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53화 (153/200)
  • # 153

    Chapter 37. 마교의 진격 (3)

    ***

    “무림맹이 대패했다고 합니다.”

    “후후후…… 그럴 테지.”

    검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소름 끼치는 눈빛을 발하며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찰리 허스키어 드 에밀럿.

    휘하 기사의 보고를 받으면서 음침한 웃음을 터트린 사내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마교의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다크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단장인 ‘아이작 드 크림슨’이 전사하는 바람에 이제는 그가 다크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정진석 공작은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힘을 과하게 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찰리 단장은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면서 곁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는 부하를 향해 물었다.

    “정도련주가 훨씬 더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무림맹주의 손을 들어주셔서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무림맹주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그리고 무림맹은 성가신 것들이지. 정도련 놈들도 욕심이 많긴 마찬가지였어. 욕심이 많은 놈은 다루기가 쉽지. 먹이로 구슬릴 수 있는 개와 온갖 정성을 다해야 겨우 꼬리 한 번 흔드는 들개, 자네라면 어느 개를 선택하겠나?”

    “음…… 무림맹주가 먹이로 구슬릴 수 있는 개라는 말씀이십니까?”

    “정도련과 무림맹주 둘 다일세. 무림맹 놈들은 우리와 적대적이기도 하고 성가신 놈들이지. 그런 놈들을 한 방에 치워 버릴 수 있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겠나? 먹이가 있는 한 우리 말을 잘 듣는 개를 키우는 게 더 경제적인데 말이야.”

    찰리 단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먹이가 떨어지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훗! 러셀, 자네는 너무 불필요하게 고민이 많아. 그땐 다른 개의 먹이로 주면 그만이지. 그건 그렇고, 작업은 확실하게 해 놓았겠지?”

    찰리 단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시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얘기하자는 의미였다. 그 뜻을 헤아린 러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치우는 일만 남았군. 이거 기대되는데? 놈의 실력이 대단하다지?”

    찰리 단장은 눈에 이채를 띠면서 허리춤에 달린 메이스를 쓰다듬었다.

    “아이작 단장이 녀석에게 당했다고 하니, 실력은 생각보다 뛰어난 모양입니다.”

    “큭! 아부밖에 할 줄 모르는 그 병신은 진작에 죽었어야 말이 돼. 그동안에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전임 단장이었던 아이작의 얘기가 나오자 찰리 단장은 입가에 한 것 비웃음을 매달고 말했다.

    전부터 아이작 단장과 현재 단장인 찰리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러셀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원래부터 다크 기사단의 단장은 찰리 백작님께서 맡아야 했습니다.”

    “러셀, 아부는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니야. 하지만 듣기는 좋구나.”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러셀은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찰리 단장은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괜찮아. 아무튼 놈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가장 처참한 죽음을 선사할 생각이야.”

    찰리 단장은 혀로 아랫입술을 핥으면서 의혈맹이 위치한 남궁세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가슴 서늘한 살기와 난폭한 투기가 마구 끓어오르고 있었다.

    ***

    의혈맹 임시 사령부로 사용 중인 남궁세가 영주 집무실.

    무거운 얼굴을 한 채 정천우가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교의 군대가 3일 거리에 도착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탓에 정천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의혈맹의 수뇌부가 다 모이자 깍지를 낀 채 턱을 괴었던 정천우가 고개를 들었다.

    “모두 모이셨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영주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집중을 유도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는 것을 확인한 정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급하게 모이시라고 했는지 아실 겁니다. 마교의 군대가 3일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적의 규모는 상당한 편입니다. 기사가 500명에 보병이 2만 명입니다.”

    수뇌부 사람들은 마교 군대의 엄청난 숫자에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비록 의혈맹의 규모가 그들보다 두 배 이상 많다고는 해도 불안감이 생겨났다. 마교의 기사는 동대륙의 기사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기사 전력만 강하게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병사의 전력마저도 동대륙의 병사와 비교하기가 어렵다.

    절대적인 충성심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 이 두 가지 요소만으로도 동대륙의 일반 병사와는 수준이 다른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런 병력 앞에서 숫자의 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맹주님, 이미 작전은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회의를 다시 여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주소용 후작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교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은 이미 논의가 끝났다. 남궁세가의 영지 성을 방패 삼아 최대한 버티면서 적의 병력을 줄이는 것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소극적인 전투를 하는 이유는 무림맹 혹은 정도련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의 대격전을 준비해야 하는 의혈맹이었다. 그러니 마교를 상대함에 있어서 전력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수성전에 치중하기로 했는데, 새삼스럽게 작전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주소용 후작은 물론이고 회의에 참석한 수뇌부들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것은 작전을 변경하기 위해서입니다.”

    “맹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와서 작전을 변경하다니요.”

    “팽선웅 백작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요격에 나서는 편이 의혈맹에 유리합니다.”

    “요격 말입니까? 하지만 어제 회의에서는 요격은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어제 얘기입니다.”

