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86화 (18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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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6. 사기꾼 새끼들 (4)

    발 앞에 역천검을 박아 넣고서 정천우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

    대전에 모인 귀족들은 눈치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눈은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바로 근위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던 나이 든 귀족이었다. 귀족들은 차마 말은 못하고 눈으로 정천우에게 고자질을 하고 있었다.

    근위기사단을 한 번의 칼질로 썰어 버린 그였기에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외부에서 지금 상황을 알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쯔각!

    대충 귀족들의 뜻을 알아챈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아 들고는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역천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기 무섭게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목표는 식은땀을 흘리던 늙은 귀족이었다.

    서걱!

    “히이익!”

    “으어어…….”

    ‘역적을 처단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던 귀족의 몸뚱이가 세로로 갈라지면서 내장이 와르르 쏟아졌다.

    곁에 있던 다른 귀족들은 피를 흠뻑 뒤집어썼다. 인간의 목숨이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것을 본 귀족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이제껏 죽음을 눈앞에 둘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귀족들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역적? 좆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누가 역적이라는 거야? 내가 네놈들한테 돈을 받아먹었어, 음식을 한 끼 얻어먹었어? 어디서 개소리야? 어이! 어이!”

    정천우가 투덜거리다가 턱짓으로 하몬 자작을 가리켰다.

    “네? 네!”

    공포에 질려 뒤늦게 그가 자신을 부른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목숨도 허무하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타구니가 움찔거릴 지경이었다.

    “넌 뭐 하는 새끼야? 3왕자 부르라고 했어, 안 했어? 1왕자 뒈졌으니까 그냥 밀고 들어오라고 해!”

    “예? 예! 알겠습니다.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하몬 자작은 마치 국왕을 대하듯 정천우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씨발, 이거 완전히 사기꾼 새끼들이잖아? 이런 새끼들한테 50년이나 삥을 뜯겼다고?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바들바들 떨어 대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정천우가 혀를 끌끌 찼다.

    동대륙에서 들었던 서대륙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보만이 동대륙에 흘러다녔다는 걸 하몬 자작을 통해 들었다. 그래도 하몬 자작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서대륙의 귀족들을 만나 보니 하몬 자작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놈들에게 겁을 먹고 동대륙 사람들이 50년이나 공물을 바쳤다니 허탈할 뿐이었다.

    아무리 내전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지만 접견실 안에 늘어선 귀족들은 음식이나 축내는 식충이에 불과해 보였다.

    “쯧! 이런 놈들을 믿고 왕을 꿈꾼 1왕자 놈도 덜떨어진 새끼였겠지. 하긴, 뒈질 때까지 의자에만 앉아 있던 멍청한 자식이었으니 말 다 했군.”

    정천우는 입맛을 쩍 다시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기에는 지나치게 목소리가 컸다. 귀족들은 모욕적인 그의 발언에도 찍소리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힘이 워낙 두려워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귀족들을 갈구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하몬 자작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지?”

    “국왕 폐하께서 최대한 빨리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몬 자작은 3왕자라는 말 대신에 ‘국왕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제 계승권자는 3왕자가 유일했기에 호칭을 변경한 것이다.

    “나 오래 못 기다린다. 귀찮으면 여기 있는 자식들 다 썰어 버리고 그냥 가 버릴 거야. 마교 놈들이 도망치면 그것도 곤란하거든.”

    정천우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면서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무시무시한 소리에 귀족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게다가 자신들도 감히 자극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마교를 치겠다는 소릴 들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군대를 데려왔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귀족들은 울상이 되었다.

    “국왕 폐하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오오오, 국왕 폐하!”

    귀족들은 자신의 목숨이 3왕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제껏 3왕자와 싸웠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접견실로 달려와 왕좌에 앉은 무식하고 폭력적인 괴물과 협상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의 염원이 통했는지, 접견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금속성이 섞인 발걸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덜컥!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국왕 폐하!”

    접견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 청년을, 귀족들이 죽었던 부모를 만난 것처럼 반겼다.

    “흐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군.”

    자신을 반기는 1왕자파 귀족들의 모습에, 3왕자인 ‘세르비앙 헤밀턴 에볼라시안 드 테로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등 뒤로 실전형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도 함께 있었는데, 복장으로 보아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응? 이게 다 뭔가?”

    바닥에 흥건하게 피를 흘리면서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근위기사들의 시체를 발견한 세르비앙 왕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1왕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병력을 이끌고 오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함정일 수도 있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건…….”

    세르비앙 왕자는 바닥을 뒹구는 익숙한 머리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근위기사들의 토막 난 시체와 함께 뒹굴고 있어서 주목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듯 권태로운 표정을 드러낸 채 목이 잘려 있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1왕자의 머리통을 들어 올린 세르비앙 왕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던가!

    2왕자가 암습에 걸려 죽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2왕자의 편에 섰던 귀족들이 자신을 선택하는 바람에 이제껏 겨우겨우 팽팽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록 같은 부모를 둔 인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속이 후련했다. 아니, 속이 후련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암살 시도를 이겨 내고 치열한 전장을 경험해야만 했다. 언제 1왕자가 대대적인 공격을 해 올지 몰라, 병력을 모으고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었다.

    이제 그 모든 위협이 사라졌다.

    1왕자의 머리채를 감아쥔 세르비앙 왕자의 입술이 실룩였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마침내 살았다는 기쁨, 내전을 끝내고 자신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생각에 세르비앙 왕자는 광소를 터트렸다.

