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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81화 (18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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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5. 똥파리들 (3)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세상에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아군은 없습니다. 서대륙이 우리에게 공물을 요구하는 이상, 놈들은 적(敵)입니다. 쓸어버립시다! 어차피 마교 놈들의 뿌리를 뽑으려면 서대륙으로 넘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

    “아…….”

    팽선웅 백작이 탄식을 터트렸다.

    승리에 취해서 잊고 있었다. 마교와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저 동대륙을 장악하기 위해서 파견된 병력을 격파했을 뿐이다.

    대략적인 파악은 끝났다.

    이제껏 마교의 기사들을 해치우면서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마교 전력의 1/3 이상 해치운 상태다. 동대륙에 파견된 마교 전력을 모두 해치웠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에 가까운 마교의 전력을 궤멸시켰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순히 숫자에 비춰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마교의 숨은 전력이 걱정되는 팽선웅 백작이었다.

    “맹…… 천우 경, 마교에는 아직 강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의혈맹 기사들로는 손색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서대륙으로 넘어가자는 게 아닙니다. 저 역시 서대륙의 키아벨리아스라는 드래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교 놈들의 위치가 키아벨리아스의 레어 근처라고 하니 혼자는 무리입니다. 이번 기회에 마교는 물론, 서대륙에도 우리의 힘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마교가 서대륙에 자리 잡은 이상, 서대륙과 동대륙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팽선웅 백작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 고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대륙의 함선이 몰려오는 중이다.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한다.

    싸울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대륙에 공물을 바칠 것인지 말이다.

    “으음…… 천우 경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팽선웅 백작은 홀로 결정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정천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맹주님, 의혈맹의 맹주는 맹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굳이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싸우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겨우 동대륙을 평정했는데, 기분 더럽지 않습니까? 대륙을 통일하자마자 공물을 바쳐라? 전 짜증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싸우고 싶습니다!”

    주소용 후작이 동조하고 나섰고, 급보를 알린 팽만리가 전의를 불태우면서 팽선웅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수뇌부 회의에 참석한 공지대사 남작을 비롯한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다. 팽선웅 백작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리 경! 그대는 즉시 운용 가능한 전군을 소집하고 특임조를 구성하라. 특임조의 임무는 서대륙 놈들의 함선과 수송선을 탈취하는 것이다.”

    “옛, 맹주님! 즉시 기사단장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충!”

    팽만리가 부복한 자세에서 군례를 올리고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어갔다. 서대륙에 복수한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오른 것인지 그의 발걸음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팽선웅 백작이 정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천우 경, 그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한 방에 날려 보내려면 마법이 최고잖습니까? 샤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맞습니다, 주인님!”

    샤칼은 자신을 부르길 기다린 사람처럼 곧바로 일어나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깨달음을 얻어 마법적인 능력이 높아진 참이었다. 새로운 마법의 위력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기에 오히려 기대하는 얼굴이 되었다.

    “기사단을 모두 소집해 놈들을 맞이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놈들이 항구에 내리면 샤칼과 마법병대가 마법을 사용하고, 그 뒤를 쿼렐로 훑은 다음에 기사들이 확인 사살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 찬성이에요.”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의 무난한 작전에 동조했다.

    사실 그 이상 작전이고 뭐고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항해를 했으니 공물을 받으러 온 서대륙의 병력은 육지를 그리워할 게 뻔했다.

    주 전력이 빠져나간 배는 기사와 병사들의 기습을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마교의 수송선도 그랬으니까.

    “이번 기회에 동대륙의 저력을 보여 줍시다!”

    “예, 맹주님!”

    수뇌부 사람들은 팽선웅 백작이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아직은 정천우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결정을 내린 뒤에 보여 주는 저돌적인 모습은 맹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같이 싸워서 함께 이룩한 동대륙의 통일이다. 당분간은 철권정치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의혈맹에 완전히 녹아들지 않은 정도련의 세력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폭력적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팽선웅 백작처럼 인간미까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팽선웅 백작이 앞장서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천우를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두 시간 뒤, 의혈맹은 서대륙의 함선을 손쉽게 탈취하고 축하연을 열었다.

    ***

    서대륙의 사신단……을 가장한 군대의 침입을 해결한 지 보름이 지났다.

    보름 전의 전투 덕분에 함선 다섯 척과 수송선 스무 척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혈맹에 고무적인 일이었다. 마교를 치러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노획한 배들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본래 사천당가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하던 함선은 스무 척이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다섯 척만 차출하기로 했다. 서대륙의 함선과는 크기가 달라 한 척에 50명 정도의 전투 인원이 탑승하는 게 고작이었다.

    수송선 역시 연안에서 운용되던 것이 대부분이라 원거리 항해에 쓸 만한 수송선은 스무 척이 전부였다.

    배들을 정비하는 사이, 의혈맹은 기사 전력을 더욱 강화하고 정예병을 추렸다. 원정에 나서야 하기에 그저 머릿수만 채워서는 의미가 없었다.

