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5화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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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0. 사악한 자식들 (3)

    멀리 보이는 마을.

    아니, 마을이라고 하기엔 미안한 곳이 되었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아 있음에도 건물 대부분이 망가진 마을에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직 사천당가의 영지 성에 도착하려면 대략 반나절 거리가 남았다. 남궁세가에서 사천당가의 영지 성에 가려면 진격로가 뻔하다.

    그 진격로에 속한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짓이겨 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짓을 벌였는지, 그저 정도련의 의도가 궁금했다.

    “우선은 척후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팽선웅 백작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전까지는 예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척후조의 보고를 기다리자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도 은은하게 분노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영지전이 벌어지면 인근 마을의 영지민을 성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때 식량을 모조리 징발해 영지를 침공한 적들이 사용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영지전에서 가옥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영지전이 끝난 뒤에는 누가 되었건 영지민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까지 파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외국의 침입 혹은 독하게 마음먹고 수성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때 이렇게 한다. 공격하는 측이 편하게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아예 없애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도련과 의혈맹의 전투는 장기전으로 끌고 나갈 이유가 없다. 의혈맹이 외국의 세력도 아닌 데다가 전쟁을 오래 끌어 봐야 이득이 없다.

    그럼에도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 의문스럽다. 어떤 목적으로 마을을 파괴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수뇌부 사람들이 이유를 찾느라 머리를 팽팽 굴리는 사이, 척후조가 말을 몰고 마을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척후조가 본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복귀하는 순간, 의혈맹의 수뇌부는 야영을 지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혈맹 야전 사령부 임시 막사.

    막사에 모인 수뇌부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척후조가 전해 준 소식은 그만큼 좋지 않았다.

    마을이 파괴된 거야 그러려니 했다. 지난번 화산파를 공격할 때에도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의혈맹의 짓으로 꾸민 적도 있으니까. 폐허가 된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라면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게 뭐가 이상한 일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찰조의 보고와 겹치는 순간, 더러운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천당가의 영지 성 앞에는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점.

    두 가지 의문점을 하나로 합치면 끔찍한 예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정천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무거운 겁니까?”

    결국 정천우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나저제나 수뇌부 사람들에게서 말이 흘러나오길 기다렸는데 저마다 심각한 얼굴만 하고선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뭔가 아는 듯한 눈친데 자신만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니 그게 불편했다. 어째서 진군까지 멈추고서 이렇듯 오만상을 찌푸리고만 있는지 그것도 답답했고 말이다.

    의문이 담긴 정천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서야 수뇌부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언데드 때문입니다.”

    “언데드?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까?”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데드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하북팽가에서 ‘강시’로 착각했던 바로 그것.

    ‘그래 봐야 시시했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야?’

    얘기를 들었지만 오히려 그는 더 의문스러워졌다.

    데스나이트라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언데드는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나중에 가서야 데스나이트가 실패작이라는 걸 알았지만 만약 실패작이 아니었더라도 딱히 위협적이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은 충분히 강하니까!

    그런 자신감을 읽었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으면서 팽선웅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맹주님, 무림맹의 시체가 3만 구를 넘습니다. 정도련 측의 시체도 1만 구가 넘습니다.”

    “…….”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4만이 넘는 언데드라면 의혈맹의 총병력과 엇비슷하다. 성안에 주둔한 정도련의 병력까지 더하면 무려 7만에 이르는 엄청난 병력이다.

    그렇게 되면 이건 시작부터 잘못된 싸움이다.

    무릇 공성전은 수성하는 측보다 최소 두 배가 넘는 인원으로 도모하는 게 정석이다.

    의혈맹은 병력이 부족한데도 뛰어난 공성 병기와 일인 군단인 정천우가 있기에 공성전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적의 숫자가 두 배 가까이 뻥튀기가 된다면?

    이건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다.

    정천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주소용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에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해요. 마교의 사악한 대법 중에는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사용하는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신관들에게 성수를 만들라고 지시는 해 두었어요.”

    “역시 부맹주님께선 철저하십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언데드를 앞세워 공격할 게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는 겁니다. 마교 놈들이 전통적으로 즐겨 쓰는 방법이니까 말입니다.”

    주소용 후작의 말을 받아 팽선웅 백작이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자 수뇌부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주소용 후작조차 그의 발언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림맹을 배신한 정진석 공작의 성정과 그간 보여 준 정도련의 행태는 잔인하고도 사악했다.

    그들이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시체 부활의 더러운 술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거라는 데 반대 의견을 내기가 어려웠다.

    짝, 짝!

    수뇌부 사람들이 침음을 흘리면서 언데드에 대한 걱정만 해 대자 정천우가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끌었다.

    “자, 자! 좋습니다. 그럼 신관에게 성수를 준비하라 하시고, 나머지 병력은 오래 머무를 것에 대비해 진지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지시해 주십시오. 때가 때인 만큼 기사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만 해산합시다.”

