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Chapter 45. 똥파리들 (4)
갑판에 올라설 때까지 제인의 눈은 정천우를 놓치지 않았다. 괜히 주눅이 드는 기분에 정천우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별일 없었죠?”
“…….”
제인은 말없이 정천우를 째려보았다.
그를 만나면 한바탕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름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정천우에게 서운한 마음뿐이었다. 찾아갈 때마다 방문이 잠겨 있었기에 몇 번이나 한숨만 내쉬고 돌아오길 반복했었다. 그동안 자신을 한 번도 찾지 않은 그가 야속하기만 한 그녀였다.
눈이 뜨거워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두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
정천우는 그녀의 눈물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무심해도 너무나 무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은 안다. 자신의 마음 역시 그녀에게 어느 정도는 기울어 있다.
자신은 서대륙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갈 몸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었던 것인데,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충동적이 되어 버렸다. 매번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랬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할 때면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웠으니까.
“저…….”
“됐어요. 천우 경에게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겠죠.”
정천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제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을 걸어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선실로 내려가 버렸다.
“주인님, 미움받으신 것 같습니다.”
“여자는 세상에 널렸습니다.”
“……그게 위로냐?”
정천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놈들한테 위로를 기대한 게 잘못이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원래 여자라는 게…….”
“됐어! 닥치고 각자 쉬어!”
정천우는 뭔가 말하려는 샤칼을 한차례 쏘아보고는 선실로 내려갔다.
샤칼과 헤이먼은 정천우의 뒷모습을 뚱한 얼굴로 보면서 툴툴거렸다.
“하여간 여자라는 것들은 인간이나 엘프나 남자를 피곤하게 한다니까.”
“여자는 있냐?”
“아니.”
“……잘났다.”
“넌 있냐?”
“있겠냐?”
“지랄!”
똑같은 놈들이었다.
***
문에 부착된 이름을 확인하고 선실 안으로 들어온 정천우는 마법 배낭과 역천검을 한쪽에 내려놓고 작은 침대에 몸을 누였다.
“골치 아프네.”
정천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던 제인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제인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깨닫고 혼원벽력신공이나 수련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내공을 수련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았다.
‘대자연의 기운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이 있어, 사람의 육신에 강건한 힘을 깃들게 할지라. 이 대자연의 기운을 혼원(混元)이라 하고…….’
정천우는 혼원벽력신공의 구결을 떠올리면서 호흡을 통해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들였다.
운기삼매경에 완전히 빠져들지는 않았다. 운기할 때 누군가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위험하니까 말이다. 동대륙 사람들은 자신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자칫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하는 그의 선실엔 대자연의 기운이 가득 찼다. 풍부한 기운을 바탕으로 호흡을 통해 신선한 기운을 흡수하고 탁한 기운을 내뿜는다.
이제 운공을 통해 내공을 단련한다는 의미는 없지만 심신(心身)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 컸다.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떠올라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
대자연의 기운을 흡수하던 정천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운기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빠져들진 않았기에 주변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서둘러 내공을 갈무리하고 문을 바라보았다.
똑, 똑, 똑!
“누구시죠?”
“……저예요.”
정천우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제인 마법사님…… 아까는…….”
“듣고 싶지 않아요.”
제인은 힘없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정천우는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눌려 뒷걸음질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달칵!
“ЁФжБЙ…… 락(Lock)! ФБЖЙПб…… 사일런트(Silent)!”
안으로 들어온 제인은 자물쇠를 걸고서도 모자라 마법을 사용해 문이 열리지 않게 하고,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어, 어쩌지?’
정천우는 당황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할 정도로 자신에게 따질 게 많다는 의미였으니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내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한 소리 들을 걸 각오하기도 했으니까.
“천우 경, 어쩌면 그럴 수가 있죠? 제가 그렇게 싫은가요?”
“시, 싫다뇨!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럼 어째서 저한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제인은 작정하고 온 것인지, 정천우에게 그동안 서러웠던 얘기를 꺼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서 따지는 그녀가 정천우는 더욱 두려워졌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아까처럼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 그게…… 어떻게 된…… 어? 제,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제인의 옷자락이 바닥에 스르르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떡해야…… 어떡해야 제 마음을 전할까 하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흐흑!”
제인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정천우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알몸의 제인이 품에 안기면서 전하는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여체의 감각에 정천우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두 팔은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감았다.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는 제인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정천우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여자 경험이야 있지만 거래에 의한 게 아닌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당황하는 것이다.
