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50화 (150/200)
  • # 150

    Chapter 36. 분열(分裂) (6)

    ***

    “끄아아아!”

    “흐아아아압!”

    남궁세가의 연무장에선 기사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악을 바락바락 써 대고 있었다.

    “이빨 보이지! 힘이 남아도는 모양인데, 저기 뭐가 보이나!”

    헤이먼은 짤막한 손가락으로 연무장 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병기를 세워 두는 거치대가 나란히 있었다.

    “병기 거치대가 보입니드아! 헉, 헉!”

    악에 받친 기사 하나가 목구멍이 찢어져라 크게 소리쳤다.

    “잘 보았다. 거치대 찍고 선착순 20명! 출발!”

    “으아아아!”

    “젠자아앙!”

    기사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병기 거치대를 향해 뛰었다.

    뛴다기보다는 허우적거린다는 게 훨씬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딴에는 죽어라 달렸다.

    “잘돼 가?”

    “단장님, 오셨습니까? 제법 개기는 맛도 있고 쓸 만합니다.”

    헤이먼은 정천우가 다가오자 군례를 올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었다.

    구경만 하다가 직접 수련기사들을 굴려 보니 괴롭히는 맛이 쏠쏠했다. 누군가를 훈련시킨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맡을 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생길 정도였다.

    “내가 좀 바빠서 맡긴 거니까 딴생각 나지 않게 확실하게 굴려. 조만간 잭슨 녀석이 훈련시킨 놈들도 화산파에서 출발할 테니 비교되지 않게 잘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확실하게 조져 놓을 겁니다.”

    “야, 야! 훈련이야, 훈련! 누가 들으면 그냥 괴롭히는 줄 알겠다.”

    “아! 확실하게 훈련시키겠습니다.”

    헤이먼은 급하게 말을 바꾸면서 입가에 진한 미소를 매달았다.

    정천우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빡세게 굴리라는 의미다. 그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헤이먼이다.

    수련기사들로 이루어진 놈들이라 혼자서도 모조리 상대할 만했다. 지금 헤이먼은 베테랑급 기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해 있는 실력자니까 말이다. 지금 상태에서 약간의 깨달음만 있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꿈은 아니다.

    물론 눈앞의 정천우와 비교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과 같은 신세겠지만.

    “이젠 약 좀 먹여도 될 것 같긴 한데?”

    “에이,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굴러야 약발도 잘 받을 겁니다.”

    “흐음…… 어째 너한테서 마교 놈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정천우는 사악하게 웃는 헤이먼을 향해 피식거리면서 농담을 던졌다.

    “마교 놈들과 싸우려면 놈들보다 더 독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알았다. 적당히 하고 약 나눠 줘라. 대신에 마무리로 확실하게, 알았지? 생각 많은 새끼는 다루기 힘들어져.”

    “흐흐흐…… 염려하지 마십시오. 확실하게 정신 교육 마치겠습니다. 까라면 까는 놈들로 바꿔 놓겠습니다.”

    “좋아, 믿는다!”

    정천우는 살벌한 얼굴로 대답하는 헤이먼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흐흐흐…… 다 뒈졌어!”

    헤이먼이 음흉한 얼굴로 비실거리는 수련기사들을 노려보았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병기 거치대를 지나던 수련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곧바로 들려오는 헤이먼의 살벌한 음성에 수련기사들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이 자식들이 빠져 가지고, 기어 다니지? 선착순 10명! 순위권 밖은 연장 교육이다!”

    “아깐 20명이랬잖습니까아!”

    “꼬우면 네가 교관 해!”

    볼멘소리로 항의하는 수련기사의 말을 헤이먼은 살포시 밟아 주었다.

    ***

    남궁세가의 영주 집무실.

    하북팽가와 아미파의 수뇌부, 그리고 정천우가 주축이 되어 작전 회의가 한창이었다.

    회의를 주관하는 건 정천우였지만 능동적으로 뭔가를 한다기보다 그저 상황을 보고받는 중이다. 수뇌부들이 감당하기에는 사안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주소용 후작이나 팽선웅 백작은 둘 다 영지를 다스려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맹주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팽선웅 백작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정천우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는 심각한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소용 후작이나 팽선웅 백작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무림맹과 정도련은 피 튀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죠?”

    “그래요. 표면적으로는 전면전을 벌이고 있지만, 두 진영의 반대 세력이 주축이 되어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해요. 저들의 싸움이 끝나면 무림맹과 정도련은 휴전을 선포하고 평화협정을 맺을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어요.”

    주소용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정영호 후작이 의혈맹에 합류한 다음에 들은 얘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믿고 따르던 정진석 공작의 더러운 야욕이 너무나 역겨웠다.

    “좋습니다. 그럼 남궁세가로 진격했다는 놈들은 마교의 병력이 확실할 테고요.”

    “맹주님, 확실합니다. 마교 놈들은 애초부터 무림맹과 정도련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림맹과 정도련의 전쟁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사이에 동대륙의 영지를 집어삼킬 목적으로 서대륙에서 넘어온 놈들입니다.”

    “빈집털이를 하겠다는 거군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오히려 놈들을 도와준 셈이 되는 겁니까?”

    정천우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생존을 위해서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마교 놈들을 도와준 셈이 되고 말았다.

    무림맹에 속한 무당파를 흡수했고, 정도련에 속하는 화산파와 남궁세가를 흡수했다. 덕분에 마교 놈들은 번거롭게 일일이 영지를 장악할 필요 없이 의혈맹을 궤멸시키면 다섯 개의 영지를 단번에 먹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정천우의 말처럼 의혈맹은 마교의 일을 도와준 셈이나 마찬가지다.

