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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80화 (18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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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5. 똥파리들 (2)

    ***

    사실상 동대륙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의혈맹주의 자리를 황당하게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

    현 의혈맹주가 맹주 자리를 내놓겠다며 제비뽑기를 하자는 데야 반대할 수도 없었다. 저마다 잔뜩 기대하면서 정천우가 내민 제비를 뽑았다.

    당첨자는 팽선웅 백작이었다. 가장 짧은 쇠막대기를 뽑은 사람이 맹주가 되기로 했는데, 정천우가 내공을 사용해 팽선웅 백작이 당첨되게끔 손을 쓴 결과였다.

    제비뽑기에 나선 의혈맹의 수뇌부 사람 중 누가 맹주가 되어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자신이 처음 만든 인연인 팽선웅 백작이 맹주가 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축하합니다, 맹주!”

    “축하드려요.”

    “현명하게 의혈맹을 이끌어 주길 바랍니다.”

    수뇌부 사람들은 팽선웅 백작이 맹주로 선출(?)되자 욕심을 버리고 축하해 주었다.

    무림맹주 때와 달리 임기를 두어 5년마다 재선출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당장은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자신에게도 다음 기회가 있기에 다들 대범한 척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모두 감사합니다. 중책을 맡아서 어깨가 무겁지만 최선을 다해서 의혈맹을 키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팽선웅 백작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면서 수뇌부들의 인사를 받았다.

    정천우는 그런 팽선웅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맹주 자리를 넘겨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계속 골치 아픈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야만 했을 일이다.

    자신은 서대륙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의혈맹의 문제에 깊게 개입하는 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넘겨줄 바에는 아예 시작부터 넘기는 게 골머리를 썩지 않는 지름길이다.

    도와줄 것도 다 도와주었고, 넘겨줄 것도 잡음 없이 넘겨주었다. 이제는 자신의 문제를 꺼낼 때라고 생각했다.

    “맹주님, 이제 저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팽선웅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영주로서 섬겼던 팽선웅 백작을 아랫사람으로 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버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말씀하시지요, 천우 경.”

    팽선웅 백작은 맹주의 자리를 넘겨받았음에도 정천우를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이제껏 맹주로서 대해 왔기에 예우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천우가 할 얘기라는 게 무엇인지 아는 까닭에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아시다시피 저는…….”

    쾅!

    “맹주님! 적입니다! 적이 함선을 이끌고 항구를 향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정천우가 진중한 얼굴로 서대륙에 넘어갈 것을 얘기하려는데, 팽만리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와 정천우에게 부복했다.

    ‘썅!’

    정천우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필이면 서대륙으로 넘어가겠다는 중요한 말을 하려는 이 순간에 적이 쳐들어올 것은 뭐란 말인가!

    “만리 경! 나는 이제 맹주가 아니오!”

    “그게 무슨…….”

    일그러진 얼굴의 정천우에게 팽만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후우……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누가 쳐들어온 겁니까?”

    정천우는 얘기하려다가 말이 끊기는 바람에 기운이 빠졌다.

    그렇지만 적이 나타났다니 정체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누가 맹주가 되었는지는 나중에 알아도 상관없는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조금 전에 맹주의 직위가 팽선웅 백작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 리 없는 팽만리는 단순한 성격답게 곧바로 입을 열었다.

    “서대륙의 함선으로 보입니다.”

    “무엇 때문에 서대륙의 함선이 사천당가의 항구를 찾은 겁니까?”

    “공물을 받으러 온 것 같습니다.”

    팽만리는 수뇌부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공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팽선웅 백작을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 모두가 알아들었다.

    “공물이라면 무림맹에서 서대륙에 바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도련에서도 같은 놈들한테 바친다는 겁니까?”

    “함선과 수송선에 걸린 깃발의 생김새가 같습니다.”

    팽만리가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과 정도련 모두에게 공물을 받고 있었다는 게 화가 치밀었다. 동대륙을 통일할 수 있게 무림맹을 지원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 말이다.

    “망할 자식들!”

    “맹주님, 흥분하지 마세요.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어요. 이 일을 핑계로 서대륙에 공물을 바치는 걸 중단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공물의 양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팽선웅 백작이 화를 내자 주소용 후작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서 미소 지었다.

    수뇌부 사람들은 주소용 후작의 말에 얼굴이 밝아졌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꼬투리를 잡아 공물의 양을 줄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하하! 차라리 잘된 일이군요.”

    팽선웅 백작은 그녀의 순발력에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했다. 공교로워도 이렇게나 공교로울 수는 없다. 동대륙의 운명을 건 전쟁이 한창 벌어지는데 공물을 걷으러 왔다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만약 아직도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면, 의혈맹이 패했을 게 분명했다. 마교와 서대륙 놈들이 정도련의 편을 들어주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 어디쯤 오고 있는가, 만리 경?”

