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3화 (163/200)
  • # 163

    Chapter 40. 사악한 자식들 (1)

    드디어 마교의 잔당인 정도련을 쳐서 동대륙을 통일시키기 위해 의혈맹의 군대가 남궁세가의 영지 성 바깥으로 나가 진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4만이 넘는 대병력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든든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성벽 위.

    의혈맹의 수뇌부 중에서 일부만이 출정식 때문에 올라왔다. 실제로 병력을 이끌 사람을 제외하면 남는 사람이라고는 샤칼과 주소용 후작뿐이었다.

    주소용 후작 역시 아미파의 병력을 이끌어야 했으나, 부맹주의 신분을 겸하고 있기에 성벽 위에서 정천우와 함께 병력의 움직임을 살폈다.

    “병사들이 버텨 줄지 모르겠네요.”

    정천우는 400대의 마차에 올라타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전체 의혈맹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출정식은 저들이 모두 마차에 올라타고, 나머지 병력이 대열을 갖춰야 시작할 수 있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그냥 출발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이번 출정의 목적을 밝히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출정식을 치르는 것이다.

    “세 시간 단위로 교대하면 상당한 시간을 아낄 수 있어요. 전처럼 모든 병력이 행군만 하던 때보다 체력 소모가 현저히 줄어들 거라고 봐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느긋하게 진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요. 굳이 서둘러서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정천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말을 징발하고 마차를 개조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조금 서둘러서 출발했더라면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지난 며칠 동안 말과 마차를 준비하느라 뺑이 친 사람들이 한 노고가 헛것이 된다. 그래서 은근슬쩍 돌려 말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예요. 그러나 진군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엄청나답니다. 수뇌부에서 이렇게 병사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것만 표현해 줘도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요. 게다가 정도련의 병력과 의혈맹의 병력 차이가 크지 않은 만큼 우리 병사들의 체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게 이번 마차 이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으음…… 알겠습니다.”

    딱히 공감되진 않지만 대규모 병력을 이끌었던 주소용 후작이 그렇다고 하니, 정천우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자신도 중원에서 낭인 생활을 할 당시에 윗선에서 뭐라도 챙겨 주면 좋아라 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 맹주님?”

    “네, 하실 얘기가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제 의혈맹에 받아들인 무림맹 패잔병들에 관한 얘기입니다.”

    주소용 후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무림맹 패잔병들을 합류시키는 조건이 문제가 되었다. 정천우가 그들을 하북팽가의 썬더 기사단 휘하에 집어넣은 것이다. 거기에서 반발이 생겨났기에 주소용 후작이 말을 꺼내기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정천우의 얼굴도 덩달아 찌푸려졌다. 패잔병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영석 백작인가 하는 사람이 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터놓고 말씀하세요.”

    “썬더 기사단에 배속된 걸 수치스러워하고 있어요.”

    “싫으면 꺼지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꼭 이번 전투에 참가하겠다고 하니까 문제라는 거죠.”

    “제길…….”

    정천우는 솟구치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하여간 처음에 속 썩이는 인간은 끝까지 속을 썩인다. 애초에 받아 주지 말아야 했는데,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받아 준 게 실수다.

    한숨을 푹 내쉰 정천우는 성벽 끝으로 다가가 기사들이 도열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과연 30여 명의 말을 탄 기사들이 따로 노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빛이 서늘해진 그는 애써 화를 억누르면서 단전에 내공을 가볍게 끌어올렸다.

    “우룡 경!”

    “충! 말씀하십시오, 맹주님!”

    한창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출정식을 준비하던 팽우룡은 정천우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곧바로 군례를 올리면서 성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기 옆에서 멍 때리는 꼴통 새끼 좀 끌고 올라와 주십시오.”

    정천우는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놈 따위는 이름조차 불러 줄 가치가 없다는 태도였다.

    “맹주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알려 주십시오.”

    팽우룡은 그가 누굴 지칭하는 것인지 알지만 일부러 다시 물었다. ‘꼴통 새끼’라는 걸 단박에 알아듣는 자신이 더 우스운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두 사람 다 마나를 담아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라 출정식을 준비하는 병사들과 기사들 전부가 듣고 있었다. ‘꼴통 새끼’라는 게 누굴 가리키는 것인지 자연스레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기 옆에 있는 정영석 백작 말입니다. 올라오기 싫으면 거기서 꼼지락거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맹주님!”

    정천우는 전혀 상대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모든 병사와 기사가 들을 수 있게 일부러 더욱 또박또박 정영석 백작의 이름을 밝혔다.

    팽우룡이 발끈 화를 내는 정영석 백작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천우가 성벽 바깥으로 내민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맹주님, 조금 심하신 건…….”

    “괜찮습니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놈이 껄떡대는 걸 놔두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저런 인간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여러 사람 도와주는 겁니다.”

    주소용 후작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그는 전혀 상대를 배려해 줄 마음이 없다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팽우룡이 정영석 백작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왔다. 정영석 백작은 주눅 든 얼굴이었으나 불만스러운 기색을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정천우는 다짜고짜 상스럽게 욕을 해 댔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격식 따윈 개나 줘 버린 그였기에 정영석 백작은 욕을 먹으면서도 울컥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강자였으니, 힘을 숭상하는 기사의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대접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불러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정영석 백작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무림맹에서 5대 무력 단체 중의 하나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하북팽가의 기사단에…… 그것도 평기사로 소속되는 건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꼬우면 돌아가! 누가 붙잡았어?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정천우가 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싸우게 해 주십시오!”

    “그럼 싸워! 누가 말려?”

    “독립적으로 싸우고 싶습니다.”

