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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78화 (178/200)
  • # 178

    Chapter 44. 웃기지 마! (3)

    “이, 이게…….”

    정진석 공작은 갑작스럽게 기세가 변한 정천우를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희 셋만 없애면 된다는 얘기지?”

    정천우가 희죽 웃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정도련의 최강자는 눈앞의 셋이 전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회유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리해도 된다.

    지금까지는 또 다른 미지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때문에 전력을 다하기가 껄끄러웠을 뿐이다. 놈들이 전부라는 걸 안 이상에야 다음 싸움을 준비할 필요 따윈 없는 일이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린 정천우의 몸에선 파괴적인 뇌전의 기운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정녕 끝까지 해보자는 것인가!”

    정진석 공작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소리쳤다.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에 굳이 피를 보려는 정천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기세가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그는 혼자고 자신들은 셋이다. 전혀 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하다 말아?”

    정천우가 싱거운 미소를 슬쩍 내보이곤 역천검을 들었다. 검날을 따라 흐르는 파괴적인 뇌전의 기운이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순백색으로 빛났다.

    단전과 검이 이어져 자신이 검이 되고 검이 자신이 되는 경지, 즉 신검합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후회하게 해 주마! 모두 전투 준비! 놈을 해치우는 데 목숨을 건다!”

    “네!”

    “알겠소!”

    비장함마저 묻어나는 정진석 공작의 명령에 당청서와 미간 단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지이익!

    편안한 자세로 힘을 끌어올렸던 정천우가 바닥을 끌면서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진정한 힘을 보여 주마! 네놈은 후회 속에서 죽어 가랏!”

    정진석 공작이 분노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검술 자세를 잡아 가는 그의 전신에서 기운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그것은 미간 단장과 당청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천우가 힘을 숨겼듯이, 그들 역시 약간의 힘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천우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강자의 여유였다.

    피비빗!

    공격의 시작은 당청서였다.

    그의 손을 떠난 두 자루의 나이프가 공간을 빠르게 압축하면서 정천우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정천우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트는 것만으로 하나의 나이프를 피해 냈다. 나머지 나이프는 손에 강기를 담아 파리를 쫓듯 쳐 냈다.

    피윳!

    “또 당해 줄 줄 아나 보지?”

    “어떻게…….”

    당청서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정천우가 나이프를 막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노리려던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의 움직임도 덩달아 멈췄다. 너무나도 간단히 당청서의 공격이 무산되자 공격할 타이밍을 놓쳤다.

    “궁금해하지 마! 죽어 보면 다 알게 돼 있어! 타핫!”

    정천우가 살벌한 미소와 함께 역천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기가 무섭게 역천검을 떠나면서 고속으로 회전했다. 아직도 놀란 얼굴로 서 있는 당청서를 향해 플라잉 오러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동시에 정천우가 지면을 박찼다.

    플라잉 오러의 뒤를 쫓아 달리는 것에 놀란 당청서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웃기지 마!”

    정천우는 당청서를 향해 달리다가 크게 도약했다.

    허공에 떠오른 그가 역천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바닥에 내려서는 그 짧은 시간에 일곱 번이나 공간을 찢어발겼다.

    착지한 뒤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십여 개의 플라잉 오러가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을 향해 쏟아졌다.

    “이런 젠장! 피해!”

    플라잉 오러가 십여 개나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오자 정진석 공작은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콰과과광!

    “크아아악!”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연달아 플라잉 오러가 틀어박히면서 폭발음이 터졌다.

    “부련주!”

    폭발음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오자 정진석 공작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당청서가 정진석 공작의 곁으로 블링크 마법을 사용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플라잉 오러가 덮치는 곳에 습관적으로 순간 이동을 했으니 영문도 모른 채 전신을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네 몸이나 걱정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에 정진석 공작이 급히 몸을 돌렸다.

    정천우가 어느새 유령처럼 다가와 역천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역천검에 가득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난폭한 기운을 쏟아 내면서 머리를 짓뭉갤 기세로 내리꽂혔다.

    이를 악다문 정진석 공작이 방패에 마나를 담아 후려쳤다.

    쾅!

    “크윽!”

    정진석 공작은 왼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충격에 신음을 흘렸다.

    감당하기 벅찬 수준의 공격이었기에 그는 몸을 빼내 미간 단장과 합류를 시도했다. 그러나 정천우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는 그를 따라붙으면서 연달아 역천검으로 내리찍었다.

    쾅! 콰광! 쾅!

    정천우는 정진석 공작이 몸을 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하게 역천검을 내질렀다.

    정진석 공작의 입에서 피보라가 튀었다. 아무리 방패로 막아 내도 역천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는 그의 육신에 타격을 주면서 충격을 차곡차곡 누적하고 있었다.

    “제길! 괴물 같은 놈!”

    미간 단장은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향해 쏘아지던 플라잉 오러.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 몰랐을 정도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정진석 공작이 위기에 몰리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플랑베르주를 두 손에 쥐고서 마나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정천우를 쫓았다.

    기합성 따윈 없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을 처치하려면 숨소리마저 내서는 안 된다. 기습 공격으로 해치우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엇!’

    이를 꽉 물고서 힘찬 도약과 함께 플랑베르주를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아니, 내리그으려고 했다.

    뻐걱!

    “컥!”

    “너 잘 걸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천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뒷발차기로 그의 턱을 올려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천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것을 발견한 미간 단장은 턱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플랑베르주를 힘껏 내리쳤다.

    쾅!

    “크윽!”

    플랑베르주와 역천검이 부딪치면서 발생한 충격이 턱에 전달되는 바람에 미간 단장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징징거릴 틈이 없었다. 정천우가 또다시 역천검을 휘둘러 왔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플랑베르주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쥐고서 마나를 쥐어짰다.

