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4화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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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0. 사악한 자식들 (2)

    연달아 두 번의 칼질이 정영석 백작의 롱소드를 두들겼다.

    단지 두들긴 것만이 아니다. 첫 번째 검격에서는 거대한 롱소드의 전진을 멈칫하게 했을 뿐이다. 두 번째 검격에서 잠시 멈칫한 롱소드를 강하게 때리면서 밀어냈다.

    거대한 롱소드가 힘을 잃고 허우적대는 사이에 팽유룡의 몸이 크게 회전했다. 그와 함께 세이버를 따라 마나 쉐도우가 커다란 원을 그렸다.

    혼원벽력도법 이 초식 벽력섬광(霹靂閃光).

    쾌검식의 수법으로 휘둘러진 세이버가 마나 쉐도우를 담은 채 정영석 백작의 뒷목에 닿았다. 정영석 백작이 공격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럴 수가…….”

    정영석 백작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림맹에서 무력으로 따지면 일곱 번째로 강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매년 순위 쟁탈전에 참가해 얻은 순위였기에 속일 수도 없는 일이다. 10위 안에 들어가는 강자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졌다.

    무림맹에서는 전력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 하북팽가 따위의 기사한테 맥없이 졌다. 더 황당한 것은 자신을 이긴 상대와 비슷한 실력 또는 비슷한 직위의 기사가 하북팽가에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정영석 백작은 넋이 빠진 얼굴로 롱소드를 늘어뜨렸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

    팽우룡이 세이버를 거두고 사과의 말을 꺼내면서 뒤로 물러섰지만 정영석 백작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실력만큼은 자신 있다고 믿어 왔는데, 지금 그걸 부정당한 셈이다. 겨우…… 겨우 하북팽가의 기사단장 따위한테 무참하게 박살 날 정도의 실력이었을 뿐이라니…….

    그래서 정영석 백작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목에 힘주고 다녔던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그를 깨운 것은 얄밉도록 아픈 곳을 꼬집는 정천우의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어쩌겠다고? 한 번 더? 계속 그렇게 멍 때릴 거면 가서 짐이나 싸! 그게 우릴 돕는 거다.”

    정천우는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제가……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기가 죽은 정영석 백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북팽가의 기사단장조차 이기지 못하는 실력으로 설쳐 댔으니, 정천우가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하지만 싸우고 싶다!

    정진석 공작은 부모처럼 믿고 따르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런 그의 뼈아픈 배신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무림맹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아니, 이미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전투에 참가해서 정진석 공작에게 어째서 배신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절로 이가 갈리고 눈이 부릅떠졌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정천우가 이제까지와 다르게 비웃음을 담았던 얼굴을 펴고 입을 열었다.

    “우룡 경의 지시에 따르시오. 당신을 누군가의 위에 세우기엔 위험한 상태라는 것만 알아 두시오. 이번 전투를 경험한 뒤에 자신의 역량을 깨우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우룡 경!”

    “네, 맹주님!”

    “진군하면서 정영석 백작에게 육합권과 단약을 주십시오. 휘하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영석 백작님, 절 따라오십시오.”

    팽우룡은 기가 팍 죽은 정영석 백작을 끌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지켜만 보던 샤칼이 정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왜?”

    “요즘 들어 성격이 변하신 것 아닙니까?”

    샤칼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수틀리면 누가 보든지 말든지 폭력을 행사하는 정천우였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성격이 변한 거라면 자신의 안락한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싱거운 자식, 내가 이건데 뭐가 아쉬워서 예전처럼 눈치를 보는데?”

    정천우는 엄지를 세우면서 피식 웃었다.

    여기나 중원이나 다를 게 없었다. 중원의 낭인 시절에도 ‘대형’ 소릴 들으면서 살았던 그다.

    남의 눈치 따윌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자신은 의혈맹의 최고 권력자니까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떠나야 할 몸인 데다가 끗발까지 좋다. 시시콜콜 따지는 것도 귀찮다. 뭐, 기존에 알던 사람들한테 막 대하기는 양심에 걸려서 똑같이 대하고 있긴 했지만.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준비 끝나면 알려 줘. 부맹주님도 좀 쉬세요.”

    “네, 맹주님.”

    주소용 후작은 정영석 백작의 충격적인 패배에 멍해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설마 팽우룡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상승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우스운 건, 그녀 자신도 정영석 백작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변화가 정천우에 의한 것이라는 걸 깨닫자 그를 보는 주소용 후작은 새삼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그러나 정천우는 그녀의 눈빛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성벽의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팽우룡의 싸움에서 느낀 점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혼원벽력도법에도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법이 숨어 있었어!’

