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Chapter 42.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다 (2)
***
“파비스를 전진 배치하라! 공성병기를 이동시켜라!”
팽선웅 백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전달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분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최소 500미터 안으로 진영을 옮겨야 비로소 공성전을 시작할 수 있다.
“이제야 좀 분위기가 잡히는 느낌입니다.”
“분위기라니, 어떤 분위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놈들의 분위기가 너무 평온해서 전투하자는 건지 놀자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습니다. 이제야 좀 싸울 맛이 납니다.”
“맹주님도 참…….”
주소용 후작은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의혈맹의 병사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교전은 없다. 본격적인 공성전을 펼치기 전에 진지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마법사들이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원거리 무기의 사거리는 대략 300미터 안팎이다. 그래서 보통은 4~500미터 거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벌인다.
전투를 알리는 움직임이었기에 정도련에서도 그에 반응해 움직임이 바빠졌다. 이제껏 대기하던 병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인지 성벽 위가 새카맣게 사람들로 채워졌다.
3만 명이 넘는 병력이 성안에 있으니 성벽 위로 미처 오르지 못한 병력은 그 두 배가 넘을 것이 확실했다.
“맹주님, 부탁드립니다.”
“무운을 빌어요.”
팽선웅 백작과 주소용 후작이 군례를 올리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공성전은 정천우의 선공으로 시작할 예정이었다. 공성 병기나 다름없는 그가 나서면 공성전이 지지부진하지 않고 화끈하게 흘러갈 것이다.
정천우가 돌진하면 병사들이 파비스를 전진 배치하면서 본격적인 진군을 할 테고, 공성 병기들이 끊임없이 따라붙을 예정이었다.
병사들이 설치한 파비스 사이로 정천우가 몸을 드러내고는 숨을 골랐다.
“갑니다!”
역천검을 움켜쥔 그가 크게 소리치며 지면을 박찼다.
땅거죽이 푹푹 파여 나가면서 정천우의 몸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경공을 발휘하는 그의 모습은 독수리를 연상케 했다.
“차압!”
순식간에 성문까지 도달한 정천우가 기합을 질렀다. 역천검에선 오러 블레이드가 뇌전의 기운을 뿌리면서 파괴적인 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빛의 꼬리를 물고 성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슝! 슈슈슝!
“우욱!”
성문을 향해 플라잉 오러를 날리려던 정천우가 당혹성을 흘렸다.
화살.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크기가 범상치 않았다. 일반 화살보다 두 배 이상 길고 굵었다.
플라잉 오러를 뿜어내려던 정천우는 자신을 노리고 발사된 화살을 향해 역천검을 휘둘렀다.
콰과광!
“크윽!”
정천우는 파공음을 내며 날아든 대형 화살을 쳐 내면서 인상을 구겼다.
크로스보우로 쏘아 낸 쿼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한두 발이라면 어찌어찌 막아 내겠지만 무더기로 날아오니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제길!”
정천우가 순순히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돌진하려 했지만 이내 욕설을 터트렸다.
창살문 안쪽의 성문이 기형적이었다. 반 뼘 정도 높이의 공간이 수평으로 쭉 뚫렸고, 날카로운 대형 화살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단순히 전방을 향해 쏘는 게 아니었다. 대형 화살을 장전한 상태에서 발리스타를 움직여 자신을 조준하고 있었다.
“가라!”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정천우가 검강을 만들어 쏘아 보냈다.
초승달 모양의 검강은 역천검과 연결 고리를 끊는 순간부터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위이잉! 콰과광!
검강을 날리고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정천우는 황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날아가던 검강은 창살문과 부딪친 순간 폭발을 일으키면서 사라졌다. 창살문에 순간적으로 빛이 나면서 플라잉 오러를 막아 냈다.
“썅! 이런 개…… 우와악!”
정천우가 기겁한 얼굴로 몸을 날렸다.
발리스타에 의해서 쏘아진 대형 화살 대여섯 발이 정천우를 노리고 한꺼번에 날아왔다. 자리를 피하기가 무섭게 대형 화살이 땅바닥에 꽂혔다.
대체 발리스타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대형 화살은 땅속에 스며들듯 사라져 구멍만 남았다.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길, 얼마나 버티나 보겠…… 제기랄!”
정천우는 창살문이 부서질 때까지 검강을 날리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이내 혀를 내둘렀다.
대형 화살이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날아왔다. 역천검을 휘둘러 대형 화살의 방향을 살짝살짝 비틀었다. 그럼에도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대체 발리스타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문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다가는 좋은 꼴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거기만 문이냐!”
정천우는 성문을 포기하고 다시 경공을 발휘했다. 성문을 파괴할 수 없다면 예전 무당파를 해치웠을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성벽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만약 성벽을 넘으면서 정진석 공작과 마주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초반에 해치우는 편이 더 낫다. 머리를 잃으면 나머지는 구심점을 잃고 헤맬 테니, 전투가 빨리 끝날 것이다.
정천우는 달리던 속도를 이용해 성벽을 향해 다가가 발을 가져다 대었다.
슈슈슝! 슈슝! 쉬쉬쉭!
“이런 제길!”