    쾅!

    ‘무슨 놈의 힘이…….’

    미간 단장은 썩어 문드러질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한 손으로 내리친 상대의 공격을 두 손으로 막았음에도 오히려 자신이 밀렸다.

    팔목과 팔꿈치, 그리고 어깨에 이르기까지, 충격을 받은 모든 관절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관절이 덜그럭거리고 갈비뼈가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누가…… 누가!’

    “물러설 것 같으냐아!”

    미간 단장이 굽혀지려던 무릎을 펴면서 플랑베르주를 힘껏 밀어 올렸다.

    전신의 마나를 일거에 폭발시켜 얻은 폭발적인 힘이었다. 한순간에 끌어올린 힘이라 지속력은 없지만 대신에 본래의 힘을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는 기술이었다.

    상대가 폭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는 순간 상체를 그어 버릴 생각이었다.

    “어엇!”

    미간 단장은 허전한 감각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괴력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던 상대의 힘이 한순간에 모조리 사라졌다. 그런 탓에 상체가 앞으로 휘청거렸다.

    “멍청한 자식!”

    정천우가 한 바퀴 빙글 돌면서 플랑베르주를 피해 내고는 휘청거리는 미간 단장의 목을 향해 역천검을 내리쳤다.

    쩌걱! 텅, 터덩텅!

    투구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목이 썽둥 썰렸다. 미간 단장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져 바닥에 퉁퉁 튀었다.

    목을 잃은 미간 단장의 몸은 정천우를 향해 플랑베르주를 휘두르려고 자세를 잡아 가다가, 잘린 목 부근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그대로 무너졌다.

    “이젠 너만 남았어.”

    정천우가 역천검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면서 으스스하게 말했다.

    “쿨럭! 쿨럭! 누, 누가 순순히 죽어 줄 것 같으냐!”

    피를 토해 내면서도 정진석 공작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공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던 당청서와 든든한 전력이 되어 주었던 미간 단장이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이게…… 크로스 마스터의 힘인가!’

    정진석 공작은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플라잉 오러를 사용할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자만이 해낼 수 있다는 기술을 사용하기에 충분히 경계했다.

    기록상으로는 크로스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마스터 2명과 평수를 이루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교에 마스터급 기사를 요청했다. 당청서까지 셋이 덤비면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간 단장이 마스터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정천우와 싸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처럼 허무하게 두 사람이 죽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마나를 다루는 기술이 미숙한 동대륙과 서대륙 기사를 토대로 한 기록이었다는 게 함정이었다. 중원의 무공을 사용하는 정천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무의미한 비교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정진석 공작에겐 날벼락 있었지만 말이다.

    “망할 자식!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정진석 공작이 입가에 흐른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면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그의 눈빛이 그럴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천우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던 정진석 백작은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이제 다 끝난 거 같지? 우리, 쉽게 가자. 알아서 뒈질래? 도와줄까?”

    정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

    지긋지긋한 싸움이 놈의 목을 베는 순간 끝날 거라는 생각에 살짝 몸이 달아올랐다. 녀석의 목을 베면 드디어 서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쿨럭, 무례하다! 비록 칼을 맞대었다고 하나, 정도련을 이끌던 몸이다. 적장에게 그따위 저열한 말이라니!”

    “지랄하고 있네. 그래서 어쩌라고?”

    정천우가 비웃음을 담아 비아냥거렸다. 돼먹지 못한 말에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더러운 욕심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주제에 적장에 대한 예의를 지켜 달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으드득!

    “내가 네놈 따위에게 패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웃기는 소리! 한 무리를 이끄는 자라면 비장의 카드 한 가지씩은 숨겨 두는 법이다. 단단히 각오하라! 크흐흐흑! 크흑…….”

    거칠게 이를 갈아붙인 정진석 공작이 핏발 선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그의 눈에 사악한 기운이 번졌다. 그와 동시에 투구 사이로 드러난 피부에서 지렁이 같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쩌걱!

    “컥! 커헉! 쿨럭쿨럭! 비, 비겁한…….”

    정진석 공작은 자신의 가슴에 파고든 역천검을 내려다보면서 원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에 깃든 마족을 깨우는 도중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심장에 틀어박힌 역천검이 마족을 꿰뚫으면서 전신을 질주하던 마나가 흩어지고 있었다.

    심장을 찔린 고통보다 마족이 죽으면서 마나가 흩어지는 고통이 더욱 강렬했다. 평생을 일군 힘이 한순간에 흩어지는 게, 마치 영혼이 흩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왜, 기다려 달라고? 이 새끼, 또라이 아냐?”

    “명예를…… 기사로서 죽기를 갈망했건만…….”

    “하여간 이 동네 새끼들은 지들 불리한 때만 명예를 지켜 달라고 육갑을 떤다니까. 인마, 그냥 곱게 뒈져. 명예? 웃기지 마! 네놈 따위한테 명예는 없다. 가라!”

    우두둑!

    정천우가 가슴에 박아 넣은 역천검의 손잡이를 비틀자 가슴뼈가 부서지면서 끔찍한 파골음이 일어났다.

    “거의…… 거의 다 왔는데…… 네놈 때문……에……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마교는…… 마교의 힘은…….”

    정진석 공작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울분에 찬 눈으로 정천우를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정천우는 역천검을 더욱 강하게 비틀어 상처를 크게 벌렸다. 정진석 공작의 몸이 한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축 늘어졌다.

    “그러게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역천검을 들어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피어난 오러 블레이드가 바닥에 쓰러진 정진석 공작의 목을 단숨에 끊었다.

    역천검에 정천우 공작의 수급을 박아 넣은 정천우가 아랫배에 힘을 주어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적장이 죽었다! 정도련주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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