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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79화 (179/200)
  • # 179

    Chapter 45. 똥파리들 (1)

    “배가 들어옵니다!”

    팽선웅 백작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상치 않은 생김새의 배들이 30여 척이나 들어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만 같은 성화(聖火)가 그려진 깃발을 단 배들이었다.

    성화의 깃발은 마교를 의미하는 것. 정진석 공작이 요청한 마교의 지원군이 들어오는 것이다.

    전투는 정진석 공작을 비롯한 수뇌부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끝났다.

    시즈 타워를 공격하던 정도련의 기사들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헤이먼과 팽우룡이 이끄는 기사단의 파상적인 공격에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 보고 일방적으로 박살 났다.

    거기에는……

    ‘능구렁이들 같으니…….’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과 주소용 후작을 바라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팽우룡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게 아니다.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 역시 마스터급 기사가 되었다. 거기에 팽만리까지 가세하면서 엄청난 전력 상승의 효과가 생겼다.

    헤이먼을 포함해 무려 5명의 마스터가 오러 블레이드를 앞세워 정도련의 기사들을 썰어 댔다. 전투가 오래 이어질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도련의 기사들은 전력의 2/3가 날아가고서야 항복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기사들이 항복하는 바람에 3만의 정도련 병사들은 의혈맹의 병력이 성벽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기를 버리고 성벽에 백기를 달았다.

    강력한 전력을 지닌 정진석 공작 일당과 기사단 전력을 궤멸시킨 덕분에 생각보다 손쉽게 정도련을 함락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교의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거였다.

    “사고 치는 놈 따로 있고 수습하는 놈 따로 있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입니다.”

    정천우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배 한 척당 마교의 병사들이 몇 명이나 타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정진석 공작이 마교의 병력을 기다리면서 수성전으로 시간을 끌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의혈맹과 정면 승부를 할 수 있을 만한 지원이라는 의미다.

    “그 인간은 죽어서도 민폐를 끼치는군요.”

    주소용 후작 역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도련의 빠른 항복으로 마교의 지원 병력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는 점이다.

    정천우를 비롯한 수뇌부와 기사들은 정도련의 기사들이 착용하는 회색 빛깔의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도련 병사들의 복장을 갈아입히고 크로스보우를 들게 했다.

    정도련이 아직 버티고 있는 척 위장함으로써 마교 놈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의혈맹에 항복한 정도련의 병사들은 무장을 해제시키고, 의혈맹 소속 기사 100명과 1만 명의 병사들에게 감시를 받게 했다.

    “거대하군요.”

    주소용 후작이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30척의 수송선은 일반적인 수송선과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갑판 위는 내릴 준비를 하는 병사들로 바글거렸다. 어림잡아 한 척당 300명은 넘어 보였다.

    마침내 30척의 마교 수송선이 항구에 닿았다. 마교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원래 사천당가의 항구에 있던 배들은 치워 둔 상태였다.

    30척의 배들이 항구에 닿기 무섭게 수송선에서 튼튼하고 넓고 기다란 판자가 드리워졌다. 마교의 병력이 판자로 이루어진 다리를 밟으며 일사불란하게 배에서 내렸다.

    ‘정진석 공작이 자신감을 가질 만했어!’

    정천우는 마교의 병사들이 뿌리는 기세에 감탄했다.

    동대륙의 일반적인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군기가 엄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병사들이 하나같이 동대륙의 수련기사에 준하는 능력을 지녔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미약하게나마 마나 쉐도우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정천우가 마교의 전력에 감탄하는 사이, 마교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서서 대열을 만들어 나갔다. 병사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지자 검은색 갑옷을 입은 마교의 기사단이 짙은 마기(魔氣)를 뿌리면서 뭍에 올랐다.

    30명의 마교 기사를 이끄는 인물이 맨 앞에서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로 걸어왔다.

    ‘제법이야.’

    기사단장으로 예상되는 인물을 감상한 정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역혈대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마스터급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교의 기사들은 싸울 때와 싸우지 않을 때가 다른 놈들이었으니까.

    “나는 플레임 기사단의 ‘린데머 드 알렉스’라고 한다. 누가 정진석 공작인가!”

    마교의 기사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거만하게 소리쳤다. 일부러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마교의 지원군인 자신이 더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게 분명했다.

    정천우가 마교 기사단의 린데머 단장을 향해 마중을 나갔다.

    정천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나가자 린데머가 얼굴 가득 비웃음을 담았다. 동대륙을 정복하겠다는 놈이 마교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우스웠다. 벌써 몇 번째 지원인지 모른다.

    린데머가 생각했을 때, 정진석 공작은 무능력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주제에 실실 웃으면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단장님, 저놈은 정진석이 아닙니다!”

    “그래? 대신 나왔나 보지, 뭐.”

    린데머는 뒤에서 부하가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동대륙의 기사 따위를 동급으로 보지 않고 있기에 누가 자신을 마중 나왔건 상관없었다.

    ‘그래 봐야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지.’

    비틀린 미소를 지은 린데머가 여전히 턱을 치켜들며 정천우를 향해 다가갔다.

    “훗!”

    린데머의 입가에 더욱 미소가 짙어졌다.

    자신을 마중 나온 정천우의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군례도 아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만큼 마교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미였다.

    바웅!

    ‘뭐지?’

