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85화 (1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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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6. 사기꾼 새끼들 (3)

    정천우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1왕자의 목을 따겠다고 하자, 하몬 자작은 물론 원정군 수뇌부들의 얼굴에도 황당한 기색이 떠올랐다.

    “처, 천우 경, 지금 어딜 가신다고요?”

    “1왕자 만나러 갑니다.”

    “정말…… 혼자 가실 생각이세요?”

    주소용 후작은 설마 하는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천우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피곤할 텐데, 저 혼자 갔다 오는 게 낫죠.”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가요?”

    정천우가 피식하고 싱겁게 미소 지었다.

    그가 도망가려고 마음먹는다면 아무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 20미터 높이의 성벽도 쉽게 넘는 데다가 아까는 바다를 맨몸으로 내달린 사람이다.

    그걸 생각하자 주소용 후작은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굳었던 표정을 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교를 공략하는 얘기는 천우 경이 돌아오면 하는 것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천우는 한차례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하고는 하몬 자작에게 턱짓을 했다.

    앞장서서 걸으라는 의미였다. 하몬 자작은 멍한 얼굴로 정천우와 주소용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교를 공략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하몬은 마교에 대한 얘기를 듣는 순간, 행동이 굳었다.

    서대륙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섣불리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는 세력이 있다.

    어둠의 권능을 등에 업은 존재.

    마계의 힘을 발휘하는 어긋난 집단.

    처음 마교의 집단이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나 주목해야 하는 세력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곳엔 언제나 피와 저주가 흘렀으니까.

    마교는 이제 서대륙에서 몰아낼 수 없을 정도로 힘과 세력이 커졌다. 자신이 소속된 테로사 왕국은 물론, 다른 강대국에서도 그들을 치겠다는 결정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이봐! 죽고 싶어?”

    “어? 어! 아, 네!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움직여야만 했다.

    왕실로 공간 이동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정천우가 자신의 머리를 떼어 갈 판이다.

    의문은 일단 접어야만 했다. 일단 목숨을 보전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몬 자작이 안내한 곳은 영주 집무실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옆방이었다.

    휑하니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마법진 하나만 덩그러니 새겨져 있었다.

    “이 안에 서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몬 자작은 마법진 안에 정천우와 같이 들어가서는 영주의 인장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진동음과 함께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시야가 밟아지는가 싶더니 주변의 모습이 일그러지면서 다른 풍경으로 바뀌었다. 분명 방 안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야외로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정천우와 하몬 자작을 맞이했다.

    “메카이션 드 하몬 자작을 뵙습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하신 모양이군요.”

    중년의 마법사는 하몬 자작에게 인사를 건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몬 자작이 호위만 데리고 홀로 나타났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중년 마법사는 속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1왕자 저하께 안내하겠습니다.”

    “그, 그럽시다.”

    하몬 자작은 중년 마법사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걸 승낙했다.

    정천우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1왕자였기에 하몬 자작으로서는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서 좋았다.

    중년 마법사는 하몬 자작을 1왕자에게 데리고 가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끈질기게 중립을 지키던 하몬 자작이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러 왔다는 건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마법진과 왕성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이동 마법진으로 습격을 가할 것을 염려한 때문에 이렇듯 멀리 떨어진 것이다. 왕성까지 오면서 본 기사들과 병사들만 수백 명이 넘을 정도로 방어에 철저했다.

    “아직 멀었나?”

    “금방입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지겨워서 그래.”

    “죄송합니다.”

    정천우가 음성의 고조 없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하몬 자작은 쩔쩔매면서 그를 달랬다.

    ‘뭐지?’

    중년 마법사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항구를 낀 하몬 자작령은 군사력이 강하진 않지만 동대륙을 관리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1왕자도 하몬 자작을 회유하려 애를 쓴 것이다.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해 줄 귀족이니까 말이다.

    전쟁에서는 병력과 뛰어난 무력을 지닌 기사들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먹이고 입힐 자금이 더 중요한 문제다.

    하몬 자작이 중요 인물로 떠오른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지금껏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음에도 1왕자와 3왕자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호위기사라고 생각되었던 젊은 놈한테 하몬 자작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중년 마법사는 정천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 혹시 성함을 알 수 있겠는지요.”

    “신경 꺼!”

    “……네, 실례했습니다.”

    중년 마법사는 정천우가 자신을 무시하면서 칼같이 말을 끊어 버리자 무안함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왕실에 속한 마법사다. 그런 자신을 이렇게 개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발작할 수도 없었다. 자작의 위치에 있는 데다가 중요한 역량을 가진 하몬 자작이 떠받들 정도의 귀족이라면 대단한 신분일 게 분명했다.

    중년 마법사는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면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면서 세 사람은 마침내 국왕의 접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유…… 대단해.”

    정천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접견실의 입구가 치장된 것을 보고서 느낀 감상이었다. 황금으로 치장된 장식과 웅장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접견실의 문은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정천우가 감탄하거나 말거나, 중년 마법사는 문을 지키고 선 기사에게 다가갔다.