“너무해! 너무한다고요. 나한테 왜 그래요? 흑…… 내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인을 남겨 두고 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라, 그래서…….”
“그게 뭐가 중요해요! 전, 저는요! 제가 천우 경이 떠날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마음이 시키는 걸 어떡해요. 떠나더라도 이건 아니잖아요. 천우 경한테 전 아무것도 아닌 거였어요? 그래요?”
정천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노려보는 제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제 눈 똑바로 보고 말씀하세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정천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인이 울음을 참느라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천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입술을 파고드는 따스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가 이내 스르르 감았다.
***
“으으음…….”
정천우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새근거리면서 잠든 제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굉장했어.’
정천우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며 더욱 짙은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며칠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와 같은 선실을 사용하게 된 후로 날짜 관념 같은 건 잊었다. 둘이 함께 있으면 뜨거운 심장이 두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았으니까.
사람은 확실히 겉으로만 봐서는 모른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지적이고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제인에게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열정(?)이 숨어 있음을 알게 해 준 지난 며칠이었다.
제인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며 미소 짓던 그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 자신은 이제 떠나갈 사람인데, 사고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어쩌려고 나 같은 놈한테…….’
정천우가 애틋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음일까?
제인이 가물거리면서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어요?”
“아름다워요.”
정천우는 그녀의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하면서 제인의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치…… 순 엉터리야.”
뎅, 뎅, 뎅, 뎅!
정천우가 미소 지으면서 그녀에게 입맞춤하려는데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병사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지다! 서대륙이다아!”
병사의 목소리에는 육지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이제 싸워야 할 때가 왔다는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막 분위기를 잡아 가려던 정천우는 김샌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나가야 할 것 같죠?”
“……네.”
정천우가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몸을 일으키자 제인은 수줍은 얼굴로 대답하며 이불로 몸을 가렸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온 것은 병사의 외침을 듣고 나서 대략 30분쯤 뒤였다.
밖으로 나와 보니, 벌써 많은 사람이 갑판에 나와 있었다. 망루에서 병사가 망원경을 한쪽 눈에 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천우는 병사의 망원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대략 3킬로미터 정도를 남겨 둔 상황이었기에 그냥 보아서는 육지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항구를 뒤덮은 병사들이었다. 원정군의 배를 발견하고 병력을 집결하는 것 같았다.
정천우는 갑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망루까지 한 번의 도약으로 올라가 사뿐하게 착지했다.
“망원경 좀 빌립시다.”
“여, 여기 있습니다.”
망루 위에서 서대륙의 육지를 관찰하던 병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망원경을 내밀었다.
3단으로 이루어진 망원경을 조작해 서대륙의 항구를 살폈다.
항구는 난리였다.
병사들이 꾸역꾸역 집결하고 있었고, 기사로 보이는 병력도 눈에 띄었다. 병사들은 저마다 크로스보우를 들고 있었으며, 트레뷔셰와 발리스타를 끌고 오는 모습도 보였다.
바다 위에서 중대형 원거리 무기에 당한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트레뷔셰가 조립되는 게 심상치 않았다. 못해도 대여섯 개는 되는 듯했다. 이대로 항구에 다가갔다가는 돌덩이에 맞아 배가 침몰할지도 몰랐다.
“잘 썼습니다!”
“충!”
정천우가 망원경을 돌려주자 병사가 군례를 올렸다. 그러나 정천우의 몸은 벌써 망루를 뛰어내린 다음이었다.
갑판에 착지하기가 무섭게 샤칼부터 찾았다.
“샤칼! 샤칼!”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부맹주님께 통신을 연결해 줘!”
정천우가 명령을 내리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샤칼이 수정구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원정대장입니다. 누구죠?]
“정천우입니다.”
[아! 천우 경, 무슨 일인가요?]
“항구에 적들이 득실거립니다. 원거리 공성 무기를 조립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마법사와 마스터급 기사들로 항구를 한바탕 휘저어 놓아야 원정군이 안전하게 항구에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천우는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하며 위험을 알렸다.
[좋아요. 그럼 마스터급 기사들을 이끌고 천우 경의 배로 넘어가겠어요. 공격할 방법은 있으신 거죠?]
“물론입니다.”
[알았어요. 조금 있다가 뵈어요.]
주소용 후작은 급하게 통신을 끊었다.
정천우는 수정구에서 주소용 후작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서대륙의 항구 쪽을 바라보았다.
“똥파리 같은 새끼들, 더럽게 알짱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