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77화 (177/200)
  • # 177

    Chapter 44. 웃기지 마! (2)

    쾅!

    두 번째 폭음이 터졌다.

    발목을 노리고 롱소드를 휘두르던 정진석 공작의 인상이 구겨졌다. 폭음이 일어난 순간,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크윽!”

    방패를 쥔 왼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정천우가 방어로 선택한 것은 정진석 공작의 방패를 오른발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내공을 듬뿍 담아 각법(脚法)을 사용해 힘껏 밀었다.

    평범한 발차기만으로도 커다란 위력을 발휘할 텐데, 내공까지 사용해 걷어찼다. 그 위력은 일반적인 발차기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을 전달했다.

    방패에 실린 거력을 감당하지 못한 정진석 공작은 균형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그가 휘두르던 롱소드의 궤적 역시 엉망으로 흔들리면서 목표물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정천우가 중심을 잃고 허우적대는 정진석 공작을 향해 역천검을 내려찍으려 했다. 갑옷과 투구 사이에 드러난 허연 목줄기의 유혹이 컸다.

    그러나 이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려쳐 가던 역천검을 회수해 급하게 전면을 방어했다. 당청서가 던진 두 자루의 나이프가 결정적인 일격을 방해한 것이다.

    카강!

    “새끼들, 더럽게 얍삽하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정천우가 비아냥거리면서 세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순간, 간담이 서늘하긴 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조직적이어서 하마터면 공격을 허용할 뻔했던 것이다.

    쉽게 쉽게 마교의 기사들을 처리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은 모양이었다. 다음 공격을 생각하기보다 한 방에 끝장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언제부터 한 방에 한 놈씩 골로 보냈다고…….’

    정천우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반성했다.

    내공이 늘고 경지가 높아지면서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불필요한 자부심이 생긴 것 같았다.

    이제껏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다녔으면서 자신 역시 일발필살(一發必殺)을 노리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다시 정성껏 움켜쥐었다.

    무시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셋 모두 마스터급 능력을 지닌 진짜배기 기사들이다.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조금은 방만해졌던 긴장의 끈을 바짝 조여야만 할 때였다.

    ‘저 자식부터!’

    정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기치 못한 틈을 파고드는 암기가 치명적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해한다면 싸움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먼저 원거리 공격 능력을 지닌 당청서를 골로 보내 버리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라는 판단이 섰다.

    잘그락!

    역천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서 드로잉 나이프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에 하나씩 네 자루의 드로잉 나이프를 꺼낸 정천우가 당청서를 노려보았다. 놈을 해치울 최적의 경로를 계산했다.

    정진석 공작을 비롯한 정도련의 인물 세 사람은 긴장한 얼굴로 드로잉 나이프를 든 정천우를 주시했다. 마스터급 능력자의 투척 무기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아는 까닭이다.

    당청서의 투척술만 봐도 마나를 두른 금속 방패나 갑옷 따윈 뻥뻥 뚫어 버린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놈도 당해 봐라!”

    굳은 듯이 멈춰있던 정천우의 왼손이 움직였다.

    피비빗!

    네 자루의 드로잉 나이프가 당청서를 노리고 빛살처럼 날아갔다.

    드로잉 나이프가 정천우의 손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지면을 박차며 튀어 나갔다.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그의 역천검이 빛을 뿌린 것도 거의 동시였다.

    역천검은 파괴적인 뇌전의 기운을 품은 채 미간 단장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미간 단장이 플랑베르주를 들어 겨우겨우 공격에 반응했다.

    쾅!

    “우욱!”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내뱉으면서 미간 단장이 충돌의 여력을 해소하기 위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뒷걸음질이라기보다는 힘에 밀려 넘어지지 않기 위한 발악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 정천우는 충돌의 반탄력을 빌려 쏘아지듯 당청서를 향해 날아갔다.

    “으읍!”