    마교를 공략하고 이제껏 공물을 요구하던 서대륙에 따끔한 일침을 가해야 할 때였다. 어쩌면 서대륙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기에 준비는 철저해야만 했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되돌아올 테지만 말이다.

    정천우 역시 서대륙으로 넘어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전쟁을 치르면서 능력 상승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갑작스럽게 높아진 능력을 점검할 틈도 없이 싸워 대기만 했으니 힘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우…….”

    숨을 길게 내뱉은 정천우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지난 보름 동안 명상을 하고 실제 몸을 움직이면서 그간 쌓인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공이 늘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전의 내공이 이 갑자를 넘어섰고, 생사현관이 뚫린 그의 육체는 완벽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내공이 더 늘어난다고 해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정천우의 육신과 조화를 이루는 만큼의 내공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제깟 놈이 그래 봐야 도마뱀이지! 만나기만 해 봐라! 묵사발을 내주겠어!”

    정천우는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웃었다.

    키아벨리아스.

    이제 그놈을 만나러 갈 때가 되었다.

    서대륙에 가기 위해서 동대륙을 평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맘 편히 갈 수 있게 되었다.

    드래곤에 관련한 허황된 얘기는 많이 들었다. 몸뚱이만 100미터가 넘는다는 황당한 얘기에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마법을 사용한다는 얘기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비늘에 창칼이 안 박혀? 웃기는 소리지.”

    정천우가 피식 웃었다.

    드래곤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책에 묘사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 날붙이 무기가 박히지 않는다니 우스웠다.

    자신의 경지는 중원식으로 따지면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상태다. 도검불침이라는 생강시라도 검강으로 회를 칠 수 있을 정도다.

    깨달음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든 상황이라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고, 대자연의 기운을 금세 내공으로 전환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천우의 현재 상태는 그야말로 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서대륙으로 넘어가, 의혈맹이 마교를 치는 동안 자신은 키아벨리아스가 살고 있다는 레어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미령 소저…… 조금만, 조금만…….’

    정천우는 역천검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이제 드디어 중원으로 돌아갈 열쇠를 움켜쥔 존재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정천우는 사천당가의 항구에 나왔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항구에는 의혈맹의 기사단과 정예병들이 도열하는 중이었다. 항구에는 함선과 수송선이 병력을 태우기 위해서 준비 중이었다.

    정천우는 의혈맹의 군대가 도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맹주의 자리를 내놓은 뒤로 정천우는 딱히 소속이 없었다.

    “단장님!”

    “주인님!”

    헤이먼과 샤칼이 그를 발견하고는 나름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정천우가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단장 자리까지 내놓는 바람에 헤이먼과 샤칼 역시 직위가 해제되었다.

    두 사람은 맹약에 따라 정천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천우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두 사람에게 그만 떠나도 좋다고 했다. 헤이먼에게는 수호의 펜던트까지 돌려주었다.

    헤이먼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해도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정천우였기에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자신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서대륙으로 가는 원정대와 함께 있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샤칼, 헤이먼, 떠난 것 아니었어?”

    “주인님, 제가 가기는 어딜 갑니까? 저는 맹약으로 묶인 몸입니다. 게다가 아직 신탁을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이 녀석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샤칼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헤이먼이 샤칼의 목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목에는 수호의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훗! 후회하지 않겠어?”

    정천우는 피식 웃으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들었나 봅니다.”

    샤칼은 대답하면서 정천우의 눈을 피했다.

    투덜거리기만 하던 그였지만 막상 정천우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큰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찜찜했다. 그것은 헤이먼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전우애 같은 것이 생긴 모양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정? 뭐,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섭섭하긴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샤칼, 네가 받았다는 신탁이 대체 뭐야?”

    “예전에 말씀드렸던 걸로 아는데요? 역천검의 주인을 도우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정말 그게 끝?”

    “신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뭐…… 주인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알게 되겠죠.”

    샤칼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틈만 나면 정천우에게 벗어나려던 그였기에 지금 자신이 왜 이러는지 본인도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너도 어떻게 보면 참 고지식하다.”

    정천우는 혀를 끌끌 찼다.

    불확실한 신탁 때문에 목숨을 거는 샤칼이나, 겨우 목걸이에 부여된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목숨을 거는 헤이먼이나, 둘 모두 잘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자신의 확실한 아군이 되었다는 점이다.

    세 사람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감정에 흐뭇해하는 사이, 대열을 완성한 원정대가 차례대로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적당히 섞어 수송선에 배정했다.

    정천우는 샤칼과 헤이먼을 데리고 인원을 배정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시를 내리는 주소용 후작에게 걸어갔다. 배를 배정받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아! 천우 경!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주소용 후작이 바쁜 와중에도 정천우를 반겼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정천우는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었다.

    “일찍 오셔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거든요. 천우 경은 저기 맨 끝 쪽 배를 타시면 돼요.”

    “그렇…… 망했다.”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의 손가락을 좇아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가 가리킨 배의 갑판 위에서는 제인이 심통 난 얼굴로 정천우를 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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