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71화 (171/200)
  • # 171

    Chapter 42.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다 (1)

    “원래 7서클 마스터 아니었어?”

    “아닙니다, 주인님. 7서클의 마법사였을 뿐, 마스터는 아니었습니다.”

    “뭐가 달라?”

    “다릅니다. 이제는 마나가 허락하는 한 7서클의 마법을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샤칼은 뿌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7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면 정신력이 고갈되어 맥을 못 추었던 예전과는 달라졌다. 이제는 마나가 허락하는 이상 7서클의 마법을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모두 정천우 덕분이었다.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한계까지 마나를 박박 긁어 사용하면서 마나 고갈에 시달렸다. 언데드와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잦은 마나 고갈을 겪는 바람에 육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나를 보충하던 중에 깨우침을 얻었다. 육체가 대자연의 기운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여 손실된 마나를 보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관조하다가 ‘마나의 순환’을 깨우쳤다.

    그것은 샤칼에게 대단한 발견이자 신세계였다.

    자신 있게 얘기하긴 했지만 실상 7서클의 마법은 세 번이 한계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전에는 7서클 마법을 한 번만 사용해도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고, 두 번을 사용하면 최소한 며칠 동안 앓아누워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뭐가 뭔지 몰라 대충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샤칼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 우리 분위기 파악 좀 하자. 응?”

    “네? 아! 네, 네! 그럼…….”

    샤칼은 정천우가 무슨 소릴 하나 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제인과 정천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왜 이제야 제인을 찾아왔는지가 의문이긴 했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했다는 점이다.

    샤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주고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천우 경…….”

    “화나신 거 아니죠?”

    “좀 서운했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제인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렸다.

    언데드 군단과 벌였던 끔찍한 전투가 끝나고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는데, 사령관 막사에 콕 박혀서 이틀이나 꼼짝도 하지 않는 것에 솔직히 화가 났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자신을 찾아온 정천우가 고마웠다. 좋아하니까 미워하는 감정도 나오는 거다. 서운했던 감정은 그가 찾아오기 무섭게 봄볕에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제인의 손을 잡고서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맹주님! 맹주니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려는 그때, 멀리서부터 애타게 정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와락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진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정천우와 제인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팽만리를 노려보았다.

    ***

    의혈맹은 진격 중이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3일이라는 시간이 지체된 것은 아쉬웠지만 대신에 체력을 비축할 수 있어서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힘이 넘쳤으며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반나절의 거리를 불과 세 시간 만에 돌파한 의혈맹의 군대는 1킬로미터 떨어진 사천당가의 성을 마주하고서야 행군을 멈췄다.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다! 말을 잡아 배불리 먹고 대기한다!”

    팽선웅 백작은 행군을 멈추기가 무섭게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무리해 가면서 마차를 개조하고 말을 징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과 마차는 병사들의 피로를 풀어 주는 고마운 운송 수단이지만 운송이 끝나면 식량이 되어 준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병사는 사기가 더욱 높아지기 마련.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말과 마차를 준비한 것이다.

    병사들은 반으로 나뉘었다. 절반의 병력은 진지를 구축하고, 나머지 반은 그 외에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힘겹게 병사들을 태우고 왔던 말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일부 건장한 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말이 생을 마감하고 조각조각 나뉘었다.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의혈맹의 수뇌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데요?”

    정천우가 사천당가의 성을 바라보면서 한마디 했다. 그의 말처럼 정도련이 주둔한 사천당가의 영지성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의혈맹을 주시하고 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는 느낌이었다.

    수성할 준비를 끝냈다는 자신감인지 아니면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성벽 위에 늘어선 병사들의 움직임이 당당하고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주소용 후작은 엷은 미소를 내비쳤다.

    “저들은 의혈맹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네요.”

    “패배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죠.”

    “다만 제가 의문스러운 점은 정도련의 병사들이 어째서 저렇게 사기가 높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정천우는 성벽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의혈맹을 경계하는 정도련 병사들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도련의 지휘관이 뭔가 희망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병사들이 저렇게나 태연할 순 없는 일이다. 성을 공격해야 하는 의혈맹 병력이 수성하는 정도련의 병력보다 월등하게 많지 않다는 것을 믿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처럼 일반 병사마저 흔들림 없이 태연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뭔가 변수가 생겼다는 의미다.

