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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87화 (187/200)
  • # 187

    Chapter 47. 암흑 산맥 (1)

    “그게 정말이오?”

    “뭐가?”

    “마교를 친다는 얘기 말이오!”

    세르비앙 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정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너 같은 놈한테 농담이나 하겠다고 몇 날 며칠을 배 타고 온 줄 알아?”

    “좋소! 대신에 무역권을 주시오.”

    “무역권?”

    “동대륙의 특산물은 이제 우리 테로사 왕국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요. 인근 왕국에서도 꾸준히 구매해 가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오. 대신에 마교를 공략할 때 우리 테로사 왕국도 돕겠소!”

    “무슨 꿍꿍이야?”

    정천우는 갑작스럽게 태도를 달리하는 세르비앙 왕자를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살기를 담은 협박이었지만 세르비앙 왕자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마교를 친다면 테로사 왕국은 엄청난 이득이 발생한다.

    그들이 자리 잡은 암흑 산맥에는 양질의 철광과 금광이 있다. 마교의 주 수입원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마교가 사라진다면 그것들은 모두 테로사 왕국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오히려 눈앞의 정천우를 돕는 게 최선이다. 동대륙의 공물이 사라지는 대신에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거대한 마교가 이제껏 부족함 없이 살림을 꾸릴 정도로 안정적인 광산들이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꿍꿍이 따위는 없소! 마교가 사라지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니 협조하려는 것이오.”

    “이 새끼 봐라? 50년이나 사기 친 놈들이 도와주겠다고 그러면 ‘네,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어? 확 모가지 따 버리기 전에 순순히 불어.”

    “순수한 호의…….”

    “죽고 싶냐?”

    정천우는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목을 겨눈 역천검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검 끝이 세르비앙 왕자의 목을 살짝 파고들면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긴장한 모습으로 대기하던 기사들이 롱소드의 손잡이를 쥐고서 움찔거렸다. 그러나 세르비앙 왕자는 손을 들어 기사들이 발작하는 것을 막았다.

    “후우…… 말하겠소. 마교가 보유한 광산 때문이오. 그것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우리 테로사 왕국은 내전 때문에 발생한 손해를 모두 복구하고, 국민들에게 적절한 보상까지 해 줄 수 있게 되오. 물론 동대륙을 귀찮게 할 일도 없소.”

    “자식이, 순순히 불었으면 좋았잖아. 그래, 그런 이유라면 믿어 주지. 우리는 하몬 자작령의 영지 성에 주둔해 있다. 지원군을 보내려면 거기로 보내고,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하게 될 거다.”

    “너무 빠르오!”

    세르비앙 왕자가 목에 칼이 닿아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함을 질렀다.

    암흑 산맥을 목표로 병력을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테로사 왕국의 위협 요소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반대도 없을 거다. 정천우의 엄청난 무력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반대할 간 큰 귀족도 없을 게 뻔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 병력을 보내야 간신히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시간이 빡빡하다. 그래서 정천우에게 부당함을 요구했지만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야 네 사정이고, 우리만으로 마교를 쳐도 상관없어. 우리 동대륙의 힘은 강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

    “원래 계획대로 사기꾼 놈들이나 좀 데리고 놀다가 돌아갈 생각이야. 대가는 치러야지? 마교 놈들이야 나중에라도 끝장낼 수 있거든.”

    한숨을 내쉬며 파병을 포기하려는 세르비앙 왕자의 말을 끊으면서 정천우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뭘 하자는 거요!”

    “우리만 희생당하면 곤란하지. 네놈들 때문에 고통받았는데, 네놈들 똥이나 치워 주고 끝날 줄 알았어?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손 안 대고 코 풀 생각부터 하고 지랄야! 이틀의 시간을 주지! 암흑 산맥 입구에 네놈들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으면 곧바로 왕궁을 향해 진격하겠다.”

    “무, 무리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네 사정이고. 마음대로 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속하지. 우리 동대륙의 전력은 이깟 왕국을 쓸어버리는 데 하루면 족하다.”

    정천우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세르비앙 왕자의 목에서 역천검을 내렸다.

