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88화 (188/200)
  • # 188

    Chapter 47. 암흑 산맥 (2)

    ***

    “기분 더럽네.”

    “주인님, 이별이라는 게 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정천우가 구겨진 인상을 풀지 못하고 툴툴대자 샤칼이 위로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샤칼이 말한 것처럼 편하게 마음먹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게다가 누가 암흑 산맥 아니라고 할까 봐 주변 분위기가 지나치게 칙칙했다. 울적한 기분이었던 정천우의 마음을 더욱 가라앉히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어지는 전투로 인하여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대륙으로 넘어오는 함선 안에서 마침내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귓가를 간질이던 그녀의 수줍은 고백…….

    애처로운 몸짓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던 그녀.

    이제 그 모든 기억을 놓고 가야 한다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야 한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하고 있을 게 분명한 여인이 중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큭! 그래, 맞아. 샤칼, 네 말이 맞다.”

    정천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이별이 가슴 아플 줄이야.

    일그러졌던 정천우의 얼굴에 분노가 스몄다. 숙였던 고개가 번쩍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검집에서 역천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휘둘렀다.

    카강!

    “웃!”

    정천우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단검을 쳐 내면서 침음을 흘렸다.

    가볍게 생각하고 쳐 냈는데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했다. 팔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만약 반응이 늦어서 역천검에 힘을 싣는 게 늦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물론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떠올렸다. 암흑 산맥은 키아벨리아스를 찾아가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마교 놈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정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구냐!”

    “웬 놈이냐!”

    뒤늦게 적의 공격을 눈치챈 샤칼과 헤이먼이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정천우를 노리고 단검을 던졌던 적은 기척을 숨기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쉬쉬쉭!

    대답하는 것 대신에 연달아서 세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다.

    어찌나 빠른 속도인지, 단검이 날아오고 난 뒤에야 파공음이 들려왔다.

    쩌저정!

    정천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빛살처럼 뿌려졌던 단검은 실드 마법에 막힌 것처럼 정천우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쾌속으로 휘두른 역천검이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단검을 걷어 낸 것이다.

    “이익!”

    정천우가 귀신같이 자신이 숨은 곳을 찾아내자 나무 위에 몸을 숨겼던 흑색 약식 갑옷을 입은 사내가 단검을 들었다.

    파밧! 서걱!

    “엇! 무, 무슨!”

    정천우에게 단검을 날리려던 사내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해하는 사이, 정천우가 사내를 지나쳐 뒤쪽에 착지했다. 사내는 정천우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순간, 어깨가 화끈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팔이 움직이지 않아 신경이 쓰였던 참이었다. 정천우가 달려들면 몸을 날릴 준비를 하고서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를 살폈다.

    “어?”

    사내는 바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신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깔끔하게 사라졌다. 피조차 흐르지 않아 비현실적이었다.

    푸아악!

    그런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뒤늦게 어깨의 절단면에서 피 분수가 피어났다.

    “끄어억!”

    밀려드는 고통에 사내는 나무에서 떨어졌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천우는 바닥을 뒹구는 사내를 향해 손가락을 편 채로 내공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피가 철철 흐르던 사내의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멈췄다. 지혈을 위해서 혈도를 봉쇄한 것이다.

    “크윽! 으으윽! 네놈! 네놈이!”

    빡!

    사내가 분노 어린 고함을 내뱉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정천우의 주먹이었다.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말고 묻는 것에만 대답해. 성실하게 대답해 주면 고통 없이 보내 주겠다.”

    “누, 누가 고통 따위에 굴복한다고…… 끄아악!”

    사내는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발끈했지만 정천우가 어깨의 절단면을 발로 툭툭 건드리자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려울걸? 다쳐 본 기억이 오래되어 생각과는 다르게 견디기 힘들 거야. 그렇지 않아?”

    정천우가 다시 사내의 어깨 절단면을 발로 툭툭 걷어차면서 빙그레 웃었다.

    “크아악! 그, 그만! 그만!”

    “말할래?”

    “절대로 말할 수…… 아악! 말하겠다! 크억! 제발, 제발 건드리지 마라!”

    사내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크게 소리쳤다.

    정천우의 말대로였다.

    머리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고통은 순식간에 정신을 황폐화시켰다.

    마스터의 경지에…… 아니, 최상급 베테랑의 경지에 오르면서부터 고통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최상급 베테랑의 경지에 들어서면 찰나의 전투를 벌인다. 상대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의 하나다. 그러니 고통은 그때부터 남의 것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마교에 처음 귀의했을 때 겪었던 수많은 고통을 기억하고 있지만 고통을 접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생소하기만 했다.

    정천우가 비비적거리는 발을 떼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애원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정천우가 발을 거둬들였다.

    “너 여기서 뭐하냐?”

    “수, 수련 중이다!”

    “수련? 마교에서 하지, 왜 이렇게 음침한 곳에서 수련하는데?”

    “크윽…… 마교가 왜 암흑 산맥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암흑 산맥이 생각해 보니까 마교라는 이름과 어울려서? 음…… 아니면…… 젠장!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이 어디서 질문질이야? 죽고 싶어?”

    정천우는 고민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고는 다시 사내의 어깨 절단면을 걷어찼다.

    “크아악! 아악! 잘못했소! 그만하시오! 크아악!”

