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70화 (170/200)
  • # 170

    Chapter 41. 고통과 희망 (3)

    ***

    “진짜 젠장맞겠네!”

    정천우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상반신만 남아 꿈틀대는 언데드의 머리에 역천검을 박았다.

    콰득!

    “케엑!”

    역천검을 머릿속에 받아들인 언데드 병사가 번개에 맞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언데드 군단에게 대승(?)을 거두고 뒤처리하는 중이다. 몸이 조각 난 채로 살아남은 언데드를 놔뒀다가는 사방으로 기어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테니까 말이다.

    그의 생각 같아서는 확인 사살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느니 사천당가로 진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의혈맹은 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기사 전력이야 이번 전투에서 활약하지 않았기에 상관없다.

    문제는 병사들이었다. 언데드와 전투를 벌이면서 상당한 무리를 했기에 휴식이 필요했다. 휴식 없이 사천당가로 진격했다가는 병사들이 지쳐서 정작 정도련과 전투를 벌이지 못하게 될 터였다.

    정천우는 그 스트레스를 언데드 확인 사살로 푸는 중이었다.

    “단장님,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기고 쉬십시오.”

    “됐어. 쉬어도 같이 쉬는 게 낫지, 혼자 찜찜해서 어떻게 쉬겠어? 이런 제길! 이건 대가리만 남은 놈이 왜 움직이고 지랄이야?”

    정천우는 입을 쩍쩍 벌리면서 끽끽 소리를 내는 언데드의 머리통을 역천검으로 부쉈다.

    한쪽에서는 신관들이 기도문을 외우면서 신성력으로 정화 마법을 발휘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확인 사살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병사들은 완벽한 시체(?)가 된 언데드를 날라 진격로 양옆으로 치웠다.

    시체 때문에 진격로가 막혔으니, 싫어도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을 둘러보면서 정천우가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한 이틀은 날려 먹겠네. 정도련, 이 치사한 새끼들을 조져야 하는데. 젠장!”

    정천우는 썩은 내장을 내놓으며 버둥버둥 기어가는 언데드 병사의 머리통을 욕설과 함께 반으로 쪼개 놓았다.

    밤새 언데드에 시달린 의혈맹 사람들은 원래 만들었던 야영지에서 200미터 후퇴한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사방에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병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푸석푸석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끔찍한 존재들과 전투를 벌였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병사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수뇌부는 임시 막사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의혈맹의 피해는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맹주님과 마법병대의 활약에 힘입어 초기 대응이 시의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중경상자 300여 명이 발생했을 뿐, 사망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번 일로 인하여 휴식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팽선웅 백작이 피해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하면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결론은 뻔하지만, 형식적으로라도 그의 결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3일간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상자는 인솔자를 배정하여 남궁세가로 돌려보내십시오. 다른 안건이 없다면 여러분도 이만 쉬도록 하십시오. 저녁에 다시 모이는 게 낫겠습니다. 해산하십시오.”

    “충!”

    기다렸다는 듯이 수뇌부 사람들이 군례를 올리고는 막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언데드 군단의 공격을 물리치고 나서 이틀이 지난 저녁.

    “으윽! 지겨워서 못해 먹겠네!”

    정천우는 평소와 같이 운공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눈을 떴다.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운공에만 매달렸는데, 이젠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마교의 고위기사들에게서 추출한 마족의 생명력을 흡수한 뒤로는 내공을 운용해도 진전이 없었다. 무공에 대해서 새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휴식을 3일로 잡은 다음이었기에 아직도 하루를 더 머물러야만 했다.

    쉰다고는 했지만 병사들은 쉬는 게 아니다. 언데드의 시체를 파묻느라 제대로 쉬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해 땅을 파 주지 않았다면 병사들은 한숨도 쉬지 못하고 삽질만 하다가 볼일 다 봤을 것이다.

    이제야 언데드에 대한 수습이 다 끝나고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야영지에는 조금씩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중이다. 언데드가 나타났을 때의 두려움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젠 오히려 활기가 넘친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끔찍했던 언데드까지 물리쳤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는 분위기였다. 남은 정도련 놈들은 그나마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천우는 병사들끼리 수군거리는 얘기를 들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도련과 전쟁을 벌여도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세란 것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장 싸워도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마지막 전투를 남겨 둔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다들 열심히 하네.’

    정천우는 우렁찬 기합을 터트리면서 육합권 수련에 몰두하는 기사들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바둥거리는 인물을 발견한 탓이다.

    주인공은 바로 헤이먼이었다.