    “뭐, 됐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패할 경우의 얘기니까요. 이쪽으로 진군한다는 마교의 전력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영호 후작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정천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 주었다.

    그는 무작정 의혈맹을 찾은 것이 아니다. 감시할 인원을 따로 남겨 두고서 의혈맹까지 왔다. 현재 회의에서 거론되는 정보의 대부분은 정영호 후작이 남겨 둔 정찰대에게서 보내진 내용이었다.

    지금 회의실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정영호 후작이었다. 그의 정보에 의해서 모든 계획이 세워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북팽가와 아미파에서도 정보를 모으고 있지만 급하게 조직된 터라 아직은 정보의 품질이 낮았다.

    그래서인지 정영호 후작은 어깨를 활짝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급 정보를 다룬다는 생각에 우쭐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현재 마교의 전력인 다크 기사단 소속의 흑마조, 흑상조, 흑응조가 진격 중입니다. 기사단장인 아이작 드 크림슨은 맹주님께서 처리하셨기 때문에 부단장인 ‘찰리 허스키어 드 에밀럿’ 백작이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기사 300명에 일반 병력은 총 3만 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정영호 후작님, 마교의 기사들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일반 병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주소용 후작은 마교가 일반 병력까지 이끌고 왔다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교의 기사들이야 이제껏 싸우면서 여러 번 보았다. 하나같이 괴기스러운 분위기에 실력 또한 일반 기사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만약 마교의 병사들마저 일반적인 병사들의 실력을 상회한다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다. 마교의 병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기본적으로 마교의 병사들은 강합니다. 마교에는 세 개의 거대 기사단이 존재하는데, 각 기사단마다 3만 명의 일반 병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단일 세력으로는 거의 왕국급의 병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서운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네, 맹주님. 마교의 병사들은 마왕을 섬기기 때문에 지옥이 곧 그들의 안식처라고 믿습니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질러야 자신들이 숭배하는 마왕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쳤군요.”

    정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원의 마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괴랄한 교리(敎理)다.

    그래도 중원의 마교는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는 무인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일반 교도들은 고기를 멀리하고 채소를 먹으면서 순박한 삶을 살아간다. 전투나 살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바로 일반 마교도다.

    그런데 이곳 세상의 마교도는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살인을 많이 할수록 마왕의 사랑을 받는다니…….

    정천우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을 본 정영호 후작은 한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광신도 집단입니다. 마교의 병사들이 무서운 것은 죽음을 겁내지 않고 싸운다는 점도 있지만, 군기가 엄정하여 일반 병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겁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웁니다. 그들에게 항복이란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정영호 후작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마교를 멀리하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마교를 섬기는 무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들과 싸우기 위해선 단 하나의 선택밖에 없다.

    상대의 궤멸.

    마교도에게는 죽음 아니면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정말 무지막지한 놈들이군요.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라고 보십니까?”

    “대략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 거라는 정보입니다.”

    “일주일…… 하는 수 없죠. 일단 의혈맹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천우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수뇌부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도 없이 전쟁에 대비하자는 말로 끝내기에는 불안하기만 한 수뇌부였다.

    특히 하북팽가의 팽선웅 백작은 불안감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자신의 병력이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맹주님, 구체적인 작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작전 없이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팽선웅 백작님, 회의가 끝난 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작전을 짜야 합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저 혼자서 결정할 사안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충분한 승산이 있습니다.”

    “승산이라고 하시면 어떤…….”

    “우리에겐 아미파의 기사 570명과 하북팽가의 기사 500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합류한 정영호 후작님의 기사 70명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산파에서 300명의 수련기사가 훈련을 마치고 잭슨 경의 인솔하에 북상 중이고, 남궁세가에서는 헤이먼 부단장이 200명의 수련기사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병사 또한 밀리지 않습니다. 이번에 합류한 병사까지 더하면 5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입니다. 불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교의 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의혈맹의 전력이 한 수 위였다. 불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팽선웅 백작이 불안해하는 게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련기사들은 당장 전력으로 투입하기엔 무리가 있는 병력입니다.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사는 일반 병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팽선웅 백작은 고개를 흔들면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팽선웅 백작님,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항복하시겠습니까?”

    “항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하북팽가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항복 따윈 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싸울 겁니다. 의혈맹은 싸워서 이길 겁니다. 수련기사가 실전 경험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이번에 선봉에 세우십시오.”

    “네? 하지만 힘들게 가르쳐서 전력으로 만든 병력을 어찌…….”

    “사람은 쓰기 위해서 가르치는 겁니다. 언제까지 애지중지 숨겨만 둘 셈입니까?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번 싸움에서 지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주력 기사들이 먼저 지쳐서 허우적거리면 그때 가서 수련기사들을 투입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정천우가 따지듯이 말하자 팽선웅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적의 힘을 빼 놓고 강력한 전력으로 일거에 휩쓸어 버리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비록 비인간적인 냄새가 풍기지만 말이다.

    “의혈맹의 전투는 마교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무림맹과 정도련입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맹주님.”

    팽선웅 백작은 약한 소리만 해 댔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덜컹!

    팽선웅 백작의 부끄러움을 덜어 주려 했는지, 영주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팽만리가 안으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무례한 태도를 꾸짖으려고 주소용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팽만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림맹과 정도련이 전면전을 벌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응? 그건 이미 아는 사실이 아니오?”

    정천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림맹과 정도련의 전투가 형식적이라는 걸 다 아는 마당에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팽만리는 수뇌부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정진석 공작의 정체가 드러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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