 말이 나오자 정천우는 가슴이 벅차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진미령은 지금쯤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으드득!

    절로 이가 갈린다.

    동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복면인들에게 둘러싸여 처절한 무력감에 사로잡혔던 마지막 순간이 말이다.

    처참한 표정으로 침울해하던 정천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키아벨리아스를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도와주지. 내가 뭘 하면 되지?”

    [이 균열의 에너지를 흡수하면 된다. 물론 나 역시 균열이 벌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균열을 유지하는 에너지가 차단당하면 균열은 자연스럽게 닫힐 테니까.]

    “여기서 나오는 기운을 흡수하라고?”

    정천우는 균열에서 음산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깨닫고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 놈들의 기운을 몇 번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마교의 기사들이 품었던 마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도로 정제된 마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마기에 잠식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키아벨리아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천우를 부추겼다.

    [이곳 세상의 수준으로 마스터급의 기사 정도면 기운을 감당할 수 있다. 너는 기운을 흡수하고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맞는가?]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정말 마스터 정도의 수준으로 균열의 기운을 흡수하는 게 가능하다고?”

    [물론이다! 너라면 아무런 피해 없이 균열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키아벨리아스는 확신한다는 듯 정천우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말과 달리 확신 따윈 없었다.

    그가 드래곤 본으로 만든 역천검은 중원의 무인을 동대륙으로 끌고 왔지만 그 과정이 상당히 불친절했다.

    우선 골드 드래곤이 사용하는 기운인 뇌전의 기운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선별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뇌전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균열의 기운을 흡수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키아벨리아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무조건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차피 잘못되어 봐야 죽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얄미운 호비트 놈이었으니까 말이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괴팍한 성격의 그를 더욱 괴팍하고도 이기적인 성격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불안한데?”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손을 떼고 물러나면 될 것 아닌가! 이 균열을 처리하지 못하면 네가 온 곳으로 돌려보낼 마법을 사용할 마나가 부족하니, 알아서 결정하라.]

    키아벨리아스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천우에게 슬쩍 짜증을 부렸다.

    자신도 약점을 잡혔지만, 자신이 아니라면 상대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배짱을 튕겼다.

    “쳇!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약속은 확실히 지켜라!”

    [드래곤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믿겠다.”

    정천우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균열을 향해 다가갔다.

    시커먼 공간이 뇌전의 기운에 제압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뇌전의 기운이 사라지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대고 있었다. 균열 사이로 보이는 마신들의 충혈된 눈동자들이 섬뜩하기만 했다.

    정천우는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하면서 단전의 내공을 일깨웠다. 내공으로 육체와 단전을 보호하면서 균열의 기운을 받아들여 대자연의 기운을 섞어 정화할 생각이었다.

    ‘조금씩 받아들여서 점차 양을 늘려 나가야겠어.’

    정천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두 손을 활짝 펼쳐 균열에 가져다 대었다.

    지지직! 지직, 파지직!

    “허억! 끄으으으으…… 아아악! 으아아!”

    정천우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균열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조금씩 양을 늘려 가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의 장심(掌心)을 통해 들어오는 균열의 기운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자유다!]

    괴로워하는 정천우의 귀에 키아벨리아스의 광소가 들려왔다.

    “날…… 으윽…… 소, 속인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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