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2화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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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9. 폭풍전야(暴風前夜) (4)

    정천우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정영석 백작의 결투 요청을 듣고는 성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앗! 매, 맹주님!”

    주소용 후작이 비명을 지르면서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수뇌부 사람들 역시 깜짝 놀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성벽 밖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럴 수가…….”

    “마법? 맹주께서 마법을 익히셨소?”

    정천우가 부유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느린 속도로 하강하는 것을 발견한 수뇌부들이 눈을 부릅떴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서야 중력을 거스르는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원의 무공이라는 개념을 몰랐으니 몸을 가볍게 하는 신법(身法)의 개념을 알 턱이 없었다.

    곁에서 정천우를 지켜봐 오던 사람들조차 놀랄 정도였으니 정영석 백작은 아예 반쯤 넋이 나갔다.

    타닥!

    마침내 정천우가 20미터에 이르는 성벽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다.

    그때까지도 정영석 백작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정천우가 앞에 내려오면서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가 보여 준 믿지 못할 일이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이다.

    마법이었다면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거나 착지할 때 부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천우가 바닥에 내려서면서 보인 동작은 너무나 깔끔했다.

    정천우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정영석 백작의 뺨을 후려쳤다.

    텅!

    “우욱! 무슨 짓이냐!”

    투구 위를 얻어맞았음에도 충격이 대단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은 정영석 백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롱소드를 정천우에게 겨누었다.

    “내가 아까 말했지? 한 번만 더 시끄럽게 떠들면 아가리를 날려 주겠다고.”

    “개소리! 검을 뽑아라!”

    “이거 진짜 개념 없는 새끼네? 그래, 덤벼 봐!”

    정천우가 피식 웃으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정영석 백작은 마나 쉐도우를 롱소드에 덧씌워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천우는 마나 쉐도우를 품은 롱소드를 보고 있음에도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맨손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미친…….”

    정영석 백작은 자신에게 맨손으로 싸우려는 정천우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마나 쉐도우가 깃든 롱소드 앞에서 무기 없이 싸우겠다니, 그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날뛰는 어린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건방진 자식! 후회하지 마라!”

    정영석 백작이 눈을 부라리면서 롱소드를 앞으로 쭉 뻗었다.

    콰직!

    “어! 어? 이, 이게!”

    정영석 백작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마나 쉐도우가 깃든 롱소드의 검날을 상대가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쇠도 가르는 자신의 공격을 맨손으로 잡았음에도 상대의 손이 멀쩡하다는 것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이익!”

    롱소드를 빼내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천우는 사색이 된 채로 롱소드를 빼내려 용을 쓰는 정영석 백작을 향해 롱소드를 쥐지 않은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꽉 깨물어!”

    정천우는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하고는 주먹을 뻗었다.

    쾅!

    “커헉!”

    투구 위에 정천우의 주먹이 꽂히기가 무섭게 정영석 백작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무지막지한 충격으로 인해 롱소에 맺혔던 마나 쉐도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정천우는 롱소드를 빼앗아 한쪽에 집어던졌다.

    “내가 꺼지라고 했어, 안 했어? 왜 말을 안 들어? 응?”

    쾅, 콰광! 쾅!

    정천우는 정영석 백작의 갑옷의 목 부근에 왼손을 집어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는 오른 주먹으로 투구를 두들겼다.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투구가 그의 주먹에 맞을 때마다 형편없이 구겨졌다. 정영석 백작이 입으로 피를 질질 흘렸지만 정천우에게는 아무런 동정심도 유발하지 못했다.

    “나 몰라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합류우? 선보옹? 이 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쾅, 쾅, 쾅!

    정천우는 상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주먹을 날렸다.

    “너 따위 게 의혈맹에 도움이 될 줄 알았어? 겨우 이따위 실력으로 까불어 댄 거냐? 응?”

    정천우는 상대의 대답 따윈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림맹이 싫다.

    아미파와 하북팽가를 버린 건 무림맹이다. 버림받을 당시에 이놈들도 무림맹에 있었다. 의혈맹이 버려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던 놈들이 뻔뻔하게 찾아왔다.

    잘못했다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것저것 조건을 제시하는 걸 들으니 배알이 꼴려서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었다. 미운 놈이 미운 짓만 한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다.

    “머, 멈춰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무림맹의 기사가 정천우를 향해 롱소드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흥! 지랄하지 마!”

    정천우는 반쯤 정신을 잃은 정영석 백작의 몸을 들어 올려 덤벼드는 기사에게 휘둘렀다.

    “으헉!”

    공격해 오던 무림맹의 기사가 기겁한 얼굴로 롱소드를 급하게 거두어 들였다.

    쾅!

    무기를 거둔 대가는 정영석 백작의 발이었다.

    정천우가 정영석 백작을 무기 삼아 휘두른 탓에 기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뒤이어 정천우의 주먹에 안면을 얻어맞은 기사는 대번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료가 무참하게 쓰러지는 모습에 나머지 무림맹의 기사들도 덤벼들었다. 그러나 정천우를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쓰러지기 바빴다.

    마지막 30번째 기사가 쓰러지자 정천우가 정영석 백작의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쿠억! 비, 빌어먹을…….”

