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84화 (184/200)
  • # 184

    Chapter 46. 사기꾼 새끼들 (2)

    “잠시 대기!”

    “대기!”

    주소용 후작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그녀의 명령을 복창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마법진을 통해 나타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긴장을 풀게 한 이유였다.

    항복을 외치는 사람은 뚱뚱한 중년 남자였다.

    “그대는 누구죠?”

    주소용 후작은 롱소드를 손에 쥔 채로 뚱뚱한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항복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해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그대는 누구죠?”

    “저는 메카이션 드 하몬 자작입니다. 이 항구를 포함한 하몬 영지의 영주입니다.”

    “항복하겠다는 건가요?”

    주소용 후작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 항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지의 영주가 직접 항복해 왔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겨우 한 번의 싸움 만에 항복이라는 것도 의외였다.

    놀라운 것은 하몬 영지의 병사들이 도망치는 게 아직도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것은 애초에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항복할 걸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른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곰처럼 생긴 것과 다르게 계산이 빠른 인물이라는 의미다.

    과연 주소용 후작의 생각이 맞았는지, 하몬 자작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항복을 받아만 주신다면 귀하에게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어째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 주겠어요.”

    주소용 후작은 하몬 자작을 내려다보면서 슬쩍 마나를 끌어올렸다.

    “으으으……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몬 자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대답했다.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마나의 기운에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런 능력이라니…… 아아…… 동대륙 기사들의 수준이 이런 정도에 오를 동안 우리는 뭘 했다는 말인가!’

    하몬 자작은 속으로 통탄했다.

    주소용 후작이 내비친 기운은 서대륙의 강자 100인에 들 정도의 무력이었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뛰어난 무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동대륙에 퍼진 소문과 다르게, 서대륙에는 50명의 마스터급 기사들이 있다. 그나마도 20명에 이르는 마스터급 기사들은 마교 소속이다.

    ‘마스터가 온다고 해도 어렵겠어…….’

    하몬 자작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눈앞에 선 주소용 후작의 롱소드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그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

    서대륙의 마스터급 기사들은 실전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하다. 그에 반해 주소용 후작은 실전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 같은 실력자라 하더라도 실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하몬 자작이 판단했을 때, 자기가 아는 어떤 마스터급 기사도 눈앞의 여기사를 쉽게 어쩌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눈알을 굴리면서 이것저것 계산하는 사이, 주소용 후작은 롱소드를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 내고는 검집에 꽂았다.

    “믿겠어요.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서대륙에 대한 정보예요. 그리고 군량과 보급 물자를 지원받길 원해요. 거절하신다면 협상은 없었던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하몬 자작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 모조리 죽이고 알아서 챙기겠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말속에 숨은 살기(殺氣)가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할 정도였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바보다.

    “좋아요. 다행히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군요. 성은 어디에 있죠?”

    “멀지 않습니다. 도보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엉뚱한 짓은 하지 않았겠죠? 뭐, 그런다고 해도 그다지 상관없긴 하지만요.”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가 보면 아시겠지만, 영지 성에 백기를 걸어 두라 지시했습니다.”

    하몬 자작은 손사래를 치며 주소용 후작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소용 후작의 말에 하몬 자작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우룡 경이 하몬 경과 함께 척후를 맡아 주셔야겠어요. 성애 단장, 그대에게 기사 50명과 병력 2천을 내줄 테니 배를 지키도록 하세요. 일이 생기면 마법사를 통해 연락하겠어요.”

    “충! 사령관님의 명령을 시행하겠습니다.”

    “충! 목숨을 바쳐 배를 지키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은 즉각 병력을 추려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일사불란한 모습에 하몬 자작이 혀를 내둘렀다.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체계가 아니었다. 오랜 평화에 젖어 해이해진 서대륙의 군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들이다.

    항복하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하는 하몬 자작이었다.

    “그대는 우룡 경이 준비를 마치는 대로 함께 출발하시오. 우리는 뒤를 따라가는 것으로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성심껏 대접할 테니 의심을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주소용에게 하몬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항복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늘한 표정의 주소용 후작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무려 50년이나 공물을 바쳐야만 했던 서대륙이다. 앞으로는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말고삐를 잡은 그녀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는! 다시는 동대륙에 공물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겠어.’

    주소용 후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뭐 이런 개새끼들이 다 있지?”

    정천우는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하몬 자작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몬 자작의 집무실에 모인 원정군의 수뇌부들은 그의 얘기를 들을수록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나마 정천우가 욕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동대륙 출신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기꾼 자식들! 이런 놈들한테 그동안 우리가 벌벌 떨었던 거야?”

    팽만리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 우악스러운 모습에 하몬 자작의 목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진정들 하세요. 그리고 하몬 자작!”

    “예, 사령관 각하! 말씀하십시오.”

    “그러니까 동대륙에 공물을 요청한 건 서대륙 전체가 아니라 테로사 왕국이었다는 거죠? 사천당가의 항구나 곤륜파의 항구를 서대륙 상인들로 모두 채워 놓았다는 얘기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몬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원정군의 사람들은 이젠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하몬 자작의 충격적인 얘기 때문이다.