    “메카이션 드 하몬 자작님을 모시고 왔으니 안에 기별을 넣어 주시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중년 마법사에게서 하몬 자작의 이름을 들은 기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접견실의 문을 열고 나타난 기사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왕자 저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근위기사가 창을 가슴 앞에 모으면서 군례를 올렸다.

    ‘남의 돈으로 아주 개지랄을 떨었네, 개지랄을 떨었어.’

    정천우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접견실 내부의 호화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번쩍이는 것들은 진짜 황금을 덧씌운 듯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주는 푹신함은 고급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동대륙을 쥐어짜서 부를 축적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어떤 놈은 공물을 마련하느라 똥구멍 찢어지게 고생했는데, 그렇게 마련한 공물로 이따위 사치나 부리다니…….

    정천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붉은 카펫은 계단까지 꼼꼼하게 깔려 있었고, 계단 위에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의자가 있었다. 권태로운 표정의 젊은 사내가 의자에 앉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정천우와 하몬 자작이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눈에 경멸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이 1왕자가 앉은 왕좌와 대략 10미터 거리에 다다를 즈음,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근위기사 2명이 앞을 막아섰다.

    “검을 맡기시오.”

    근위기사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1왕자의 안전을 위해서 무기를 압수하려는 것이었다.

    정천우는 근위기사를 무시하고 하몬 자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이 1왕자야?”

    “그렇습니다.”

    나직하게 묻는 정천우의 눈빛을 받으며 하몬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근위기사의 눈썹이 뒤늦게 꿈틀거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반응이 늦게 온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소?”

    “시끄럽게 쨍알거리지 말고 꺼져.”

    정천우는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면서 주먹을 말아 쥐고 근위기사의 가슴을 내질렀다.

    쾅!

    “크악!”

    갑옷이 휴지처럼 구겨지면서 근위기사가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정천우가 역천검을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이 초식 벽력섬광(霹靂閃光)의 수법으로 뽑았다.

    쾌검식과 발검식이 혼용되어 뽑혀 나온 역천검에서 플라잉 오러가 생성되어 1왕자를 향해 빛과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서걱!

    턱을 괸 채로 앉아 있던 1왕자의 손과 목이 플라잉 오러에 의해 단박에 썰렸다.

    텅, 터덩텅, 터덩!

    1왕자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계단을 타고 퉁기더니 정천우의 앞에까지 굴러 왔다.

    “우우우우…….”

    갑작스러운 1왕자의 죽음에 접견실에 붉은 카펫을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섰던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머리로는 ‘비상!’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감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켜 놓았다.

    “저, 저기…….”

    하몬 자작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더듬었다. 설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1왕자의 목부터 날려 버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강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대책 없이 일부터 저지를 줄은…….

    “됐어. 3왕자더러 왕궁에 들어오라고 해.”

    정천우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 일에 끼어든 것도 골치 아픈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마교와 한판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일일이 하몬 자작의 얘기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이이! 죽인…….”

    츠각!

    정천우의 앞에서 멍한 얼굴로 바닥을 뒹구는 1왕자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근위기사가 롱소드를 뽑으려던 자세로 머리가 잘렸다.

    정천우는 피가 튀기 전에 근위기사의 복부를 발로 밀어냈다. 검붉은 피가 카펫을 적시면서 더운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렸다.

    “저, 저! 근위기사는 뭣들 하느냐! 적도를 처단하라!”

    비현실적인 상황에 허우적거리던 귀족 중의 하나가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근위기사들도 정신을 차리고서 롱소드를 뽑았다. 최정예 기사들로 이루어진 근위기사들이 정천우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역적을 처단하라!”

    근위기사단장인 듯한 사내가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며 불같이 고함을 질렀다.

    1왕자의 최측근 인물답게 대단한 실력자였다.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달려드는 그의 얼굴은 야차(夜叉)의 모습이었다. 그런 근위기사단장을 따라 나머지 근위기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그때, 정천우가 다시 한 번 수평으로 역천검을 휘둘렀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오러 블레이드가 검 끝에 매달렸다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맹렬한 회전을 일으키면서 전방을 향해 폭사되었다.

    위이이잉! 파가가각!

    파괴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을 담은 플라잉 오러가 근위기사단을 통째로 베어 내고도 모자라 목을 잃은 1왕자의 몸뚱이까지 반으로 갈랐다.

    “우우우우…….”

    정천우의 믿을 수 없는 신위에 놀란 귀족들이 두려움에 젖어 신음을 흘렸다.

    광포한 기세를 흘리면서 달려들던 근위기사단장과 근위기사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노에 휩싸였던 접견실 내부가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근위기사들의 토막 난 시체를 지나쳐 간 정천우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의자에 앉아 있는 1왕자의 하반신을 옆으로 휙 던졌다.

    피가 흥건한 의자에 정천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귀족들은 그의 횡포에도 아무 말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평생을 입으로만 먹고살아 온 이들이었기에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는 그에게 감히 뭐라 할 만한 배짱이 생겨나지 않았다.

    정천우는 느긋한 얼굴로 겁에 질린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아까 어떤 새끼가 나한테 역적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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