    정천우는 의아한 얼굴의 팽선웅 백작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팽선웅 백작은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서 정천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놀리는 기색은 없었다.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의미였는데, 팽선웅 백작으로서는 그 노림수가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맹주님, 어려우니까 말 돌리지 마시고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성격이 불같은 팽만리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팽선웅 백작 대신에 나섰다.

    “하하하! 역시 만리 경은 여전하십니다.”

    정천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모습에 수뇌부 사람들은 정천우의 움직임에 맞추어 시선을 움직였다.

    “어제 수성전을 하기로 했으나 그것은 우리의 작전이 마교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작전을 변경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 회의한 내용을 마교가 알고 있다는 것은…… 설마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팽만리는 당장에라도 첩자가 눈에 띄면 때려죽일 듯한 기세로 물었다.

    “네, 내부에 첩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말입니다.”

    정천우가 정영호 후작의 뒤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팽만리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영주 집무실 내부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가까이에 첩자가 있다는 말은 수뇌부 중에 첩자가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시선이 정영호 후작에게로 쏠렸다.

    정천우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그의 뒤였다. 아무런 의미 없이 첩자에 관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가 의심하는 게 누군지 눈치챈 것이다.

    정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죽인…… 어억!”

    살기를 풍기면서 정영호 후작이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천우가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를 노려 공격하려던 정영호 후작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 마법에 걸렸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은 정천우가 그의 어깨를 짚으면서 마혈을 봉쇄한 까닭이었지만 정영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공지대사 남작을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았다.”

    “……내가 이용당한 겁니까?”

    뜻밖의 상황에 정영호 후작의 옆자리에 앉았던 공지대사 남작이 핼쑥한 얼굴로 물었다.

    “정영호 후작이 너무 어설펐습니다. 정진석 공작이 통신하는 걸 엿들었다는 것부터가 헛소립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정진석 공작이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당장 여기 계신 분들만 해도 지금 저 문밖에서 경비기사가 딴짓하는 걸 느낄 수 있는데 말입니다.”

    “…….”

    공지대사 남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진석 공작의 경지는 감히 자신과 견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기척을 숨겼다고 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다들 의아해하는 듯하니 직접 증거를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천우가 정영호 후작의 어깨에 얹은 손을 통해 내공을 불어넣었다. 뇌전의 기운을 품은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끄으으으…….”

    정영호 후작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정천우가 흘려 넣은 혼원벽력신공의 기운에 경련을 일으켰다.

    점차 내공의 양을 늘려 나갔다. 그럴수록 정영호 후작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부릅뜬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었고, 피부 위로 혈관이 도드라졌다.

    “끄아아아! 망할 자식! 차라리 죽여라!”

    정천우가 내공을 더욱 증가시키자 정영호 후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수뇌부 사람들의 눈이 차가워졌다.

    만약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쓴 거라면 뭐라도 변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에 욕설을 내뱉었다. 첩자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우둑, 우두둑!

    고통에 괴로워하던 정영호 후작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자 수뇌부 사람들의 차갑게 가라앉았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마공!”

    “저건 마족의 얼굴이야!”

    “몸에 마족을 받아들였어! 더러운 마교의 개!”

    수뇌부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저주의 말을 내던지면서 분노했다.

    특히나 정영호 후작의 곁에 앉았던 공지대사 남작은 징그러운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영호 후작은 계속 변화를 일으켰다. 이마 양쪽에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뿔이 튀어나오고, 눈이 찢어져 올라가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났다. 전형적인 마족의 형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크아악!”

    정영호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정천우는 그가 마족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숙주의 몸이 위기에 처한 것을 감지한 마족이 마나를 뿜으면서 정천우의 혼원벽력신공에 저항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내공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마족의 마나를 휘감은 혼원벽력신공이 정천우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그 뒤를 따라 마족이 뿜어낸 마나가 정천우의 몸속으로 딸려 왔다.

    이미 더 이상의 내공을 담을 수 없는 수준이 된 정천우의 단전은 정영호 후작의 마나를 정제하는 동시에 공기 중으로 흩어 버렸다. 과포화 상태의 단전에 담아 둘 수 없어서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이었다.

    “커헉! 컥, 컥…….”

    마나를 빼앗기면서 마족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숙주인 정영호 후작의 몸이 제압당한 상태라 마족의 발버둥은 그저 몇 차례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정영호 후작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정천우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영호 후작은 어제 회의한 내용을 마교 놈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샤칼이 모두 확인한 상태입니다. 연락을 전달한 마법사는 물론 처리했습니다.”

    정천우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의미다.

    “기사단에 알려 내일 아침 출정을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의혈맹 기사단의 힘으로 마교의 군대를 섬멸할 것입니다.”

    굳은 얼굴로 필승을 다짐하는 정천우에게 영주 집무실에 모인 수뇌부 사람들은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정영호 후작이 마교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그의 철두철미함이 믿음직스러웠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마교가 남궁세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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