    서대륙 전체가 아닌 테로사 왕국이란 곳에서 동대륙에 공물을 요구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것은 그 덕분에 테로사 왕국이라는 데가 서대륙의 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왕국들은 해양 몬스터와 암초 때문에 인근 해안을 벗어날 수 없어 동대륙까지 넘어올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테로사 왕국만이 유일하게 동대륙을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바다를 끼고 있었고, 선박 기술이 발달해 공물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대륙이 무서운 곳이라고 소문을 내서 감히 반란을 꿈꿀 수 없도록 한 것도 테로사 왕국이었다.

    한마디로, 동대륙에 패악을 부린 원흉은 서대륙 전체가 아니라 테로사 왕국의 단독 행위였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동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왜 그런 거지? 원래 이렇게 약했나?”

    정천우는 앞뒤가 맞지 않는 현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하몬 자작을 쳐다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대륙의 기사들에게 두려움을 주던 존재가 너무나 약해졌다. 지난번 사천당가의 항구에 방문했던 군대도 그렇고, 오늘 아침에 싸웠던 군대도 그렇고…… 이제껏 들어 왔던 악명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무력이었다.

    “그게…….”

    “물어볼 놈은 많아.”

    정천우는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린 역천검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죽여 버리고 다른 놈한테 물어보겠다는 의미다.

    하몬 자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협상 따윈 전혀 통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어째서 사령관인 주소용 후작보다 이런 깡패 같은 놈이 나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내전?”

    “네! 국왕 폐하께서 갑작스레 병을 앓는 바람에 사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우린 어떤 왕자 새끼하고 얘기해야 하는 거냐?”

    “어떤 얘기를 말씀하시는지…….”

    하몬 자작은 상대가 뭘 얘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리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동대륙에 넘어와서 또 개수작 부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을 놈! 어떤 왕자 새끼랑 얘기하면 되는 거야?”

    “그게…….”

    하몬 자작은 뭐라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내전 중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어쩌면 반역에 해당하는 얘기일지도 몰랐으니까.

    “잔머리 굴리지 마라. 넌 누구 편이야? 신중하게 선택해. 왕국 박살 내고 싶지 않으면.”

    정천우가 은은하게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으윽! 무슨 놈의 눈빛이…….’

    하몬 자작은 사타구니가 저릿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살기 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자신 역시 검을 수련한 검사다. 비록 지금은 배가 툭 튀어나오고 나이가 들었지만 마나를 깨우쳤다.

    어지간한 살기쯤에 노출된다고 해서 방광이 제멋대로 움직이진 않는다. 아까 주소용 후작의 살기를 받아 낼 때도 감탄은 했지만 지금처럼 오금이 저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정천우가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의미였다. 하몬 자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비다.

    이제껏 내전이 일어났어도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정한다고 해도 딱히 변방의 영주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강력한 전력이 생겨나는 셈이다.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천우의 얼굴에 점점 냉기가 도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3왕자! 저는 3왕자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래? 그럼 1왕자 놈과 2왕자 놈의 목을 따면 끝인가?”

    정천우는 입맛을 다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주변에 기사들이 많다고 해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다. 마법사 따위는 역천검으로 해결될 테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 아닙니다!”

    “뭐가?”

    “2왕자는 내전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몬 자작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원래부터 지지하던 왕자는 2왕자였다. 그러나 1왕자에게 죽임을 당해, 지금은 1왕자와 3왕자의 대립 구도로 흘러가는 중이다.

    “그렇단 말이지? 네놈은 3왕자가 구슬리기 편한 건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변방에 썩고 있지만, 왕실에 대한 충성마저 썩은 건 아닙니다.”

    기회주의자처럼 자신을 납작 낮추었던 하몬이 눈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3왕자를 왕의 자리에 앉혀 어쩌자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정천우가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울컥 화가 치민 것이다.

    “그럼?”

    “1왕자가 정상이었다면 어째서 다른 왕자가 내전을 일으켰을 것이며, 어째서 2년이 지난 아직도 두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겠습니까!”

    “1왕자가 개자식이다?”

    “……부정하진 못하겠습니다.”

    하몬 자작은 정천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름 신념이 깃든 눈빛에 정천우가 만족한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깔아! 확 눈깔을 후벼 버리기 전에.”

    “헉! 네, 네!”

    하몬 자작은 급하게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1왕자 놈은 어디 있는데?”

    “왕실에 있습니다.”

    “한 방에 갈 수 있는 이동 마법진 있어?”

    “있습니다.”

    “그럼 앞장서!”

    “네?”

    하몬 자작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원정군 수뇌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얘기가 뚝딱뚝딱 진행되는 것 같더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흘러간다는 느낌만 받았다.

    “귓구멍에 소시지를 박았냐? 앞장서라고!”

    “그게, 어딜 말씀하시는 건지…….”

    하몬 자작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이 자식이 갑자기 멍청한 척하네? 왕실로 가자고.”

    “와, 왕실엔 무슨 일로…….”

    “1왕자 놈 모가지 따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