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58화 (158/200)
  • # 158

    Chapter 38. 아는 만큼 보인다 (5)

    ‘제기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슴을 관통당하고도 죽지 않아?’

    정천우는 땅바닥에 꽂았던 역천검을 집으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핏자국이 없어?”

    정천우는 역천검의 검날을 살펴보고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분명히 찰리 단장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런데 핏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은 상식을 거부했다.

    “분명…… 분명히…….”

    역천검의 깨끗한 검날과 찰리 단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정천우는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건?’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찰리 단장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정천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갑옷.

    시커먼 연기로 이루어진 마족 형상이 갑옷 위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정천우의 눈에 들어왔다.

    동대륙에 넘어와서 그의 머리를 가장 복잡하게 했던 것은 바로 마법이라는 괴상한 힘이다.

    중원의 상식으론 불가능한 일들이 이쪽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진다. 지금의 상황도 마법의 힘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정천우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다시금 힘껏 움켜쥐었다.

    상대는 자신이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찰리 단장은 의혈맹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부하들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한눈을 판 틈을 타고서 정천우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비겁하네 마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공을 담아 차고 나가는 그의 몸은 쏜살같이 그에게 접근했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의 오 초식 탈혼벽(脫魂霹)을 사용해 상대의 사각을 노렸다.

    “흥! 어림없는 수작!”

    찰리 단장은 정천우가 땅을 박차는 소리에 반응해 할베르트를 들어 풍차처럼 휘둘렀다.

    정천우가 좌우로 움직여 잔상을 만들었지만, 역혈대법을 중첩 사용하면서 찰리 단장의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순간의 빈틈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완전하진 않았다.

    그러나 완벽한 공격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고 투덜거릴 틈이 없었다. 틈이 없다면 만들어 내야 한다.

    내공을 담은 왼발이 땅거죽을 밀어내면서 고속으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정천우의 팔 근육이 부풀었다.

    콰앙!

    역천검이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채 맹렬하게 회전하는 할베르트를 쳐올렸다.

    “큭!”

    수없이 반복한 수련을 바탕으로 휘두르는 역천검은 찰리 단장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을 담고 있었다.

    회전하던 할베르트가 튕겨 나가려는 것을 겨우 잡아챈 찰리 단장은 무기로 공격하기엔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른발을 뻗었다.

    갑옷으로 보호되는 그의 오른발에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뿔이 장착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금속 뿔에도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바웅!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키며 사타구니를 노리는 상대의 발목을 정천우가 왼발을 들어 발바닥으로 걷어찼다.

    “제길!”

    정천우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목을 노리려고 했는데, 허우적거리는 상대의 팔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품은 할베르트가 투구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다.

    목표 지점이 가로막혔다고 허둥거릴 시간이 없었다. 두 손으로 움켜쥔 역천검을 그대로 쭉 밀었다. 머리를 공격할 수 없으니 가장 면적이 넓고 크게 빈틈을 보이는 옆구리를 공격했다.

    파욱!

    역천검이 스며들듯 찰리 단장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손에 이렇다 할 만한 감각이 남지 않았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정천우가 눈을 크게 뜨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상대의 몸속에 역천검을 박아 넣었음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대신에 상대의 갑옷에 깃든 마족의 형상이 괴로워하면서 꿈틀댔다.

    바우웅!

    “썅! 뭐가 이래!”

    정천우는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할베르트를 피해 지면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몸을 빼기가 무섭게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할베르트가 땅거죽을 흉측하게 파헤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험한 꼴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무너진 자세를 순식간에 회복한 정천우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아까와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역천검의 검날이 깨끗하기만 하다. 상대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의미다. 옆구리에 역천검이 관통했다가 빠져나왔는데도 말이다.

    ‘갑옷에 스며든 마족의 힘이라는 건가?’

    찰리 단장을 노려보면서 정천우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동요하지 않은 척 혼원벽력도법의 기수식을 잡고 있지만 속으로는 난감해하는 중이었다. 치명상이 분명한…… 아니,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대다.