    2년이나 힘겹게 버텨 온 내전이 뜻하지 않게 끝나자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쯧! 형이 뒈졌는데 좋단다! 하여간 있는 놈들치고 제정신 박힌 새끼들이 없어.”

    불량기 가득한 목소리가 세르비앙 왕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접견실이 쩌렁쩌렁 흔들릴 정도로 광소를 터트리는데도 밉살스러운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세르비앙 왕자의 웃음이 뚝 끊겼다.

    “지금 그게 나한테 한 소린가?”

    웃음을 멈춘 그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정천우를 쏘아보았다.

    “그럼 내가 미친놈처럼 혼자 씨부렸겠어? 내가 너냐?”

    “형님을 치워 줬다고 해서 적당히 대우해 주려고 했더니, 명을 재촉하는군.”

    “지랄한다.”

    정천우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음을 던졌다.

    “무엄하다! ДЁФжБЙЦф…… 썬더 크로스(Thunder Cross)!”

    상황을 지켜보던 노마법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흰 수염을 부들거리더니 마법 지팡이를 정천우에게 겨누었다.

    꽈르르릉!

    싯누런 뇌전이 세 개나 만들어지면서 이리저리 얽힌 채로 정천우에게 쏟아졌다.

    접견실 내부가 뇌성벽력에 휩싸여 귀를 아프게 했다. 고서클의 마법이었기에 접견실 안에 사람들은 정천우가 시커멓게 타서 숯 덩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믿었다.

    “컥! 컥!”

    그러나 상황은 사람들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숯 덩어리가 되었어야 할 정천우는 어느새 세르비앙 왕자의 목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에 쥔 역천검을 겨누고 있었다. 역천검의 검신에는 하얀빛을 뿜어내며 룬어가 나타나 있었다.

    “와, 왕자님!”

    “당장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노마법사와 중년의 기사가 기겁한 얼굴로 정천우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좀 닥치지? 왕자놈의 목이 부러지는 꼴을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어차피 형이란 놈도 보냈는데, 이놈까지 사이좋게 보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

    “…….”

    노마법사와 중년 기사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뒤로 물러났다. 정천우를 자극했다가는 세르비앙 왕자가 위험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나 동대륙에서 넘어온 사람이야. 가뜩이나 기분 더러운데 성질 건드리지 마라. 다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얌전히 나와 대화한다면 살려 두겠지만, 까불면 다 썰어 버린다.”

    “대화…… 대화하겠……소!”

    몸을 붙들린 세르비앙 왕자는 힘겨운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제야 대화할 만한 눈깔이 되었군.”

    정천우가 목을 잡았던 왼손을 풀어 주었다.

    “이노옴!”

    파바밧!

    세르비앙의 목을 놓아주기 무섭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던 중년 기사가 번개처럼 정천우를 향해 롱소드를 뿌렸다.

    쩌걱!

    “그륵…… 그르륵…….”

    “자식들이, 내가 무서워서 네놈을 인질로 잡았다고 생각했나 보네? 그냥 귀찮은데 다 쓸어버리고 둘이 조용히 대화할까? 물론 불필요한 몸뚱이는 떼고, 네놈 대가리만 잘라서 얘기하는 걸로 하지.”

    정천우는 중년 기사의 목에 역천검을 박아 넣은 채 세르비앙 왕자의 눈을 쳐다보며 이를 드러냈다.

    중년 기사의 롱소드는 깨끗하게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정천우가 롱소드를 잘라 내는 것과 동시에 목을 공격한 것이다.

    “나, 나서지 마라! 내가 이자와 대화하겠다. 모두 물러나!”

    세르비앙 왕자는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부하들이 나섰다가는 또다시 무의미한 희생이 생긴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로 호위기사의 공격을 막아 내고 죽이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불필요한 자극을 주기보다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요?”

    세르비앙 왕자는 노마법사와 기사들을 물러서게 하고는 정천우와 눈을 맞추었다.

    정천우는 의외라는 얼굴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보통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 이성을 잃기 마련인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 노련한 협상가의 모습이었다.

    ‘이런 놈들이 또 얘기하긴 쉽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정천우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동대륙의 사람이다. 그러면 내가 왜 너와 얘기하려는 것인지 알겠지?”

    “무슨 뜻이오!”

    “이제 동대륙에 기어들어 오지 말란 얘기야. 동대륙은 강하다. 너희가 무기로 내세웠던 마법의 힘만으로는 어려울 거야.”

    “흥! 마법을 그렇게 얼렁뚱땅 배울 수 있을 것 같소?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요.”

    세르비앙 왕자는 상처받은 얼굴로 툭 내뱉었다.

    동대륙을 포기하라니, 아니 될 말이었다. 이제야 막 내전이 끝났다. 바닥난 국고를 채우려면 동대륙을 더 뜯어먹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이것만큼은 알아 둬라. 지금 네놈 목을 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막말로 여기 있는 놈들 다 쓸어버리면 당분간은 동대륙에 한눈팔 틈도 없겠지. 뭣하면 하몬 영지에 주둔 중인 병력을 끌고 와서 쓸어버리는 방법도 있고.”

    “…….”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정천우의 말과 분위기에 세르비앙 왕자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갔다.

    “그러니까 이 사기꾼 같은 새꺄, 삥 뜯을 생각 그만둬.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대신 마교는 우리가 해치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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