    정영석 백작은 몸을 꿈틀거리면서 정천우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닥쳐! 네놈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너희 놈들은 우릴 버렸어!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받아 달라는 거냐? 네놈들한테 먹일 물도 아깝다. 꺼져라! 정도련 놈들은 우리 의혈맹의 힘만으로도 해치울 수 있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들!”

    정천우가 차갑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성벽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무림맹의 패잔병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천우의 무자비한 폭력보다 그가 남긴 ‘더러운 배신자’라는 말이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을 심어 주었다.

    ***

    무림맹 패잔병들의 사건 이틀 후.

    의혈맹이 머무는 남궁세가는 술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정도련을 치기 위해서 진군하겠다는 수뇌부의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동대륙을 수호하는 정의는 무림맹이 아니라 의혈맹이 되었다. 이제나저제나 정도련과 싸울 날을 기다렸던 의혈맹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사천성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며칠 걸립니까?”

    “모든 병력을 마차로 이동시킬 예정이기에 넉넉하게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팽선웅 백작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맹주님.”

    팽선웅 백작은 겸손하게 대답하면서도 흐뭇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껏 남궁세가에서 대기한 이유가 바로 말과 마차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마차는 최대한 많은 병사가 탈 수 있도록 개조했다. 무려 4만 명이 넘는 대병력을 이동해야 하기에 마차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남궁세가의 성문 앞이 대형 마차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인근 영지까지 탈탈 털어 바퀴가 달린 것들을 끌어모아 만들었다.

    무려 400대가 넘는 대형 마차다. 그 마차를 끌기 위한 말 또한 엄청난 숫자였다.

    겨우 며칠 만에 이만한 물량을 맞춘 팽선웅 백작의 능력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모두 빡빡한 일정에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전투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후회 없는 전투가 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천우는 수뇌부 사람들을 치하했다.

    이제 정도련과 벌이게 될 마지막 전투만 끝나면 자신은 서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제일 큰 고비를 넘기는 상황이었기에 정천우 역시 기대가 컸다.

    “자! 그럼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늦지 않게 출발합시다.”

    “충!”

    수뇌부 사람들은 일제히 군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 관리하는 병력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인 병력이라고는 샤벨타이거 기사단뿐인 정천우는 여유가 많은 편이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려던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맹주님!”

    “네. 말씀하십시오, 부맹주님.”

    “무림맹 사람들은 어찌할까요?”

    주소용 후작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이틀 전에 정천우에게 개 맞듯이 두들겨 맞았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궁세가의 영지성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아직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겁니까?”

    “복수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저 함께 싸우게만 해 달라고 합니다.”

    “겨우 2천의 병력으로 뭘 하겠다고…….”

    “돌려보낼까요?”

    “발목이나 잡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정천우가 마지못해 한마디 툭 던지고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맹주님, 왜 그렇게 무림맹 사람들을 싫어하시죠?”

    주소용 후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천우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평소에는 감정의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던 그가 무림맹의 일에 대해서는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놀랍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어째서 그토록 적의를 드러내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최소한 무림맹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를 자신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 맞듯이 처맞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한 놈 때문에 2천 명의 목숨이 너무 쉽게 결정되는 게 못마땅한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영석 백작이라고 했던가요? 무림맹에서 제법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무림맹에서 일곱 번째로 영향력이 강했던 사람이에요.”

    주소용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천우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우리가 버려졌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사실 배신자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거야 짜증 나서 해 본 얘기일 뿐입니다.”

    “왜 화가 나셨는지 그게 궁금해요.”

    “무림맹의 병사들 표정 보셨습니까? 다들 전의를 상실했어요. 엄청난 병력이 눈앞에서 떼죽음을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 정영석 백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선봉에 세워 달라고…… 음…….”

    주소용 후작은 왜 정천우가 화를 냈는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똥오줌 못 가리고 설쳐 대는 윗대가리 몇 놈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합니다. 그런 인간을 무력이 조금 강하다는 이유로 지휘관으로 앉힐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정천우의 생각을 확실히 알게 된 주소용 후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사람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물론 정천우로서는 중원에서 소모품으로 취급받던 낭인 시절이 떠올라 분노한 것이지만, 주소용 후작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나저나 정도련이 너무 조용하니까 이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상하게 너무 움직임이 없어요. 뭔가 노리는 게 있을 텐데 말이죠.”

    “첩보조가 보내온 새로운 소식은 없습니까?”

    “이렇다 할 만한 소식은 없어요. 새로운 소식이 있다고 한다면 사천당가의 영지민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식 정도겠네요.”

    “영지민을 죽여요? 몽땅?”

    “네, 아무래도 장기전을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주소용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도련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치를 떨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영지민이 먹을 식량조차 아껴서 수성에 치중하겠다는 의미다.

    “이번 전쟁, 반드시 이겨야겠습니다.”

    “네, 맹주님!”

    정천우와 주소용 후작은 굳은 얼굴로 눈을 맞췄다.

    의혈맹은 그렇게 정도련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밤이 찾아오면서 의혈맹이 주둔한 남궁세가의 영주성은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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