    상대가 고개를 숙였다가 자신과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단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린데머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왜 이리 호들갑…….”

    부하에게 한 소리 하려던 린데머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야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땅바닥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급속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부하를 질책하려던 목소리는 중간까지 나오다가 끊겼다.

    목 부근에 화끈한 감각이 전해졌다. 손을 들어 어떻게 된 일인지 목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감각이 이상하게 꼬였다.

    텅!

    가까워지던 지면이 이마에 부딪치고는 세상이 빙글 돌았다. 하늘이 보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세상이 암흑으로 변했다.

    머리통만 남은 린데머를 지나치면서 정천우가 역천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마스터다!”

    “막아!”

    “어, 어떻게 된 거야!”

    정중하게 자신을 맞이하던 정천우가 태도를 바꾸어 공격을 해 대자 마교의 기사들은 허둥대며 분분히 무기를 뽑았다.

    “적을 섬멸하라!”

    정천우가 롱소드를 휘둘러 오는 마교의 기사를 무기째 썰어 내며 소리쳤다.

    투두둥! 투둥!

    쉬쉬슁!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의혈맹의 병사들은 일제히 크로스보우를 들고 사격을 가했다.

    항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던 마교의 병사들에게 쿼렐이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정천우의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던 기사들도 쿼렐에 맞아 쓰러졌다.

    “마교 새끼들아! 모조리 뒈져라!”

    정천우가 플라잉 오러를 쏘아 보냈다.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쉬었으니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마음이 워낙 컸다.

    마교의 기사들은 함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아니, 애초부터 마중 나온 놈들이 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안 한 게 바보짓이었다. 동대륙의 기사와 병사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만함이 부른 참사였다.

    마교의 기사들은 정천우의 공격에 변변한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썰렸다. 마교의 병사들은 빈틈없이 빽빽하게 날아오는 쿼렐을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정천우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빗발치던 쿼렐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멈췄다. 결과는 참혹했다. 마교의 병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참혹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마교의 정예라는 자부심을 가득 품은 채 배에서 내렸건만 무기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억울했을 것이다.

    “의혈맹의 기사들은 확인 사살을 실시하라!”

    정천우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포로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마교의 병사들이 순순히 항복할 이유도 없거니와, 정도련의 포로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미친 짓을 해 댈 게 분명한 마교의 병사들은 죽여 없애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결정했다.

    무방비 상태로 집중사격을 당한 탓에 마교의 병사들은 아주 극소수만 남았다. 의혈맹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저항하는 마교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자 긴장감이 팽배했던 사천당가의 항구에는 자욱한 피비린내만 남았다.

    “배들은 점령했는가!”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바닷물과 피에 젖은 의혈맹의 기사와 병사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군례를 올렸다.

    의혈맹의 일부 기사들과 병사들이 항구 근처에 대기하다가, 정천우가 기습을 시작한 순간 배에 올라가 선원들을 도륙한 것이다.

    마교의 정예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배에서 내린 까닭에 기사들까지 동원한 기습조를 막아 낼 전력이 배에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의혈맹은 30척이나 되는 대형 수송선을 얻었다.

    “승리의 함성을 질러라! 으아아아아!”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함성을 질렀다.

    정도련과의 싸움과 마교 정예 군단을 별다른 피해 없이 해치운 의혈맹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동대륙을 통일했다는 기쁨의 함성이었다.

    ***

    사천당가를 점령한 의혈맹은 전후 처리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정도련의 기사 중에서 의혈맹에 전향이 가능한 기사들을 추리고, 나머지 기사들은 죄질에 따라 목을 베거나 마나를 폐쇄하고 노예의 낙인을 찍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조금 더 관대했다. 의혈맹을 위해 일하겠다는 병사는 의혈맹의 병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원래 의혈맹 소속이었던 병사들에게는 보상 차원에서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다. 마교의 정예병을 손쉽게 해치운 바람에 전리품은 넘쳐났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단 한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맹주! 어째서입니까!”

    팽선웅 백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정천우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정도련과의 싸움이 끝나면 떠날 거라고 했습니다.”

    “아직 맹주님이 필요합니다! 지금 떠나시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팽선웅 백작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정천우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정천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다. 맹주의 자리를 지키면서 동대륙 전체를 다스린다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서대륙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맹주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만 했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을 비롯한 의혈맹 사람들이 맹주의 자리를 넘겨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정천우로서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서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제가 원래 살던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정천우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의혈맹의 수뇌부 사람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동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맹주의 자리다.

    맹주라고 부르지만 서대륙 식으로 따지자면 황제의 자리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천우가 맹주의 자리를 지키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이번 전쟁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준 사람이 없으니, 정천우 대신에 누가 맹주의 자리에 오르든 반발할 것이 뻔했으니까.

    정천우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충은 파악했기에 눈치를 보는 수뇌부가 더욱 부담스러웠다. 서로를 인정하기 싫어 견제하는 모습이 싫었다.

    “됐습니다! 여러분이 뭘 생각하는지 압니다. 맹주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 게 싫은 것 아닙니까?”

    “…….”

    정천우가 콕 꼬집어 말하자 수뇌부 사람들이 더욱 입을 다물었다. 속내가 들켰다는 것도 있지만 굳이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밉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쉰 정천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수뇌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비뽑기로 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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