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51화 (151/200)
  • # 151

    Chapter 37. 마교의 진격 (1)

    “맹주님, 이래선 결말이 나지 않을 듯합니다.”

    무림맹 서열 2위인 주지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주지린은 원래 아미파의 사람이었으나 실력을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 무림맹에 들어온 인물이다. 하지만 아미파가 무림맹에서 버려졌음을 알면서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남자가 기를 펼 수 없는 아미파보다는 무림맹에서의 생활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사천당가의 성문 앞에서 벌어지는 난전을 가리키며 맹주인 정진석 공작에게 의견을 묻는 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전쟁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개싸움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도련에서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 역시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상황만 지켜보는 중이다.

    주지린은 그게 못마땅했다. 대기 중인 기사단과 병사들을 투입하면 정도련의 병력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좁은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 정도련과 달리, 무림맹은 탁 트인 곳에 병력이 집결해 있다. 정도련보다 먼저 병력을 투입한다면 기동성이 높은 무림맹이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쟁을 주관하는 정진석 공작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토록 의욕적으로 이번 전쟁을 주도했으면서 말이다.

    그게 주지린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화끈하게 몰아치면 분명 우세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정진석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명령을 내려 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명령만 내려진다면 곧바로 무림맹의 최정예를 이끌고 아래에서 벌어지는 난전을 빠르게 종식시킬 생각이었다.

    “자네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날 것으로 생각하나?”

    “맹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일세. 오래도록 세력을 키워 온 무림맹과 정도련의 전쟁이야. 우리 무림맹에 비밀 병기가 있듯이 정도련에도 비밀 병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으음…….”

    주지린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정진석 공작의 말을 되새겼다.

    의심스러웠다.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선봉전이다.

    일반적인 공성전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공성 병기를 사용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전면전을 선포하고 서로의 능력을 시험하는 마지막 싸움이다. 전략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들은 애초에 구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도련 역시 마찬가지다.

    순수한 힘의 대결.

    그게 아니라면 무림맹이나 정도련의 기사들은 누가 이기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동대륙 최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기에 힘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골은 더욱 깊어진다.

    그래서 이렇듯 눈치를 보는 거다.

    상대가 먼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보이는 순간 전면전으로 번진다. 둘 중의 하나가 사라지거나 한쪽이 머리를 숙일 때까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마치 선봉으로 나선 이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는 듯한 눈치다. 적당한 시점에서 병력을 물려야 함에도 정진석 공작은 아무런 지시가 없다.

    이상한 것은 정도련 측도 마찬가지다.

    “맹주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어떤 점이 이상하다는 건가?”

    “정도련이 너무 조용합니다. 놈들의 급한 성격대로라면 지금쯤 병력이 투입되거나 후퇴를 해야 하는데, 계속 난전을 유지하는 게 수상합니다. 마치 선봉에 나선 기사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보이나?”

    “네, 맹주님. 지금은 선봉을 물리셔야 할 때입니다.”

    주지린이 정진석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의미 없는 싸움이나 하자고 전면전을 선포한 게 아니다. 오랜 대립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전면전을 선포했다.

    지금처럼 무의미한 소모전을 벌인다면 그냥 같이 죽자는 얘기다. 이런 식의 전투라면 승자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생길 게 분명하다.

    주지린이 악화되어만 가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정진석에게 다시 한 번 후퇴를 건의하려고 할 때였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마나를 담은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정도련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후퇴를 명령한 것이다. 정도련의 선봉은 정도련주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뒤로 물러났다.

    무림맹의 선봉이 여세를 몰아 뒤를 쫓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제껏 꿈쩍도 하지 않던 정진석 공작의 입이 열렸다.

    “무림맹의 선봉은 뒤를 쫓지 마라! 본대에 합류하라!”

    정진석 공작 역시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크게 소리쳤다.

    정도련주의 목소리에 비해 한 치도 밀리지 않는 고함이었다. 마치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내기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선봉으로 나섰던 기사와 병사들은 후퇴하는 정도련의 병사들을 뒤로하고서 본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복귀했다.

    선봉으로 나선 무림맹과 정도련의 피해는 극심했다. 성 앞에는 1만에 가까운 시체가 피 웅덩이를 만들면서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었다.

    선봉으로 나갔던 무림맹 병력은 비통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울분을 억누르면서 되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은 무림맹 본진에서 대기하던 병력의 감정을 건드렸다.

    무림맹 본진의 병사들은 저마다 무기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태세로 명령을 기다렸다.

    불과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무운을 빌어 주며 함께 음식을 먹던 동료들이다.

    복수.

    무림맹에 소속된 기사와 병사들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정도련의 병력이 있을 사천당가의 영지 성을 노려보았다.

    잠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살기는 오히려 더욱 짙어졌다.

    일촉즉발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사천당가 영지 성의 성벽 위로 누군가가 올라섰다. 무림맹의 병력이 모두 볼 수 있게 말이다.