    결국은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머리를 노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머리만큼은 거의 빈틈을 보이지 않는 상대였다. 사기에 가까운 마법을 믿고서 머리만 보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천우가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찰리 단장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걸음을 옮겼다.

    정천우를 향해 반드시 죽이겠다는 적의(敵意)와 살기를 드러내면서 할베르트를 들었다. 온몸을 다 드러내 놓고 오직 할베르트와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쉬고 있을 셈이지? 알겠지만 내가 한가한 몸이 아니라서 말이야.”

    찰리 단장은 고개를 뒤쪽으로 슬쩍 움직이고는 살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의 부하들인 다크 기사단 때문에 한가하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정천우도 동의하는 바였다.

    마교의 기사단은 정천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2천에 이르는 의혈맹의 기사들이 포위하면서 공격하고 있음에도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의혈맹의 기사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었다.

    정천우 역시 시간을 끌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의혈맹의 기사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오오오…….

    상황이 바뀌었다.

    이성적인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한가하게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을 틈이 없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자기가 살아야 다른 사람의 생존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단전에 쌓인 내공을 남김없이 모두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기파에 주변 공기가 마구 날뛰었다. 나중을 생각해 힘을 아낀다는 생각 따윈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만 생각해야 할 때였다.

    역천검을 굳게 잡은 정천우가 혼원벽력도법의 기수식을 잡고는 자세를 한껏 낮췄다.

    파직! 파지직!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정천우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내공의 방출에 다가오던 찰리 단장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전혀 겁을 먹지는 않았다.

    “킥!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찰리 단장은 할베르트를 수평으로 쥐고서 정천우를 향해 겨누었다.

    할베르트에 맺힌 회색빛 오러 블레이드가 더욱 짙어졌다. 그 역시 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싸움에 집중하겠다는 태도였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악의적인 감정이 뒤엉켰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두 사람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을 초월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살기를 담은 두 사람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판이었다.

    “……그런가?”

    “확실히, 오래 끌 일은 아니지.”

    정천우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묻자 찰리 단장이 마주 웃었다.

    교감(交感).

    웃기는 일이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적과 생각이 일치하는 일이 벌어지다니, 두 사람은 스스로도 기가 막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각오해.”

    “동대륙 놈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마교의 기사들은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지.”

    냉랭하게 경고성을 내뱉는 정천우와 달리 찰리 단장은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으스스한 미소를 짓던 두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져 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여 미터.

    공간 자체가 몸살을 앓았다. 마스터급의 기사 둘이 뿜어 대는 살기와 투기는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술 듯 파괴적이었다.

    정천우와 찰리 단장의 손아귀에 쥔 무기에 경련을 일으키며 오러 블레이드가 마구 날뛰었다.

    ‘쉽지 않아!’

    정천우는 검 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불리한 싸움이다. 머리를 제외하고는 타격을 받지 않는 상대에 비해 자신은 그런 이점이 없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싸움.

    드득!

    한껏 자세를 낮춘 정천우가 뒷발…… 그러니까 오른발에 내공을 밀어 넣으면서 힘을 주었다.

    지그시 눌러 밟은 발바닥에 땅거죽이 압축되면서 단단해졌다. 내딛는 발의 발판을 다지는 작업이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기에 상대는 눈치채지 못하고 빈틈만 노리고 있었다.

    “차앗!”

    파박!

    정천우가 지면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아니, 달려 나갔다기보다는 쏘아졌다고 봐야 옳다.

    때를 같이해 찰리 단장도 몸을 날렸다. 살기로 충만한 공간이 순식간에 압축되면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정천우의 역천검이 충만한 살기와 오러 블레이드를 간직한 채 사선을 그렸다. 상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할베르트가 회색빛을 뿌리면서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콰광!

    오러 브레이드가 부서지고, 무기와 무기가 맞닿으면서 두 번의 충돌음이 연달아 터졌다.