    사내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질질 끌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여간 마교 새끼들은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봐야 아는 놈들이라니까?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괴롭혀 주마. 그래서, 마교가 왜 암흑산맥에 자리 잡은 거야?”

    “크흑…… 아흑, 암흑 산맥 깊숙한 곳에 마기의 원천이 있소. 처음 서대륙에 넘어와서 그것을 발견한 기사들이 그때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마공을 익히기 시작했소.”

    “마기의 원천? 그건 또 뭐야?”

    “마공의 근간을 이루는 마계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을 말하는 거요. 죽일 거면 빨리 죽여 주시오.”

    사내는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살인마로 보이냐? 죽고 싶으면 죽어. 자살하든지 말든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니까. 이왕이면 똥밭에 뒹굴어도 사는 게 좋지 않겠어? 대답 잘해 줘서 살려 주는 거니까 고마워해.”

    “……지금 날 무시하는 거요? 이익!”

    사내는 수치스럽다는 듯 화를 내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혈해 두었던 어깨의 절단면에서 핏물이 흘러나오면서 몸이 커졌다.

    깜짝 놀란 정천우가 재빨리 역천검을 뽑아 사내의 심장을 찔렀다. 그제야 부풀어 오르던 사내의 몸이 줄어들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역혈대법을 사용하고 지랄이야! 살려 준 데도 염병이네!”

    “크흐흑…… 고맙소! 어차피 병신으로 살 바에는 죽는 게 낫지 않겠소? 쿨럭…… 조심하시오. 마교의 진정한 힘은 바로…… 컥…….”

    사내는 징그러운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정천우는 이해할 수 없는 사내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해? 가자. 아…… 기분 진짜 더럽네.”

    황당하기만 한 사내의 죽음은 그의 기분을 찜찜하게 해 주었다. 저럴 거면 애초부터 역혈대법을 사용하지, 왜 뒤늦게 미친 척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ЭДЁФБЙ…… 파이어 버스터(Fire Burster)!”

    “죽어랏!”

    샤칼과 헤이먼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선 달려드는 마교의 기사를 합공으로 겨우 해치웠다.

    암흑 산맥에서 수련 중인 마교의 기사들이 어찌나 강한지, 샤칼과 헤이먼이 힘을 합쳐야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암흑산맥의 숲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면서부터다.

    이제껏 상대했던 마교의 기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놈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암흑산맥의 초입에서 나타난 마교의 기사가 어째서 정천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는지를 말이다.

    이놈들은 이성이라는 게 없다. 오로지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특이하게도 같은 마교도는 알아보는 것인지 저들끼리 싸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힘을 합쳐 공격해 오기까지 한다.

    ‘지독한 놈들! 하지만 그래 봐야…….’

    샤칼이 바닥에 쓰러진 마교 기사의 시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정천우가 두 명의 마교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교의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사내가 싸우고 있었다.

    “캬아악!”

    “쿠롹!”

    콰광! 쾅!

    마교의 기사 두 명은 특이하게도 붉은색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무기로 정천우를 공격해 댔다.

    물론 정천우는 느긋해 보이는 움직임으로 두 마교 기사의 공격을 간단히 막았다. 싸우는 게 아니라 즐기는 느낌이었다.

    그 증거로 정천우는 반쯤 정신이 나가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마교 기사의 목을 장난처럼 베었다.

    “손맛은 좋은데 영…… 기분은 별로야. 이래서 마공은 안 된다니까? 제정신인 새끼들이 없어.”

    정천우는 목이 잘린 마교 기사의 시체를 발로 뒤집으면서 중얼거렸다.

    놈들의 복장은 심하게 낡아 있었다. 아니, 낡았다기보다는 갈아입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마기에 젖어 이성을 상실한 게 틀림없었다.

    초입에서 만난 사내의 성격이 어째서 그렇게 종잡을 수 없었나 했더니,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으로 이동할수록 마기가 짙어졌다. 그럴수록 나타나는 마교의 기사들도 상태가 점점 이상한 놈들만 나왔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마기가 짙어진 지금은 아예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 야수 수준의 마교 기사들이 나타났다. 분명한 것은 일반 기사들은 상대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거였다.

    정보에 의하면 이곳이 마교의 노기사들이 말년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장소라고 했다. 그러나 늙었다고 할 만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환골탈태를 거쳐 몸이 젊어졌다는 얘기다. 단지 흠이라면 정신줄은 쏙 빼놓은 채 몸만 젊어졌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여긴 일종의 무덤인 거로군.”

    “무덤?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샤칼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하기는 헤이먼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의 마공도 위험하지만 여기 놈들이 익힌 마공은 더 위험해. 마족 놈들을 직접 몸에 가둬 두기까지 하니까. 그런 놈들을 담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겠지.”

    “……버려지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이렇게나 마기가 풍부한 곳이니,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마족화된 놈들은 여기에만 머물겠지. 게다가 중요한 곳이라니 가디언 개념으로 봐도 될 테고.”

    정천우는 헤이먼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짙은 마기가 느껴진다. 정제되지 않은 지저분한 기운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가자!”

    정천우는 마족의 형태를 드러낸 마교 기사의 시체를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최종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니, 떨리면서도 가슴이 설레는 이중적인 감정이 그의 심장을 빨리 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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