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73화 (173/200)
  • # 173

    Chapter 43. 개나 줘 버려 (1)

    마치 유성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오러 블레이드가 중첩되어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날려 보낸 쿼렐과 대형 화살이 오러 블레이드 덩어리에 맥을 못 추고 부서졌다.

    “피, 피해!”

    콰과과광!

    겁을 집어먹은 병사가 고함을 질렀으나 플라잉 오러는 경고성보다 빨랐다.

    굉음이 연속으로 튀어나오면서 성벽을 갉아 댔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파편에 쿼렐을 날리던 병사들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중원에 비해 무공의 수준이 떨어지는 동대륙에서 언제 이런 식의 공격을 경험해 보았겠는가!

    “쏴라! 쏘란 말이…… 빌어먹을!”

    정진석 공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정천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플라잉 오러의 위력에 병사들이 허둥대는 사이에 벌써 몸을 빼고 달아난 것이다.

    으드득!

    “모두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수성 병기를 전진 배치하고, 돌과 기름을 쌓아 놓아라! 빨리!”

    병사들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한 표정을 짓자 정진석 공작이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는 사이, 정천우는 경공을 발휘해 의혈맹의 본진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제기랄! 하마터면 뒈질 뻔했어! 멍청한 자식!”

    후퇴하는 내내 정천우는 바보 같았던 자신을 저주하면서 욕설을 터트렸다.

    의혈맹의 기사단이 파비스로 만든 방어벽 앞에 나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출동하려던 모양이었다. 그가 후퇴해서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하곤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성을 공략할 때처럼 안일하게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성을 공략했는지 아는 놈이 적의 수괴인데,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실패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하다.

    쿼렐과 대형 화살 세례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갇혔을 땐 솔직히 두려웠다. 위기를 벗어나고 보니 두려움의 감정은 짜증과 분노로 바뀌었다.

    이제껏 자신을 따르던 의혈맹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믿고 따르는 우두머리가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도망쳐 오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을 거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의혈맹 기사들에게 비루먹은 개새끼 꼴을 보여 주었다.

    ‘씨발, 모양 빠지게…….’

    정천우는 낭패한 기색을 감추며 속도를 늦추었다.

    파비스의 벽을 뚫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당연하게도 수뇌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맹주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맹주!”

    “굉장했습니다, 맹주님!”

    수뇌부 사람들은 정천우의 몸을 살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마지막에 보여 주었던 가공할 만한 위력의 플라잉 오러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렇게 칭찬하는 공지대사 남작의 얼굴에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적의 대응이 너무나 훌륭했다. 정천우의 시도가 먹혔다면 좋았겠지만 성을 넘어 보지도 못하고 신나게 쥐어 터지고 온 격이다. 뭐라고 말을 꺼내긴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문을 열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면목 없습니다. 놈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정천우가 입맛을 다시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딴에는 공성전을 좀 더 쉽게 치를 생각이었는데, 그게 무산되자 아쉬웠다.

    병력이 월등히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성전을 감행한 것인데 인간 공성 병기인 그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맹주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이제 남은 건 정공법이죠. 공성 병기를 앞세워 밀고 나간다면 적들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부맹주님께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번 싸움을 승리로 이끌겠어요.”

    “부탁합니다.”

    정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처럼 주소용 후작에게 전투의 총지휘권을 넘겼다. 자신이 지휘한다고 해 봐야 머리만 복잡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이 목매달기보다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걸 하는 게 승리의 지름길이다.

    말을 마친 그는 주소용 후작을 바라보았다. 명령을 내려 달라는 의미다.

    “맹주께서는 시즈 타워(Siege tower)를 보호해 주세요.”

    “시즈 타워? 아! 저거 말씀이십니까?”

    정천우는 병사들의 뒤에 조립된 목조 구조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보다 높게 만들어진 공성 병기다. 맨 꼭대기에서 성벽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고안된 이동식 건물이며 일종의 거대한 사다리다.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불에 타지 않도록 완성 후에는 젖은 천을 전면에 씌워 불화살이나 화염 마법에 피해를 입지 않게 했다.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일단 성벽에 맞닿으면 아군이 성안으로 침투하는 게 수월해진다.

    “저거라면…… 좋아!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 주지!”

    정천우가 눈을 빛냈다.

    시즈 타워를 끌고 간다면 적의 쿼렐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대형 화살이라고 해도 두꺼운 나무판자를 단번에 뚫을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이 시즈타워를 지킨다면 대형 화살쯤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게다가 정천우는 절대로 혼자서 시즈 타워를 보호할 생각이 없었다.

    “샤칼! 헤이먼!”

    그는 파비스의 벽 너머로 크게 소리쳤다. 잠시 소란이 일어나고 샤칼이 부리나케 뛰어 나왔다.

    “갑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헤이먼과 샤칼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와 정천우의 앞에 섰다.