    그랬다.

    팽우룡이 정영석 백작의 강력한 내려치기를 받아 내면서 사용한 것은 분명히 이화접목의 수법이었다. 상대의 힘을 분산시키고 오히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고도의 기법.

    그가 본능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작정하고 사용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강맹하기만 한 무공이라고 생각했던 혼원벽력도법의 일월섬전(日月閃電)의 초식을 팽우룡과 같은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직 공격 일변도라고만 생각했던 무공을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극(極)은 극(極)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오직 강맹 일변도의 도법에도 이렇게 유연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법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가부좌를 튼 정천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저, 저기, 주인니임…… 후우…….”

    샤칼은 뭔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천우가 완전히 명상에 돌입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괜히 불렀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의 주변에 보호 마법진을 설치한 샤칼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보면 부럽네. 이렇게나 빨리 깊은 명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샤칼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실제로는 내공심법을 운용하는 것이지만 중원의 무공에 대해 모르는 샤칼은 명상이라고 생각했다. 중원의 무인에게는 기본적인 일이지만 무공이 발달하지 못한 동대륙에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멍하게 있느니 자신도 명상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샤칼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내 뜨악한 얼굴로 눈을 번쩍 떴다.

    고오오오…….

    정천우를 중심으로 마나가 회전을 일으켰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마나가 회전했다.

    “으으음.”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샤칼이 질린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자 주소용 후작이 말을 더듬으면서 궁금증을 드러냈다.

    잠깐 사이에 정천우의 주변에서 회전을 일으키던 마나는 이젠 아예 회오리처럼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샤칼은 주소용 후작의 질문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놀라움에 입을 쩍 벌릴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질 생각인 거지?”

    ***

    거창하게 출정식까지 마친 의혈맹의 군대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출정식에서 보여 준 정천우의 놀라운…… 아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무력에 기사들은 물론 병사들도 이번 전쟁에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성벽 위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냈다. 단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의 기술까지 보여 주었다.

    전에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미숙한 방식의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었다. 훨씬 더 거대하고 화려했으며 완성도 높은 기술을 의혈맹 사람들 앞에 선보였다.

    맹주인 정천우의 능력을 확인한 의혈맹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꼽으라면 정영석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었다.

    의혈맹의 푸대접 속에서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순간의 치욕보다는 정진석 공작의 배신과 정도련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훨씬 더 깊었다. 그래서 꿋꿋하게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정영석 백작은 진군하는 내내 싱글벙글 미소를 달고 살았다. 함께 진군하던 팽우룡이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이르다 뿐인가? 내가 그동안 너무 멍청했다는 걸 깨달았다네.”

    정영석 백작은 팽우룡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궁세가의 영지 성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세상 다 살아 버린 노인처럼 굴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른 반응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주책스럽게 들리겠지만, 오늘 밤이 기대되지 뭐겠나?”

    “음…… 아마도 오늘은 어려울 겁니다.”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정영석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육합권을 배우고 묘한 향기가 나는 약을 먹은 뒤 몸 상태가 달라졌다. 전신에 활력이 돋고, 몸속의 마나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줬다.

    두 번의 야영을 거치면서 그의 실력은 몰라보게 향상되었다. 그것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약을 먹고 난 뒤에는 기사들의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은근히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팽우룡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말을 꺼냈다. 그의 입장에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영석 백작의 모습에 팽우룡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마음을 자신도 안다. 더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검을 쥔 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단약의 효과는 두 번이 한계입니다. 세 번째는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이미 백작님께서도 느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거야…….”

    정영석 백작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도 알고 있다.

    몸속의 불순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순수한 마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지금의 몸 상태다.

    첫날 단약을 먹었을 때는 세상이 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어제 먹었을 때는 첫날과 비교했을 때보다 달라진 느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변화를 거의 느낄 수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반응이 적었으니까.

    “후우…… 내가 욕심이 과했군. 아! 단약을 맹주께서 만들었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백작님.”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정말 대단해!”

    정영석 백작은 대열의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진격하는 정천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거리가 멀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절로 존경심이 일어났다. 이처럼 커다란 선물을 자신과 부하들에게 사심 없이 베풀어 준 넓은 배포에 존경심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비록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

    대열 뒤쪽에서 뒤통수를 근질거리게 하는 눈빛을 받으며, 정천우는 수뇌부 사람들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채로 진군 중이었다.

    의혈맹 수뇌부의 예상처럼 마차를 이용한 진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그래서 수뇌부 사람들의 분위기도 좋았다.

    정도련이 주둔 중인 사천당가의 세력권으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게 무슨 뜻일까요?”

    정천우가 인상을 굳히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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