    “예, 맹주님!”

    정천우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자 수뇌부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데드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게 기우에 불과하길 바라지만 정황으로 보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니다.

    이럴 땐 차라리 시간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게 유리하다. 대비할 수 있다면 그만큼 유리해지는 게 전쟁이니까.

    “쪼잔한 자식들, 깔끔하게 싸우면 좀 좋아?”

    수뇌부 사람들이 사라진 사령부 막사에 남은 정천우가 투덜거렸다.

    빨리 정도련을 해치우고 서대륙에 넘어가고 싶은 그로서는 아쉽기만 했다. 화끈하게 치러질 거라고 예상했던 정도련과의 전투가 막판에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더욱 답답한 기분이었다.

    ***

    마틴은 아미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기사가 꿈이었기에 육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수련했다.

    하지만 아미파의 특성상 남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마나 친화도가 나쁘다. 마틴 역시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서 일반 병사가 되었다.

    다행히 아미파에선 마틴의 빠른 발과 뛰어난 체력을 높게 쳐주었다.

    10대 후반에 입대해서 벌써 병사 생활만 5년 차다. 이제는 아미파의 정예병이 되어 정찰대 소속 3조장이 되었다.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승진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23살이었으니까 말이다.

    정찰조 3조장.

    애매한 위치다.

    정예병 중의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정찰 1조에는 기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천당가의 영지성 인근에 숨어 정도련의 동정을 살핀다.

    정찰 2조 역시 마찬가지다. 정찰 1조보다는 약간 덜 위험하다고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래 봐야 위험하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군도 없는 적진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이니까 말이다.

    ‘뭐, 우리라고 별로 다를 건 없지만…….’

    마틴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정찰 1조나 정찰 2조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다는 것에 위안 삼았다.

    정찰 1, 2조는 그야말로 적진 한가운데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최정예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들에 비한다면 마틴이 책임지는 정찰 3조는 좀 나은 편이다. 정찰 1, 2조가 전해 주는 정보만 추려서 후속 조에 전달만 해 주면 그만이니까. 그것도 대부분은 쫄다구한테 떠넘기기에 마틴의 일은 더욱 쉬운 편이다.

    조장이 시키는데 일개 조원이 엉겼다가는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뻔하기에 반항조차 하지 않는다. 3조장이라는 자리는 마틴에게 땡보직이라고 할 만했다.

    마틴은 권태로운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조원 중의 하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시간대라 걷어차인 조원은 소리를 내는 대신에 마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틴은 손을 마구 움직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수신호로 전달했다. 그의 수신호를 받은 조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가 싶었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마침 어둠이 내려앉고 있어서 조원의 표정을 숨겨 주었다.

    마틴의 수신호는 간단했다.

    ‘나 짱 박혀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재깍 보고해라.’

    라는 의미였다.

    고개를 끄덕인 조원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근래에 지급 받은 최신 장비를 눈에 가져다 대었다.

    망원경이라는 물건이었는데,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깝게 보이도록 하는 신기한 장비였다.

    ‘자식들, 그러게 꼬우면 군대에 일찍 왔어야지.’

    마틴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사천당가의 영지 성을 살피는 조원에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으슥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조원들과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이다. 쫄다구들이 농땡이를 피우는지, 열심히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지 감시할 겸해서 만든 은신처다. 죽은 나무의 밑동에 있는 짐승의 동굴을 그가 더 깊이 파서 만든, 나름 신경 쓴 곳이다.

    지금과 같이 고정된 위치에서 정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은신처를 만들어 두어야 한 사람씩 교대로 아늑하게 쉴 수 있다.

    그래 봐야 최고참인 마틴이 대부분의 시간을 짱 박혀 있지만.

    ‘이 맛에 조장 하는 거지!’

    은신처에 들어간 마틴은 망토를 덮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찰대원들의 망토는 필수 보급품 중의 하나다. 보온 마법과 기척을 감추는 사일런트(Silent) 마법이 심어져 있는 나름 고급 장비다. 그래 봐야 그다지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틴이 기분 좋게 망토를 두르고 몸을 웅크릴 때였다.

    스슥…… 스스슥…….

    ‘뭐지?’

    마틴은 정찰 3조의 은신처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소리를 낼 순 없었다. 마틴의 눈앞으로 재를 묻혀 칼날이 반짝이지 않게 처리한 롱소드가 흔들거렸기 때문이었다.

    ‘뒤! 뒤를 봐라! 뒤!’

    마틴은 애타는 심정으로 소리 없는 외침을 토해 냈다.

    자신의 조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망원경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조원들의 뒤로 롱소드를 거머쥔 세 명의 시커먼 놈들이 고양이처럼 은밀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마틴은 그들의 움직임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도저히 기습 공격을 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츠걱! 처걱!

    소리 없이 다가간 3명의 사내가 능숙한 솜씨로 망원경을 쳐다보는 조원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제길…… 고도로 훈련받은 놈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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