    그러고는 역천검에 내공을 밀어 넣고 왕궁의 벽을 향해 휘둘렀다. 눈부신 빛이 역천검을 벗어나 맹렬한 회전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위이잉! 콰광!

    “우우우…….”

    노마법사를 비롯한 호위기사들이 전의를 잃고 두려움에 젖어들었다.

    세르비앙 왕자만 풀려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해서라도 치욕을 갚아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정천우가 보여 준 무력은 의욕을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온갖 마법으로 보호되는 데다가 재질 자체도 서대륙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돌을 깎아 만든 벽이 대번에 뚫렸다. 저런 위력의 플라잉 오러라면 7서클…… 아니, 8서클 마법사의 실드라고 하더라도 방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경고했다.”

    “……알겠소.”

    세르비앙 왕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천우와 그가 만든 왕성의 구멍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능력이면 수성전의 의미가 없다. 플라잉 오러를 펑펑 써 대는 인물이라니…….

    일반적인 마스터급 기사만 하더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하는데, 그보다 더 윗줄에 선 크로스 마스터다. 움직이는 공성 병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존재였다.

    더 무서운 건 예의도 없고 성질이 더럽다는 점이다.

    동대륙에서 넘어온 모든 병력을 다 해치운다고 할지라도 정천우가 살아남는다면 왕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인물이 가끔씩 나타나 플라잉 오러를 한두 번 날리고 사라지기만 해도 왕국이 통째로 마비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 세르비앙 왕자의 모습을 확인한 정천우가 빙긋 웃으면서 역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자식, 머리통 터질 거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정천우는 속으로 세르비앙 왕자를 비웃었다.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항상 남들보다 강한 힘을 앞세워 협박만 해 봤지, 이런 식으로 협박을 당하는 게 생소할 것이다.

    하지만 협박이라기엔 얻게 될 이득이 너무나 크다. 교활한 놈한테는 명분을 주면서 협박해야 효과가 높다는 걸 알기에 정천우가 조금 과하게 행동했다.

    이젠 퇴장해 줘야 할 때였다. 그래야 눈앞의 애송이 왕자가 살아남은 1왕자 측의 귀족들을 흡수하고 빠르게 대책 회의를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몬!”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돌아간다. 네놈은 나와 함께 갔다가 이곳에 돌아와 상황을 살펴라.”

    “알겠습니다.”

    하몬 자작은 정천우의 무시무시한 무력을 확인하고는 더욱 저자세로 나왔다.

    “앞장서!”

    정천우는 볼일 다 봤다는 듯 무심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강자의 여유.

    롱소드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는 세르비앙 왕자의 호위기사들을 태연한 걸음걸이로 지나쳤다.

    공격할까 말까 갈등하던 호위기사들과 노마법사는 결국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정천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위험한 기운이 그들의 본능을 억누른 탓이다.

    “후우…….”

    세르비앙 왕자는 정천우가 완전히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억눌렀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천우를 상대했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당연하다.

    이제껏 죽음이라는 걸 생각한 적이 없는 그였다. 생전 처음 경험해 본 생소한 협박에 그의 정신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젖어 한숨을 내쉰 그는 호위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치워라!”

    “예, 국왕 폐하!”

    차자장! 차앙!

    호위기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롱소드를 뽑았다.

    정천우의 앞에서는 차마 뽑지 못했던 그들의 롱소드가 살기를 뿜어내며 번뜩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국왕 폐하! 국왕 폐하!”

    귀족들은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세르비앙 왕자에게 애원하며 다가왔다.

    서걱! 스걱! 퍼걱!

    그러나 호위기사들의 무정한 칼질은 그들의 목을 차례로 베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려는 귀족도 있었으나, 단련된 육체를 지닌 호위기사를 뿌리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이리저리 눈치나 보는 귀족 따윈 필요 없다!”

    세르비앙 왕자는 냉랭한 눈빛으로 죽어 가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1왕자의 지랄맞은 성격은 충신들을 곁에 남겨 두지 않았다. 저들은 그저 아부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이다.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는 놈이 있었다면 곁에 두려고 했으나 그런 귀족은 단 한 놈도 없었다.

