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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89화 (18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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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7. 암흑 산맥 (3)

    암흑산맥을 지나오면서 마주쳤던 마교의 기사들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정천우 일행의 손에 모두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긴 했다. 그들이 죽인 마교 기사의 숫자만 해도 200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마스터급 기사들이 50에 이른다.

    만약 그들을 통제할 수만 있었다면 마교가 진작에 서대륙을 집어삼켰을지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다행히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한꺼번에 체계적으로 달려들지 않아서 모두 해치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다. 광포한 마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정천우 일행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인님, 이거 왠지 불안합니다.”

    “뭐가?”

    “흘러나오는 마기가 너무 짙습니다.”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이건…….”

    “거의 다 왔어.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는 의미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란 말은 아니야.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돼. 마교 놈들은 모두 해치운 상태니까.”

    정천우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샤칼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함께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비록 자의에 의해서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은 자발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귀병신아, 이왕 가는 건데 끝까지 가자. 어쩌면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 자식이, 꼭 말을 해도!”

    “아!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저 녀석도 그 빌어먹을 신탁인지 뭔지는 해결해야 하잖습니까. 신탁이 역천검의 주인을 따라다니라는 거였으니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버럭 화를 내는 정천우에게 헤이먼이 손사래를 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괜히 꼬투리 잡혀서 두들겨 맞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티격태격하면서 산의 중턱쯤 올라갔을 때였다.

    점점 짙어지던 마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느끼며 정천우가 고개를 돌렸다.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근원을 찾는 것이다.

    “이쪽으로.”

    정천우가 앞장서서 걸으며 숲을 헤치고 걸었다. 잔가지와 푸르른 잎사귀들로 가려진 곳을 지나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더욱 짙어진 마기가 파괴적으로 날뛰고 있었다.

    마기가 흘러나오는 곳은 절벽이었다.

    “저게 뭐야…….”

    샤칼은 입을 쩍 벌리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게이트였다.

    시커먼 빛과 푸른색 빛으로 뒤섞인 게이트에서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마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 음습한 기운이었다.

    “이게 드래곤 레어라는 곳인가?”

    “네, 주인님.”

    “드래곤이란 놈들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하지 않았어? 크긴 하지만 이건 얘기로 들었던 것하고는 다르잖아.”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키아벨리아스라는 골드 드래곤은 높이 15미터에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50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놈이라고 했다.

    그런데 동굴 입구는 기껏해야 높이 2.5미터에 너비가 2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15미터에 이른다는 키아벨리아스가 출입하기에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들은 폴리모프라는 마법을 사용합니다.”

    “폴리모프?”

    “쉽게 말해서 다른 생명체로 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놈들은 인간이나 엘프와 같은 종족을 벌레처럼 생각하면서도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할 때는 보통 인간이나 엘프 혹은 드워프로 변신합니다. 가증스러운 놈들이죠.”

    샤칼은 설명을 하면서도 인상을 벅벅 긁었다.

    드래곤에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적개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쨌든, 이 안에 키아벨리아스라는 놈이 있다는 거지?”

    “그럴 겁니다. 성질이 더럽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이상하지 않아?”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천 년 전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가 그의 레어인 것은 확실합니다. 죽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샤칼은 확신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엘프들의 기록에 의하면 키아벨리아스가 천 년 전까지 암흑 산맥에 레어를 만들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서대륙의 악질적인 인간들에 의해서 엘프들이 동대륙으로 쫓겨난 다음의 일은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드디어 만나게 된단 말이지?”

    정천우가 눈을 빛냈다.

    중원에서 동대륙으로 넘어오고 바다를 건너기까지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개고생도 그런 개고생이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뺑이 치게 만든 빌어먹을 놈을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억눌러 두었던 분노가 솟구쳤다.

    그것은 설렘과도 같았다.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분노와 함께 떠올라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우선 자신의 몸부터 점검했다. 놈이 말을 듣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생사현관을 뚫고 환골탈태를 거친 그의 몸은 완벽했다. 굳이 호신강기를 일으키지 않아도 어지간한 공격은 그의 몸에 피해를 줄 수 없을 정도다.

    내공은 또 어떠한가!

    더 확장할 수 없을 만큼 단전은 넓고 튼튼했다. 주변에 흐르는 대자연의 기운을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기에 내공이 부족할 일은 없다.

    이 정도면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자.”

    정천우가 검은빛과 푸른빛이 일렁이는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는 정말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점액질로 이루어진 막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호기심을 느낀 샤칼과 헤이먼도 점액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지지직!

    “아욱!”

    “끄압!”

    샤칼과 헤이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머리카락이 미친년 머리처럼 붕 떠 있었다.