    당청서가 당혹성을 뿌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두 자루의 나이프를 X자 형태로 겹쳐서 역천검을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자루의 드로잉 나이프를 막아 내느라 두 손에 경련이 일어난 상태였다. 나이프 두 자루를 겹쳐 막는다고 할지라도 정천우의 역천검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죽어라!”

    정천우가 살기 띤 얼굴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역천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꼬리를 물고 당청서의 겹쳐 막은 두 자루의 나이프와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감촉이 없어!’

    정천우는 뭐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청서를 베었다고 확신했는데, 역천검을 통해 전해진 감각은 그저 허공을 갈랐을 때의 느낌뿐이었다.

    재빨리 몸을 틀어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당청서의 몸을 쳐다보았다.

    “이런!”

    정천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당청서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공기 중에 스르르 흩어졌다.

    ‘마법?’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마법 외에는 없었다.

    중원의 이형환위(移形換位)라면 저런 식으로 연기가 새어 나가듯이 환영이 흩어지지 않는다. 잔상이 남은 거라 형상이 옅어지면서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퉤! 하여간 이 동네 새끼들은 마음에 안 들어.”

    정천우가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침을 뱉으면서 투덜거렸다.

    당청서가 어느새 정진석 공작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블링크라고 했던가?’

    당청서의 마법이 무엇인지 기억해 낸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교육(?)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 전까지, 샤칼이 구타를 피해 걸핏하면 사용하던 마법이 바로 블링크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샤칼의 경우야 그나마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져 잡기가 쉬웠지만 당청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마스터 급에 이르는 육체적인 능력을 겸하고 있으니 샤칼보다 더욱 귀찮을 게 뻔했다.

    “훗! 내가 쉽게 보였나? 그래도 한때는 정도련을 이끌던 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당청서가 두 자루의 나이프를 엇갈려 마찰시키면서 듣기 거북한 소음을 일으켰다.

    “부련주, 선공을 부탁하지.”

    “네, 련주님.”

    당청서가 잘난 척을 하려 하자 정진석 공작이 말을 끊었다.

    이제부터는 끊임없이 몰아붙여서 정천우를 침몰시켜야 한다. 그게 성공하면 다시 성으로 들어가 시간을 끌며 마교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교의 지원군이 도착하는 순간, 동대륙은 자신의 것이 된다. 동대륙의 모든 인간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어 대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신호로 당청서의 손이 움직였다.

    피윳!

    오러 블레이드에 감싸인 나이프가 당청서의 손을 떠나 정천우에게 날아갔다.

    “흥!”

    정천우가 코웃음을 치면서 역천검을 들어 나이프를 쳐 냈다. 그와 동시에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이 몸을 날려 왔다.

    두 사람 다 마스터의 경지를 뽐내면서 오러 블레이드를 각자의 무기에 두른 상태였다.

    정천우는 혼원벽력도법의 기운을 끌어내 역천검에 쏟아부었다. 놈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서 한 놈씩 해치울 생각이었다.

    한 방에 한 놈씩 보내는 게 욕심이라는 건 알지만 객관적으로도 자신의 능력이라면 강력한 공격으로 빈틈을 만들어 한 명씩 해치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마주 달려 나가려던 정천우가 뜨악한 얼굴로 급하게 돌아섰다. 오러 블레이드에 빛나는 나이프가 코앞에까지 날아들었다.

    카강!

    “으득!”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당청서가 블링크 마법을 사용해 정천우의 뒤에 나타나 나이프를 날린 것이다.

    정천우는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프를 막아 내느라 몸을 돌리는 바람에 위협적인 강적을 등 뒤에 놓게 된 셈이었다.

    “제길!”

    욕설을 터트리면서 정천우가 오른발에 힘을 주어 지면을 박찼다.

    지면을 박차고 날면서 몸을 빙글 돌린 정천우가, 맹렬한 기세를 담아 자신의 몸을 노리는 롱소드와 플랑베르주를 거의 동시에 쳐 냈다.

    ‘이 얍삽한 새끼들이!’