    “후우…… 형님은 세상 헛사셨소.”

    세르비앙 왕자가 씁쓸한 얼굴로 손아귀에 쥔 1왕자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

    암흑 산맥.

    오만 가지 무시무시한 소문이 떠도는 곳이다.

    특히 암흑 산맥에 자리 잡은 마교에 대한 소문은 더욱 살벌하다. 산 채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부터 암흑산맥의 광룡(狂龍)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소문까지 다양했다.

    예전에는 키아벨리아스라는 골드 드래곤의 레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그의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교가 자리를 틀고서 거대한 성을 구축할 때까지도 골드 드래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룡 키아벨리아스가 죽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마교의 무리가 마기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골드 드래곤인 키아벨리아스가 어둠에 물들어 마룡(魔龍)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다. 일반적인 기사와 궤를 달리하는 마교의 괴상한 수법들은 그런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괴기스럽게 몸이 변하면서 갑작스레 강해지는 마교 기사의 모습은 마룡의 추종자처럼 느껴졌다.

    동대륙의 패권을 꿈꾸던 마교였기에 서대륙에서는 이렇다 할 사고를 치지 않았다. 서대륙의 왕국도 굳이 마교를 건드리지 않았다. 싸워 봐야 피해만 잔뜩 생기리라는 걸 알기에 놔두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덤벼들지 않는 존재. 그게 서대륙에서의 마교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암흑 산맥의 초입에 어마어마한 대군이 몰려들었다.

    의혈맹의 2만 군대와 테로사 왕국의 1만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정천우의 협박에 세르비앙 왕자가 1만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물론 테로사 왕국군은 1왕자 측에서 싸우던 병력이 대부분이었다. 위험 요소라고 판단해 마교 소탕전에 투입시킨 것이다.

    어쨌든 의혈맹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사기를 치던 테로사 왕국의 전력이 나누어지는 것이기에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마교의 거대한 성을 1킬로미터 앞에 둔 의혈맹과 테로사 연합군 사이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시작될 것만 같았지만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에 의해서였다. 로브를 걸친 한 명의 여인과 용병을 닮은 복장의 기사 한 명이 그 주인공이었다.

    “흐흑…… 천우 경! 꼭 가야 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품에 안긴 제인에게 정천우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동대륙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이유를 실현할 때였다. 중원으로 돌아가 진미령을 구출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 온 세월이었다.

    ‘제길…….’

    정천우는 속으로 욕설을 터트렸다.

    품에 안겨 훌쩍이는 제인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마음마저 같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이래서 제인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은 흔들리고 말았다.

    하지만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을 놔둘 순 없다.

    지금쯤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구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허락한 여자였으니까.

    “미안합니다.”

    정천우는 품에 안긴 제인의 등을 토닥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아아…….”

    제인은 정천우의 말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말린다고 해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담은 목소리였다. 한 가닥 아쉬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제인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래요. 어디에 있든…… 제가, 제가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흑…….”

    “제인…….”

    정천우는 자신의 품을 벗어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별의 순간이 더 길어진다면 헤어지기 어렵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부디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할게요.”

    “천우 경, 그대를 알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역시 싸나이요! 하하하! 비만 도마뱀 따위, 팍팍 썰어 놓으십시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팽가의 기사들과 주소용 후작이 아쉬움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정천우는 괜스레 가슴이 찡했다. 그들 하나하나의 손을 잡을 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 나왔다. 제인과 얽힌 감정까지 남아 가슴이 울컥거렸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샤칼! 헤이먼!”

    “예, 주인님!”

    “예, 단장님!”

    “가자!”

    악수를 마친 정천우는 일부러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계속 함께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다.

    “충!”

    “충!”

    팽우룡이 세이버를 끼운 창을 들어 군례를 취하자 테로사 왕국의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군례를 올렸다.

    암흑 산맥 초입이 2만 명의 목소리에 부르르 몸살을 앓았다.

    그러자 정천우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울리고 지랄이야…….’

    자신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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