    “왜 그래?”

    “주, 주인님, 뇌전의 기운이 흐릅니다.”

    “단장님, 저희는 함께할 수 없을 듯합니다.”

    샤칼과 헤이먼이 질린 얼굴로 각자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을 입은 듯 두 사람의 손바닥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만약 멋모르고 그냥 진입했다면 큰 화를 당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천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을 점액질의 입구에 집어넣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정천우는 샤칼과 헤이먼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과의 동행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두 사람,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고마웠다.”

    “단장님, 단장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저 헤이먼은 단장님의 가르침을 잊지 못할 겁니다.”

    헤이먼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정천우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가 준 단약에 의해 마스터급 전사가 될 수 있었고 그의 실전 무공을 배우면서 더 강해졌다. 은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 샤칼은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는 꼭 한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해 봐.”

    “……주인님은 정말 좆같은 새끼여…… 크윽…… 였어. 그리고, 그리고 고맙…… 크아악! 제길! 니미 썅…… 잘살아! 으아악!”

    샤칼은 ‘마나의 맹세’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욕이나 한바탕 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이 밀려와 더 이상 욕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야 신탁의 내용을 이해했다는 점이었다.

    정천우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단약의 제조 방법이 엘프들에게 엄청난 축복이 될 것이다. 5서클 마법사에 불과했던 자신이 7서클 마스터가 되었을 정도다.

    단약의 독성을 없애는 방법이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장로급 엘프들과 머리를 맞대면 언젠가는 해결될 문제다.

    신탁이 정천우를 따라다니라고 했던 것이 결코 샤칼을 괴롭히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바닥을 뒹구는 샤칼의 표정이 괴로운 듯 후련해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큭…… 하여간 꼴통 새끼는 어쩔 수 없다니까. 그래, 다들 잘살아. 간다.”

    정천우는 바닥을 뒹구는 샤칼과 헤이먼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헤이먼은 고마움을 담아 군례를 올렸다. 놀라운 것은 고통 속에서 바닥을 뒹구는 와중에도 샤칼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자식들……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웠다.”

    정천우는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점액질의 입구로 쑥 들어가 버렸다.

    ***

    부드러운 점액질을 통과하면서 느낀 것은 부드럽다는 것과 숨을 쉴 수 없어 답답하다는 거였다.

    “후아!”

    숨이 막히는 건 아니었지만 답답한 순간이 지나자 정천우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동굴의 안쪽은 의외로 밝았다.

    그그극…….

    “응?”

    정천우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에 역천검의 손잡이를 잡아 갔다. 표면에 이끼가 잔뜩 낀 바위가 스멀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은 충분히 기괴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몸으로 변화한 바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뭐, 뭐지? 대체 뭐야?”

    정천우는 바위 괴물의 황당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위 괴물의 곁을 지나면서 잔뜩 긴장했지만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바위 괴물이 출입구를 지키는 가디언이라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인지,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도 놀람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괴상망측한 괴물들을 줄기차게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정천우를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을 대하듯이 길을 비켜 주며 극도의 존경을 담아 인사했다.

    마침내 동굴의 끝에 다다랐을 때, 정천우는 입을 쩍 벌렸다.

    “우와아!”

    절로 흘러나오는 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공동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생명체가 아니라면 황금의 비늘로 이루어진 엄청난 덩어리가 숨을 쉬듯 기복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구원자가 도착한 것인가!]

    “으윽! 혜광심어(慧光心語)?”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목을 통해서 발생하는 음성이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에서는 상대에게 말을 전달하는 최고의 수법을 혜광심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공을 사용해 소리를 전달하는 일반적인 전음과 달리, 혜광심어는 시전자의 뜻을 직접 뇌에 전달한다. 다른 사람은 절대 그것을 엿들을 수 없었기에 전음의 최고 단계라고들 말한다. 눈앞의 금덩어리(?)는 그런 수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머리가 둥둥 울리는 느낌이었기에 정천우의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정천우를 향해 번쩍이는 두 개의 눈이 나타났다. 눈이 어찌나 큰지, 눈동자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수박보다 컸다.

    얼굴은 또 어떠한가!

    황금색 비늘로 뒤덮인 골드 드래곤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만큼 엄청난 위압감을 드러냈다.

    [네놈은 당장 이리 와라!]

    골드 드래곤 키아벨리아스는 정천우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그는 시커먼 암흑의 공간에 뇌전의 기운을 뿌려 대고 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키아벨리아스의 목소리엔 피곤이 잔뜩 배어 있었다.

    골드 드래곤이 자신을 억압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은 정천우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가 키아벨리아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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