    드워프 최고의 전사와 동대륙 최고의 마법사지만 그의 앞에선 일개 노예의 신분이다. 그것도 성질 더러운 주인에게 생명줄이 붙들린 불행한 노예 말이다.

    “넌 나와 함께 저 덩어리를 지킨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샤칼의 대답이었다.

    의문을 드러내 봐야 날아오는 것은 주먹뿐이다.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눈 밖에 나지 않게 하는 길이라는 걸 안다.

    그것은 헤이먼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샤칼보다는 좀 더 대우를 받는 게 다를 뿐, 처지는 거기서 거기다.

    “헤이먼, 너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이끌어. 내가 부르면 달려오는 거야.”

    “알겠습니다, 단장님.”

    “샤칼, 가자!”

    “예, 주인님.”

    샤칼은 정천우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와 정천우가 시즈 타워를 향해 가 버리자 남은 수뇌부 사람들은 작전을 새롭게 구상했다. 공성 병기로서의 역할을 해 줄 거라 믿었던 정천우의 실패 때문이다.

    수뇌부가 빠르게 계획을 수립하는 사이, 정천우는 샤칼과 함께 시즈 타워에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휘유!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하네.”

    정천우가 시즈 타워의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높이는 사천당가의 성벽보다 높다.

    꼭대기까지 포함해 네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맨 아래 층에는 말이 열 마리나 매여 있고, 기다란 통나무가 구조물에 엮여 있었다. 층마다 세 개씩 사다리가 놓여 있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충! 맹주님을 뵙습니다!”

    “수고하십니다. 저와 함께 저 녀석들 골탕 좀 먹입시다. 이름이 뭡니까?”

    “첼시라고 불러 주십시오, 맹주님!”

    “좋습니다. 첼시, 이 시즈 타워를 성벽까지 끌고 가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시즈 타워를 성벽까지 끌고 간 다음에 맨 위에서 줄을 당기면 문이 열립니다. 곧바로 기사단이 투입되어 성벽을 장악하는 데 사용하는 공성 병기입니다.”

    첼시는 정천우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시즈 타워를 지원하러 왔다는 것을 첼시는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즈 타워에 배속된 운용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가 시즈 타워에 배속되어 성벽을 장악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약간은 무례한 부탁을 한 것이다.

    물론 정천우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목적이었기에 적을 빨리 해치울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첼시의 설명을 들은 정천우는 시즈 타워가 단순무식한 대신에 확실한 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의 상황을 돌아보면 주소용 후작의 판단은 정확하다.

    쿼렐과 대형 화살이 아니었다면 성벽을 넘거나 성문을 파괴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반항이 너무나 거세어 실패로 돌아갔다. 시즈 타워를 사용해 접근한다면 쿼렐과 대형 화살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샤칼, 들었지? 이걸 성벽까지 가져가면 끝이다. 마법으로 안 될까?”

    “주, 주인님…….”

    “왜? 안 돼?”

    “제가 요즘 잘못한 거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샤칼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요즘 자신이 잘못한 게 있었던가 하는 고민으로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이렇게 억지를 부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청난 구조물에 사용할 만한 마법이라고는 경량화 마법 정도다. 그러나 엄청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즈 타워라면 못해도 자신이 지닌 마나의 절반은 날려 먹을 게 분명하다.

    “자식이, 안 되면 안 된다고 하고 끝낼 것이지, 왜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지랄이야?”

    “그, 그게…….”

    “됐어.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넌 위에 올라가서 마법 공격이 날아오면 막아 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샤칼의 얼굴이 활짝 폈다. 갈구려고 그러는 줄 알았더니 정말 호기심 때문에 물어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정천우는 샤칼이 플라이 마법으로 시즈 타워의 맨 위층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첼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첼시, 이건 어떻게 움직이는 겁니까?”

    “맹주님, 이제부터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첼시가 손으로 전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병사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서너 명이 조를 이루어 파비스를 들고서 조금씩 전진했다. 아직 쿼렐의 사거리에 들지 않아서인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준비하라!”

    “예!”

    정천우가 시선을 잠시 빼앗긴 사이, 첼시의 명령이 떨어졌다.

    좌우로 나누어 섰던 병사들이 시즈 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갑옷은 걸치지도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린 브로드 소드가 병사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였다.

    시즈 타워의 구조물과 이어진 기다란 나무에 병사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말의 볼기짝에 채찍이 가해졌다.

    그그그긍…….

    거대한 바퀴가 땅바닥을 파고들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위용에 정천우가 입을 떡 벌렸다.

    성벽까지 이동해야 한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엄청난 크기의 시즈 타워가 진짜로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놀라웠다. 마치 거대한 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시즈 타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웬만한 사람의 키 높이보다 높은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은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시즈 타워가 사천당가의 성벽에 닿는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정천우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정천우는 이를 드러내면서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젠장, 어느 세월에 가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랬다.

    정천우의 다급한 마음을 충족시키기에는 시즈 타워의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걷는 속도보다도 느렸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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