    속으로 열불이 터졌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욕할 틈도 없었다. 롱소드와 플랑베르주를 쳐 내느라 훤히 드러난 가슴을 향해 당청서의 나이프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무기가 튕겨 나간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이 자세를 회복해 가는 순간이었기에 머뭇거리다가는 협공에 걸려 낭패를 당할 판이었다.

    “칫!”

    정천우의 신형이 왼쪽으로 빙글 돌면서 역천검을 횡으로 갈랐다.

    “우욱!”

    “허엇!”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이 기겁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는 차원에서 내공을 잔뜩 주입해 역천검을 크게 휘두른 까닭이다.

    거리를 확보한 정천우는 회전하던 몸을 멈추기가 무섭게 역천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쭈욱 늘어나는가 싶더니, 검 끝을 벗어나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을 향해 쏘아졌다.

    대경실색한 정진석 공작과 미간 단장이 롱소드와 플랑베르주에 마나를 퍼부어 플라잉 오러를 갈랐다.

    콰광, 쾅!

    근거리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사방으로 마나의 파편이 휘날리고, 폭발에 의해서 흙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큭! 빌어먹을 자식들!”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정작 낭패를 당한 것은 정천우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한 자루의 나이프가 절반 가까이 파고 들어간 상태였다.

    플라잉 오러와 마스터급 기사 2명의 오러 블레이드가 맞부딪치면서 발생한 폭음과 흙먼지에 잠시 오감을 빼앗긴 사이, 당청서의 음흉한 공격에 당한 것이다.

    급하게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몸을 틀어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나이프가 절반이나 갑옷을 뚫고 들어왔다.

    “큭!”

    정천우가 옆구리에 박힌 나이프를 뽑았다. 칼날 끝에 핏물이 묻어 나왔다. 내공을 움직여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하고 피를 멎게 했다.

    그러는 사이 당청서가 다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지만 정천우는 옆구리에서 뽑은 나이프를 던져 공격 시도를 봉쇄했다.

    “으윽! 젠장맞을! 더럽게 아프네! 그런 식으로 나왔다 이거지?”

    뜨끔한 통증에 입술을 씰룩인 정천우가 당청서를 노려보았다. 성가신 놈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명씩 상대한다면 상대도 되지 않을 놈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셋이 협공으로 덤벼드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놈을 공격하려고 하면 저놈이 덤벼들고, 눈앞의 놈들한테 집중하려고 하면 뜬금없는 방향에서 오러 블레이드로 강화된 나이프가 날아온다.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혹해하는 정천우의 표정에 정진석 공작이 슬그머니 자세를 풀고 입을 열었다.

    “맹주, 굳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있소?”

    “무슨 개소리냐!”

    정천우가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싸우다 말고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중원에서 온 사람이라 들었소. 한데 무엇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오? 어느 편에 서든,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소.”

    “그래서?”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대가 섭섭하지 않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소. 그렇다고 해서 우리 편에 서서 싸워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이번 싸움에서 빠져 달라?”

    “맞소.”

    정진석 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우가 마음을 돌려주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기사단을 전부 이끌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천우가 정도련의 최고수 삼인방을 묶어 두는 바람에 의미 없는 소모전이 벌어진 것뿐이다.

    정진석 공작은 오러 블레이드가 담긴 롱소드로 정천우를 견제하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장기전으로 잡았던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약간의 지원을 받아 자력으로 동대륙을 정벌하는 것과 마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동대륙을 정벌하는 차이가 있다. 마교의 도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도련의 입지가 좁아질 것은 뻔한 이치였으니까 말이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정천우가 전투 자세를 풀었다.

    “후우…… 좋은 게 좋은 거라 이거지?”

    정천우가 고개를 흔들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정진석 공작을 비롯한 정도련의 강자들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갈등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 얘기를 상대가 알아들은 것 같자 정진석 공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하면 이번 전쟁을 손쉽게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정천우의 몸에서 이제까지 보였던 기세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츠즈즈즛…….

    정천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주변의 대기를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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