    “나는 정도련주 당청서다! 선봉전을 경험해 봐서 알 것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무림맹과 본 정도련의 힘은 누가 우위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성벽 위에 올라선 당청서 공작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그러자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술렁였다.

    “맹주님, 무슨 속셈으로 저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들은 마교의 전력을 숨겨 두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무림맹 서열 2위인 주지린과 전략 전술을 담당하는 팽만우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각자의 생각을 밝혔다.

    “일단 놈의 얘기를 들어 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진 않을 듯하군.”

    정진석 공작은 수뇌부들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사천당가의 영지 성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그의 태도에 수뇌부 사람들은 불만스러워도 일단은 정진석 공작의 말을 따랐다. 어차피 무시당할 바에야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체면을 덜 구기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정진석 공작이 고개를 돌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도련주 당청서 공작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도련 역시 비장의 카드쯤은 가졌다. 하지만 선봉대의 전투에서 보았듯이, 총력을 기울이면 어느 쪽도 무사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 정도련은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당청서 공작은 일부러 말을 끊었다.

    자신 혼자 떠들어 봐야 무림맹의 협조가 없다면 하나 마나 한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제안을 들어 보겠다!”

    다행히 정진석 공작은 당청서 공작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영지 성을 향해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것인지 당청서 공작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지금처럼 싸운다면 무의미하게 사람만 죽어 나갈 뿐이다. 무림맹과 정도련의 최고 실력자를 추려 승부를 가르자!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어떤가!”

    “너희는 마교와 손을 잡지 않았는가! 너희가 패한다고 해도 마교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정진석 공작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무림맹의 수뇌부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정도련이 마교와 손을 잡은 사실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승부를 가른다고 해도 비열한 마교 놈들이 결과에 승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질 않았다.

    “마교도는 이미 사천당가를 떠났다. 우리가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정도련이 마교의 하위 단체는 아니다! 나는 동대륙의 후예다! 비록 마교와 손을 잡았지만 동대륙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않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다오!”

    “좋다! 결심이 서거든 말하라!”

    정진석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간을 달라고 하자 당청서 공작은 흔쾌히 그것을 승낙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주님께서 정도련주를 패퇴시킬 수만 있다면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주지린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의 뜻을 밝혔다. 다른 사람들도 주지린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해 주었다.

    정진석 공작은 그런 수뇌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도련주가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오.”

    “만약 그가 제안한 것이 진정으로 사심이 섞이지 않은 거라면 대단히 큰 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도련주는 비열하고 음흉한 인물입니다.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만우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소?”

    정진석 공작은 팽만우를 바라보며 조언을 구했다.

    적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로는 최강자만 추려 대결을 통해 전쟁의 승자를 가리자고 했다. 그러나 이제껏 보여 주었던 정도련주의 행동으로 볼 때, 지켜지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팽만우는 눈을 빛내며 정진석 공작을 바라보았다.

    정진석 공작을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은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팽만우를 보았다. 전략과 전술을 담당하는 팽만우가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할 때는 항상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우 경, 기탄없이 얘기해 보시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의견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맹주님의 전폭적인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우선 마교의 인물이 사천당가에 존재하는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거요?”

    정진석 공작은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 물었다.

    사실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 바로 그거였다. 마교의 병력을 숨겨 두고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으로 승부를 결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방법은 있습니다. 무림맹과 정도련의 병력이 모두 성 앞에 집결하는 겁니다. 그것은 일반 영지민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성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빼낸 다음에 ‘뷰 마나 포스’ 마법으로 성 내부를 검사하는 겁니다.”

    “오, 오! 그거 괜찮은 생각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정도련이 승부에 불복한다고 해도 곧바로 총력전을 벌이면 되겠군요!”

    얘기를 듣던 주지린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감탄했다는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아예 처음부터 총력전을 펼칠 생각으로 병력을 배치한 뒤에 최강자끼리 승부를 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승부의 결과를 인정한다면 인정하는 대로 병력을 수습해 무기를 거두면 된다. 만약 승부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곧바로 총력을 다해 싸우면 그만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이상 좋은 생각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수뇌부도 팽만우의 생각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지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만우 경, 역시 그대의 생각은 기가 막히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오?”

    정진석 공작은 팽만우를 칭찬하면서 수뇌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팽만우가 제시한 방법 외에 뾰족하게 생각나는 게 없어 입을 다무는 것이다.

    잠시 다른 의견이 나오길 기다리던 정진석 공작은 한차례 빙긋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만우 경이 제시한 의견으로 일을 추진하겠소. 반대 의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씀하시길 바라오.”

    정진석 공작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사안이었기에 반대는 없었다. 정진석 공작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몇 걸음 앞으로 나갔다.

    성벽 위에서 오연하게 뒷짐을 진 채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정도련주에게 무림맹의 뜻을 전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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