    두 사람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둘 모두 고통을 억누르고 재차 무기를 휘둘렀다. 터져 나갔던 오러 블레이드는 어느새 복원되어 각자의 무기를 감쌌다.

    “크아악!”

    “으아압!”

    비명과도 같은 두 사람의 기합과 함께 재차 할베르트와 역천검이 부딪쳤다.

    쾅!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굉음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기파가 흩날렸다.

    끼기긱…….

    무기를 맞댄 두 사람은 힘 대결에 들어갔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흉험한 대결이다. 밀려나는 순간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상대의 무기에 머리가 박살 날 테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안간힘을 쓰면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밀어 댔다. 그러나 엇비슷한 힘과 마나를 가졌는지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비지땀만 쏟아 냈다.

    “……끈질긴 놈! 이제 그만 포기해라!”

    시뻘건 눈으로 정천우를 노려보면서 찰리 단장이 소리쳤다.

    할베르트로 밀어붙이는데도 좀처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초조한 가운데 부하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어 마음이 조급해지는 중이었다.

    “개……소리! 차아!”

    정천우가 욕설을 터트리면서 역천검의 방향을 틀었다.

    밀고 당기는 수법을 사용해 할베르트의 방향을 틀어 버린 것이다.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찰리 단장이 휘청거렸다.

    푸걱!

    빈틈을 노리고 역천검이 찰리 단장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그렇지만 역시나 찰리 단장은 죽지 않았다.

    “큭!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찰리 단장이 자세를 바로 하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자신의 몸에 칼이 박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봤으면서도 또다시 같은 공격을 한 정천우가 미련스러워 보였다.

    “상관없지! 멍청한 네놈의 머리를 원망해라!”

    찰리 단장은 할베르트를 거꾸로 쥐면서 도끼 형태의 창날이 정천우를 향하도록 한 채 두 팔을 힘껏 들었다.

    단번에 정천우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할베르트의 도끼날을 감싼 짙은 회색빛 오러 블레이드가 살벌하게 빛을 발했다.

    으드득!

    “누가 멍청하다는 거냐! 이야압!”

    정천우가 이를 갈아붙이고는 역천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며 소리쳤다.

    왼손으로는 검자루의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밀어 올렸다. 역천검이 갑옷에 박힌 채 위로 움직였다.

    [키에엑! 크롹! 크와아아아……!]

    갑옷 위로 드러난 마족 형상이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이빨로 역천검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연기로 이루어진 마족은 물리력이 없어 방어할 수 없었다.

    “안 돼애!”

    찰리 단장은 갑옷에 깃든 마족이 괴로워하는 것을 깨닫고는 비명을 지르면서 할베르트를 내려찍었다.

    콰득!

    “커헉!”

    할베르트를 내려찍던 찰리 단장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것은 마족 형상의 연기가 갑옷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고통은 근육을 오그라들게 만들고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한 줄기 핏물이 역천검을 타고 흘러나왔다. 찰리 단장은 할베르트를 놓치고 입을 뻐끔거렸다.

    지독한 고통.

    “끄으으으…….”

    찰리 단장은 역천검의 검신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 정천우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무어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진득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가라!”

    정천우가 힘껏 소리치며 역천검을 힘차게 들었다.

    갑옷이 파괴되는 소리와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역천검은 찰리 단장의 가슴에서부터 턱을 지나 투구까지 쪼개면서 빠져나왔다. 찰리 단장은 역천검이 한차례 훑고 지나가자 급격히 생기를 잃으면서 구겨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정천우는 숨을 헐떡이면서 쓰러진 상대를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젠장! 더러워서 마법 공부 좀 해야지! 씨발, 짜증 나서 못살겠네!”

    정천우는 이번 전투가 끝나면 샤칼을 잡아다 앉혀 놓고 마법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았다면 지금처럼 진흙탕 싸움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는 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귀찮고 짜증 나더라도 배우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게 비록 더욱 살인에 능숙해지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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