    “까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네? 말씀이 좀 지나치…….”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정천우의 모습에 정영석 백작은 찔끔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에 저런 표정을 한 그에게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것이다. 포션을 몇 번이나 마시고서야 구타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도련에게 패퇴하고 의혈맹에 올 때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정영석 백작이었다. 하지만 육체에 각인된 고통의 기억은 절로 몸을 움츠리게 하는 공포를 남겼다.

    “그러니까, 남의 말은 듣기 싫고 너 꼴리는 대로 하겠다? 인마, 뒈지려면 너 혼자 뒈져! 너 같은 인간을 믿고 의지하는 놈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쥐뿔도 안 되는 실력으로 뭐? 독립적으로 싸우고 싶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시, 실력이라면 확실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비록 맹주님께는 형편없이 패배했지만 그건 맹주님이 뛰어난 것이지, 제가 약한 게 아닙니다! 저는 무림맹 무력 서열 7위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진짜 피곤한 놈이네…… 나잇값 좀 하자. 응?”

    정천우는 지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가 제법 나이가 많아 조금은 나이대접을 해 줄 생각도 약간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막무가내다. 대우해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생각이란 걸 하기보다 그저 감정에 따라 행동부터 하려는 부류다.

    ‘또라이한테는 그저 몽둥이가 약이지.’

    속으로 정영석 백작을 욕하면서 정천우가 팽우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룡 경, 이 꼴통 새끼한테 실력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주제 파악 좀 할 수 있게 확실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팽우룡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천우의 표정은 단호했다. 대결을 피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룡 경, 당신의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니 염려하지 말고 마음껏 싸워 주십시오.]

    정천우는 눈에 힘을 주면서 곤란해하는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팽우룡이 전음을 듣고는 흠칫 놀라면서 정영석 백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무림맹 서열 7위.

    한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다.

    무림맹의 정규 전력에서조차 언제나 제외되어 왔던 하북팽가다. 그런 하북팽가에서 기사단장을 하는 자신의 능력은 언제나 논외로 취급되었다.

    그랬는데……

    자신이 정영석 백작을 뛰어넘는 실력을 지녔다고 한다.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맹주인 정천우가 한 얘기다.

    은근히 솟구치는 호승심이 그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맹주님, 실수하시는 겁니다. 제 검은 대련이라고 해서 말랑거리지 않습니다.”

    정영석 백작이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롱소드를 뽑았다.

    수수한 듯한 그의 롱소드는 명장이 만든 것이 분명하다. 검신이 올곧았으며, 푸르스름한 검날은 예기(銳氣)를 가득 품고 있었다.

    “닥치고 일단 한번 붙어 봐! 얘기는 그다음이다. 우룡 경, 준비됐습니까?”

    “예, 맹주님!”

    “그럼 시작!”

    정천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영석 백작이 롱소드를 횡으로 가르면서 돌진해 왔다.

    팽우룡은 긴장한 얼굴로 세이버를 들어 무식한 공격을 방어해 냈다. 역시나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혼원벽력도법이었다.

    채재쟁! 카강!

    정천우가 인정하진 않지만 정영석 백작은 과연 큰소리칠 만한 자격이 있었다.

    비록 끽소리도 못하고 정천우에게 얻어맞았지만 그의 실력은 높이 살 만했다.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긴 해도 검술을 펼치는 자세가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선명하게 타오르는 마나 쉐도우가 그의 마나양을 짐작케 해 주었다. 머리 위로 롱소드를 들어 일도양단의 기세를 내뿜었다.

    부와앙!

    맹렬한 파공음을 동반한 수직 내려치기!

    팽우룡이 이를 질끈 깨물면서 세이버로 올려쳤다.

    쾅! 파직! 파지직!

    힘과 힘의 대결.

    마나 쉐도우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롱소드와 세이버가 듣기 싫은 거북한 소리를 냈다. 두 개의 무기가 X자 형태로 포개지면서 검날을 갉아 댔다.

    “맹주님, 우룡 경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입니다. 곤륜의 검을 버린 자가 어찌하기엔 우룡 경이 하북팽가의 정통 도법으로 이룬 성취가 높습니다.”

    주소용 후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정천우는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기묘묘함과 현묘함을 바탕으로 광명정대하고 웅장한 초식을 선보이는 것이 바로 곤륜의 검법이다. 그런 곤륜의 검의(劍意)를 버리고 강맹함만을 추구한 건 바보짓이다.

    하북팽가의 도법은 애초부터 파괴력으로 승부하는 무공이다. 무리(武理 : 무공이 담은 이치) 자체가 패도적인 무공 앞에서 검의(劍意)를 버리고 파괴력을 추구한 무공 따위가 더 깊은 성취를 이룰 수 없는 이치다.

    지닌바 무공이 엉뚱한 길로 들어섰으니, 본질에 충실한 팽우룡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의 그라면 정영석 백작에게 밀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앗!”

    끼긱…….

    정영석 백작이 마나를 더욱 끌어 올리면서 팽우룡을 밀쳤다.

    검날과 칼날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꽃을 토해 냈다. 정영석 백작이 안간힘을 써서 밀친 덕에 약간의 공간이 생겨났다.

    순간, 그의 롱소드에 마나 쉐도우가 다시 생성되면서 팽우룡의 어깨를 노리고 사선으로 떨어졌다.

    “크아압!”

    팽우룡이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혼원벽력도법의 일 초식인 일월섬전(日月閃電)의 수법으로 공격을 맞받아쳤다.

    카강!

    “어, 어?”

    롱소드가 팽우룡의 세이버에 부딪친 순간, 정영석 백작이 당혹성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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