    정천우는 그게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봐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병력을 보충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근방의 영지민을 학살한 놈들입니다. 민란까지 일어난 상태에서 그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흐음…… 어떤 식으로든 병사들이 안도할 만한 전력의 확충이 이루어졌다는 말인데…… 알 수 없는 일이네요.”

    “싸워 봐야 알 일이겠지만, 놈들에게 숨겨 둔 전력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최대한 방비하도록 할게요, 맹주님.”

    주소용 후작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다시 한 번 사천당가의 영지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병사들의 움직임은 자신감이 가득하고 사기가 높아 보였다.

    무엇을 믿고 저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내 불안감을 털어 냈다.

    상대가 무엇을 준비하든 상관없다고 믿었다. 정석대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 시답지 않은 꼼수 따윈 맥을 못 추게 되어 있으니까.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합시다. 말고기는 귀한 음식입니다. 하하하!”

    분위기가 심각해질 듯하자 팽선웅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답이 없는 일에 머리를 쥐어짜 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정천우를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이 피식하고 싱거운 웃음을 내비쳤다.

    그의 말대로, 일단 배부터 채운 뒤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일이었다. 이번 전투의 시작은 정도련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의혈맹이 시작해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굳이 답 없는 일에 매달리기보다 일단은 머리를 쉬게 해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더 확실한 승부수를 만들고 전술을 가다듬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단지 식사를 하자는 말이었지만 팽선웅 백작이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칼자루를 쥔 것은 정도련이 아니라 의혈맹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것이나 다름없다.

    “좋습니다. 팽선웅 백작님의 말씀처럼 식사부터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의 눈은 팽선웅 백작을 향하고 있었다.

    과격하게 무기만 휘둘러 대는 맹장(猛將)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쟁을 겪으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의혈맹의 입장에서는 좋은 변화였다.

    지휘관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상황에 더 유연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최후의 전투가 점점 의혈맹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뇌부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정천우와 함께 병사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한편.

    사천당가의 영지성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련주님, 이건 좀 아닌 듯합니다.”

    “자네의 불만이 뭔지 아네만, 이번 일만 끝나면 다 해결될 일이라네.”

    정진석 공작은 얼마 전까지 정도련을 이끌었던 당청서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 주었다. 그의 불만이 마교에서 지원 나온 기사들 탓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언데드 군단과 의혈맹이 싸우느라 지체한 시간과 3일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드디어 고대하던 마교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겨우 50명에 불과한 기사들이었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났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정진석 공작도 마교의 기사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물론 숨겨진 힘을 사용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마교의 기사들 역시 숨겨 둔 힘이 있을 테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게 옳았다.

    지원 나온 마교의 기사 50명이라면 최소한 의혈맹의 기사 2~300명은 잡아 둘 수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전력이다.

    게다가 기사들을 이끄는 미간 드 렉턴의 능력은 더 대단했다. 정도련에서 정진석 공작을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는 당청서조차 미간 드 렉턴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고 봐야 했다.

    당청서가 불편해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이다.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그들은 정도련 소속 기사들을 불쾌하게 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윗사람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게 눈꼴셨다.

    그래서 당청서가 짜증 섞인 얼굴로 정진석 공작에게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참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가벼운 시비가 붙었을 뿐인데 기사의 팔을 잘라 놓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하고서 하루 만에 말썽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후우……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세. 하지만 그들이 없다면 우린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게야. 아니, 그들의 도움이 없다면 반드시 어려운 싸움이 될 테지. 지금은 참게. 싸움이 벌어지면 사고를 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일세.”

    “마교의 기사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이렇게 난폭한 놈들은 처음입니다.”

    “마교에서 우릴 그만큼 신경 써 줬다고 생각하게. 그들은 프레임 기사단, 이제껏 보았던 다크 기사단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들이지.”

    “먼저 왔던 기사들보다 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청서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냥 성질 더러운 놈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에 정진석 공작이 자꾸 양보하려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프레임 기사단의 기사들은 실제 전투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지.”

    “진가라 하시면…….”

    당청서가 눈을 빛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프레임 기사단의 비밀이 있다는 얘기에 그는 솔깃했다.

    “그것은 말일세…….”

    목소리를 낮춰 가며 대답해 주려던 정진석 공작의 눈이 매섭게 돌아갔다.

    덜컥!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정도련의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앉았다.

    “충! 련주님, 놈들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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