    기사들이 시원시원하게 사지를 움직이면서 육합권을 펼치는 가운데, 헤이먼이 짧은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열심히 육합권을 따라 하고 있었다.

    정천우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 가면서 기사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만! 충!”

    “됐어요. 그냥 하던 거 하세요.”

    기사들과 함께 육합권을 수련하던 팽우룡이 군례를 올리자 정천우가 무안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인사를 받자고 다가간 것이 아닌데 팽우룡이 과하게 반응하자 부담되었던 것이다.

    “넌 거기서 뭐 하냐?”

    “아하하하…… 단장님, 저도 요즘 깨달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헤이먼이 쑥스러워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천우는 헤이먼이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나 이내 입이 쭉 찢어졌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강인함이 헤이먼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이것 봐라? 벽을 넘어선 거야?”

    “하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헤이먼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크게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정천우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팽우룡에게도 놀란 얼굴을 보여 주었다.

    “우룡 경까지?”

    “운이 좋았습니다. 맹주님의 말씀대로더군요.”

    팽우룡 역시 이를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의 전신에서도 이제까지와 다른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원의 무인이라면 변화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기운을 숨기는 것에 미숙한 사람들의 세상이다.

    헤이먼과 팽우룡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정체는 마스터급 기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중원의 고수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축하합니다!”

    정천우는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두 사람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마스터급 기사가 두 명이나 탄생했으니 전투는 의혈맹에 더욱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 자명한 일이다.

    “단장님, 모두가 단장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헤이먼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동안 정천우를 원망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다. 자유를 억압하고 샤칼과 자신을 노예 부리듯 괴롭혀 댔으니 불만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드워프 종족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도 동대륙과 서대륙의 역사를 합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특유의 강인한 육체와 인간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무기 제조 기술을 앞세워 마스터 엇비슷한 경지를 흉내 내기는 했었다. 그러나 마스터급 드워프 전사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한계의 벽을 부수고 헤이먼이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드워프인 그에게는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샤칼의 수호자로 발탁될 때에도 그렇고, 억지로 정천우의 수호자가 될 때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헤이먼은 진심으로 자신의 성취를 축하하는 정천우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타오르는 불꽃의 이름으로 단장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야, 사람 무안하게…….”

    정천우는 헤이먼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동안 괴롭히기만 했었기에 헤이먼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불꽃 망치 일족의 염원을 이룬 헤이먼에게 정천우는 다시없을 은인이었다. 이제까지는 억지로 그를 따랐지만 이제는 조금 바뀌었다.

    그가 만든 단약을 먹고서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불꽃 망치 일족의 다른 드워프들에게도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곁에서 정천우를 보아 왔기에 그가 단약을 어떻게 제조하는지 안다. 몰래 만들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정천우가 만든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독성을 완벽하게 중화하려면 내공으로 독성을 태워야 한다. 헤이먼의 마나 운용 능력으로는 그게 어려웠지만 대신에 견딜 수 있었다. 까무라칠 정도의 독성이지만 드워프 종족의 강인한 육체 능력으로 충분히 버틸 만했다.

    어째서 신탁이 그를 향했는지 아직도 밝혀진 것은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최소한 드워프 일족에게는 구세주야.’

    헤이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작은 몸짓에는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샤칼은 어디 있지?”

    정천우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샤칼을 찾았다.

    일부러 그랬다. 팽우룡까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칼은 마법병대에 있을 겁니다. 녀석도 뭔가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럼 수고해. 우룡 경도 수고하세요.”

    “충!”

    팽우룡은 그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빙그레 미소를 보이면서 군례와 함께 야영지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에휴…….”

    정천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정천우는 마법병대가 모인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천막 주변에는 마법사들이 나와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샤칼이 마법사들을 모아 놓고 한창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마법병대의 마법사들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샤칼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의에 불타오른 모습이었다.

    정천우가 다가오자 제인이 먼저 반겼다.

    “맹주님!”

    “제인 마법사님, 오랜만입니다.”

    정천우는 제인의 표정에 반가움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알면서도 무심하게 대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막 그녀에게 한마디 더 하려는데, 뒤돌아서 있던 샤칼이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뭐, 뭐야!’

    샤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천우는 질겁한 얼굴로 변했다.

    “주인님! 주인님!”

    “어! 어! 왜, 왜 이래!”

    정천우가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마지못해 자신을 따르는 게 역력했던 샤칼의 얼굴이 달라졌다. 마치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가족을 보는 눈빛이었다.

    “제가, 제가! 7서클을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샤칼이 정천우에게 달려들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정천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병대의 마법사들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샤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순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의혈맹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병사는 물론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얼굴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드러나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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