    “대략 두 시간 정도면 항구에 도착할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맹주님!”

    팽만리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분위기로 보아 자신이 모시는 팽선웅 백작이 맹주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가슴이 벅차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서둘러서 마중하러 나가 봐야겠군. 여러분도 어서…….”

    “맹주님!”

    “응? 말씀하십시오, 천우 경.”

    팽선웅 백작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수뇌부 사람들에게 서대륙의 함선을 맞이하러 가자고 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왜 서대륙 놈들에게 공물을 줘야 합니까?”

    “서대륙은 전부터 우리의 형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형제란 놈들이 정도련과 무림맹 두 곳에서 삥을 뜯는다는 겁니까? 참 개 같은 형제네요.”

    “그건…….”

    정천우의 막말에 팽선웅 백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주소용 후작이 대신 나섰다.

    “천우 경, 서대륙이 좋지 않은 이웃이라는 건 우리도 알아요. 그렇지만 서대륙의 마법은 무서워요. 게다가 기사들의 실력도 동대륙보다 강하죠.”

    “지금의 우리보다 더 강합니까?”

    “…….”

    주소용 후작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공물을 바쳐 왔기에 습관처럼 서대륙을 받들어야 할 상위 국가로 인식했다. 그런데 정천우의 한마디가 그녀를 일깨웠다.

    서대륙의 기사들이 동대륙의 기사보다 월등하게 강한가?

    서대륙의 상위 기사들이 자신들보다 강한가?

    답은 ‘아니다!’였다.

    헤이먼을 제외한다고 해도 마스터급의 기사가 4명이나 된다. 그리고 몇몇 기사단장급 인물들도 마스터에 거의 근접해 가고 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마스터로 각성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도 검술을 수련하다가 갑자기 전신의 마나가 활성화되면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말이다.

    기사들은?

    기사들의 수준은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정천우가 만들어 준 단약을 복용한 결과다. 서대륙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아니!

    서대륙의 기사들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교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확인된 사실이다.

    처음에는 마기를 사용하는 기사 한 명과 동대륙 출신의 기사 두 명이 싸워야 겨우 평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일대일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단지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마기를 사용하는 기사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워했을 뿐이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나서야 싸울 수 있었던 것이 그런 이유다.

    실제로 싸워 보고 난 뒤로는 기사들 역시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의 실력이 서대륙의 기사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동대륙은 지금 모든 전력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다. 의혈맹이라는 깃발 아래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었다. 예전처럼 서대륙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두려웠던 건 미지의 능력인 마법!

    하지만 마법 전력 또한 상승했다. 서대륙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지만 방어할 정도는 된다. 동대륙의 모든 마법사도 의혈맹이라는 깃발 아래에 하나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천우 경,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가요?”

    주소용 후작은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열고 튀어나올 만큼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제껏 금기(禁忌)시되어 왔던 얘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지만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아니,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좌절당했던 금기.

    주소용 후작은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른 수뇌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보를 올렸던 팽만리조차 숨을 죽이고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그런 똥파리 같은 놈들한테 우리가 왜 공물을 바쳐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힘이 없습니까, 병력이 부족합니까?”

    “하지만 그들이 병력을 모두 이끌고 오면 어떻게…….”

    주소용 후작이 자신 없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아직 부족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짜증스러운 기분이었던 정천우가 흠칫하고 말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수뇌부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자신은 이미 맹주의 자리를 놓았는데 어째서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할 말은 하고 싶었다. 어렵게 동대륙을 하나로 통일했는데 공물이나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마교 놈들을 해치울 때는 그런 생각 했습니까? 그냥 쓸어버리죠?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따위 놈들한테 공물을 줍니까? 뜯긴 만큼 뱉으라고 해야죠.”

    수뇌부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천우의 파격적인 발언에 정적이 이어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동대륙 출신의 수뇌부들에게는 당연한 생각이 아니었다.

    서대륙과 거의 50년을 이어 온 관계다.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였다. 그렇지만 잘못되었다는 자각은 없었다.

    으레 그래 왔으니까, 서대륙은 동대륙보다 위에 있는 국가니까!

    동대륙의 사람들은 그렇게만 생각해 왔다. 워낙 오래도록 이어져 온 관계였기에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부족했다. 아니, 잘못되었다는 자각을 하기 전에, 이전 세대부터 전해 들은 얘기 때문이다.

    서대륙은 무섭다!

    건드리면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세뇌당하 듯이 들어 온 얘기들이 싸울 생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천우가 용기를 심어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제껏 자신들을 이끌어 준 그가 싸우자고 말했다.

    팽선웅 백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정천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말씀은 서대륙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입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팽선웅 백작이 물었다.

    “서대륙 놈들과 언제는 친구였습니까?”

    정천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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