정천우가 대경실색하며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손에 쥔 역천검을 빠르게 휘저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쿼렐과 대형 화살이 집중적으로 쏘아졌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기에 힘을 줄 곳이 없었던 정천우는 쿼렐과 대형 화살을 쳐 내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경신술을 발휘해도 대형 화살에 실린 힘이 워낙 대단해서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똑같은 수법이 계속 통할 줄 알았나?”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면서 착지한 그때, 성벽 위에서 정진석 공작이 약을 올렸다.
“빌어먹을 자식! 나와! 결투로 이번 전쟁을 마무리 짓자!”
“생각했던 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내 너를 무당파에서 보았을 때부터 이미 알아봤다. 그런 아둔한 머리로 맹주? 가소롭다, 가소로워! 뭐가 아쉬워서 너와 대결을 펼친다는 말인가! 조금만 버티면 마교의 지원부대가 올 터인데!”
“뭐? 동대륙의 전쟁을 마교에게 떠넘기겠다는 거냐? 남의 손을 빌려 제 욕심을 채우겠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바보 같은 소리! 마교는 원래 동대륙에 속한 세력이다! 잠시 힘을 키우기 위해서 서대륙에 의탁했을 뿐, 그 뿌리는 우리와 같은 동대륙이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그래서? 마교 놈들한테 동대륙을 갖다 바치겠다?”
“누가 누굴 갖다 바친다는 건가! 그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아주 지랄을 하세요.”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라!”
정천우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욕을 하자 정진석 공작이 잔뜩 비웃음을 담은 채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벽 위에서 쿼렐과 대형 화살이 새카맣게 쏟아졌다. 정천우가 성문을 파괴하거나 성벽을 넘지 못하도록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제기라아아알!”
정천우가 비명처럼 욕설을 터트리며 역천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그의 몸 주변으로 은은한 빛이 흘렀다. 호신강기를 동원해 역천검으로 쳐 내지 못한 쿼렐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대형 화살만큼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생각 같아선 몸을 빼내고 싶지만 새카맣게 날아드는 쿼렐과 대형 화살을 두고 등을 돌렸다가는 벌집이 될 게 분명했다. 도망…… 아니, 후퇴할 때 후퇴하더라도 일단은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다음이어야만 했다.
타다당, 타탕! 쾅!
쿼렐과 대형 화살을 쳐 내는 정천우의 움직임은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쏟아지는 쿼렐과 대형 화살의 숫자가 많아 역천검만으로 쳐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천검을 쥐지 않은 왼손에 강기를 담아 부지런히 쳐 냈다.
“크윽! 제기랄! 제기랄!”
정천우는 연달아 욕설을 터트리며 쿼렐과 대형 화살을 쳐 내기 바빴다.
폭풍과도 같은 쿼렐과 대형 화살비가 한차례 지나면 꺾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몸을 빼내지 못한 탓에 그에게로 쿼렐과 대형 화살이 집중되었다. 광범위하게 사격해 쿼렐과 대형 화살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화살비가 끊이지 않았다.
정천우는 난감한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친 것은 아니다. 플라잉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기에 내공의 소모는 적은 편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대형 화살과 같은 경우에는 한 발이라도 맞는다면 내상을 입을 게 분명하다. 쿼렐 역시 호신강기를 깎아 먹고 심기를 건드릴 것은 뻔한 이치.
빨리 벗어나지 않는다면 내공 고갈이나 내상이 아니라 울화통이 터져 죽을 판이다.
“지독한 새끼들!”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방어하면서 움직이면 놈들이 실수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쿼렐과 대형 화살은 그의 이동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쏟아졌다.
아무리 역천검을 휘둘러도 쿼렐과 대형 화살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니미! 저 새끼들이 다 쏠 때까지 기다려? 염병! 언제 떨어질 줄 알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정천우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지치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놈들의 쿼렐과 대형 화살이 먼저 떨어지는 게 먼저인지 두고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미, 미친!”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쿼렐을 쳐 내는데 간간이 이상한 것들이 섞여서 날아왔다. 습관적으로 쳐 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기름이었다.
자신이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정도련 놈들이 기름 주머니를 달아 쿼렐을 쏘는 것이다. 기름을 매단 쿼렐은 아예 정천우를 무시하고 주변에 마구 쏘아 대고 있었다.
“야이! 썅! 치사한 새끼들아!”
정천우가 쌍욕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정진석 공작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대로 정천우를 불에 태워 죽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 얄미운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죽어, 이 개자식아!”
쿼렐을 쳐 내던 정천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플라잉 오러를 발출했다.
빙글거리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진석 공작을 정확하게 노렸다.
파바바박! 파바박!
정천우가 쏘아 보낸 오러 블레이드가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성벽 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올라갔다.
중간에 걸리는 쿼렐을 박살 내면서 돌파하던 오러 블레이드는 대형 화살에 맞아 미세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정진석 공작은 방향이 바뀌는 것을 깨닫고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정천우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자식!”
정천우가 속이 터진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이번 욕은 자신에게 한 것이다.
정말 멍청해도 크게 멍청했다. 대형 화살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치우쳤다. 그게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망할 자식아! 이거나 먹어라!”
쿼렐을 쳐 내던 정천우의 역천검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위잉, 윙, 윙윙윙, 위잉!
정천우의 역천검에서 플라잉 오러가 한꺼번에 이십여 개나 일어나 성벽을 향해 뻗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