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49화 (149/200)
  • # 149

    Chapter 36. 분열(分裂) (5)

    정천우의 손짓에 따라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말에서 내려 성문에 다가왔다.

    “천우 경, 오랜만이오.”

    “섭섭하다, 천우.”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각각 한마디씩 하면서 허리를 숙여 성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정천우는 두 사람에게 어색한 미소만 지어 줄 뿐, 이렇다 할 대꾸는 해 주지 않았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철살문까지 통과하자 병사들이 두 개의 문을 닫았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을 기다리는 것은 샤칼이었다. 그는 이미 마나를 활성화한 채로 두 사람에게 ‘마나의 맹세’를 사용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철저하시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겨우 말 한 마디를 믿고 미래를 걸기엔 어깨에 짊어진 게 너무 많지 않습니까?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무림맹에 이 많은 인원을 이끌고 받아 달라고 했다면 믿어 주실 겁니까?”

    “으음…….”

    정영호 후작은 정천우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정천우가 속한 의혈맹은 무림맹에게 한 번 버림받았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대병력을 이끌고 올라와 합류하겠다고 한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무림맹 소속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의혈맹에 합류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가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내 생각이 짧았소. 어서 ‘마나의 맹세’를 걸어 주시오. 나와 공지대사 남작의 진심을 알려 주겠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칼!”

    “예, 주인님.”

    “시작하자.”

    “조건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조건?”

    “예, 단순히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는 것으로 조건으로 할지, 그게 아니면 아예 저와 같은 부하로서 걸어야 하는지…….”

    샤칼은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를 둘러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예 부하가 되는 것은 없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정천우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묻는 말에 진실을 대답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알겠습니다. 그럼…… ЙПбДЭЖФ…… 그대들의 마나를 담보로 정천우 주인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 것을 요청하노라! 만약 거짓을 말한다면 마나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맹세의 유지 시간은 30분 혹은 정천우 주인님이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그대들은 이 ‘마나의 맹세’를 인정하는가?”

    “인정합니다.”

    “인정합니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나의 맹세’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샤칼의 손에 맺힌 마나가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의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더니 정천우와 연결되었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마나의 맹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대들은 왜 우리 의혈맹에 들어오려고 하지?”

    “무림맹은 썩었소.”

    “정진석 공작은 위선자다!”

    정천우의 질문이 나오기가 무섭게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이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답이 빨리 나온 것은 좋지만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니 듣기가 거북했다. 정천우는 정영호 후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영호 후작, 당신만 대답해 주시오. 공지대사 남작, 그대는 정영호 후작의 대답이 이상하다 생각할 경우에만 내게 말해 주면 돼.”

    “알겠소.”

    “그렇게 하겠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왜 정진석 공작을 배신한 것이오?”

    “배신이 아니오. 정진석 공작은 변했소. 그는 예전에 알던 정진석 공작이 아니외다. 그는 명예욕과 권력에 물들어 눈이 멀었소.”

    “정영호 후작, 그게 당신이 배신할 이유가 되오?”

    “거듭 말하지만, 배신이 아니오. 무림맹은 동대륙의 영지가 모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모인 단체요. 하지만 그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무림맹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소.”

    “그렇다면 굳이 그대가 우리 의혈맹에 가담할 이유는 없지 않소?”

    “아니오. 나는 맹세했다오. 반드시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지금 정진석 공작은 무림맹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 동대륙을 무력으로 통일할 야욕을 가지고 있소.”

    정영호 후작은 분노한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핏물이 살짝 내비칠 정도였다.

    하지만 정천우에게는 감흥 없는 일이었다.

    대의(代議)니 명분(名分)이니 하는 것들은 그의 관심 밖이다. 그따위 것들은 나중으로 미뤄도 상관없는 자잘한 일이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영호 후작이 정진석 공작을 배신했어야만 했던 이유다. 그게 아니라면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을 신뢰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대륙의 통일은 힘 있는 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아니오? 그게 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만?”

    “의혈맹도 그런 거요? 대륙 통일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오?”

    “뭐, 그런 거야 내 알 바 아니오. 나는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 정진석 공작이 싫을 뿐이오.”

    “후우…… 천우 경, 당신은 야망도 없는 거요? 고작 그런 이유로 무림맹과 싸울 생각을 한 거라니…….”

    정영호 후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림맹을 견제하겠다고 일어난 조직에 어울리지 않게 명분이 너무나 빈약하다. 거기에 수장이라는 정천우의 인물됨…… 그러니까 그릇이 너무 작다.

    무림맹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정천우는 정영호 후작의 얼굴에서 실망감을 발견하곤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역천검을 뽑았다.

    즈즈즈증!

    “무슨 뜻이오?”

    정영호 후작은 잔뜩 실망한 얼굴로 역천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에 기분이 상해 죽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영호 후작 역시 롱소드를 뽑았다. 상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죽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싸우자는 게 아니오. 난 보다시피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소. 내가 당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정진석 공작을 세상에서 지우는 것이오. 나머지 잘난 명분들은 그대들의 몫이오. 난 동대륙에서 무림맹주 놀이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정천우는 아무런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정영호 후작은 진의(眞意)를 알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정천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천우의 눈에선 아무런 욕심도 야망도 읽을 수 없었다.

    정영호 후작은 슬그머니 롱소드를 검집에 밀어 넣었다. 어차피 싸운다고 해 봐야 마스터급에 이른 정천우를 상대하기엔 어림도 없다는 걸 자신이 더 잘 안다.

    “솔직한 이유를 대시오. 어째서 그대와 그대가 끌고 온 군대가 의혈맹에 합류하려 하는지!”

    “…….”

    정영호 후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에는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렇게나 거짓을 말하고 싶지만, ‘마나의 맹세’가 발동된 지금은 감히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대신 얘기하지.”

    “공지대사 남작!”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지 않습니까.”

    공지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도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최소한 정영호 후작보다는 조금 더 여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

    정영호 후작은 공지대사 남작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자신이 말린다고 해 봐야 공지대사 남작이 뜻을 꺾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진석 공작은 변절자에 배신자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천우는 흥미롭다는 듯 호기심을 드러냈다.

    정영호 후작이 어째서 공지대사 남작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마교의 인물이야.”

    “……?”

    정천우는 뜻밖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정진석 공작과 싸워 보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정진석 공작의 무공을 잘 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마나는 분명히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마교의 인물이라니…… 정천우로서는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후우……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내가 지난번에 그와 싸웠을 땐 분명 정상적인 마나였는데?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야?”

    정천우가 의문을 가득 품은 채로 다시 물었다.

    ‘마나의 맹세’로 묶여 있으니 거짓을 말할 순 없다. 그렇다는 것은 이들이 제대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잘못 아는 것이 거짓은 아니니까 말이다.

    “천우 경,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하지만 사실이오. 그가 하는 말을 나와 공지대사 남작이 똑똑히 들었소이다. 마교와 내통하는 통신을 말이오.”

    정영호 후작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정진석 공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음산했던 목소리……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진석 공작의 무력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음…… 그가 마교와 내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소?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정진석 공작은 이미 무림맹주가 아니오? 그가 뭐가 아쉬워서?”

    “이번 정도련과의 전투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려고 하는 것 같소. 그것은 정도련 역시 마찬가지요. 정도련의 반대 세력과 무림맹의 반대 세력을 상잔시켜 동대륙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듯했소. 마교의 그늘 아래에서 말이오.”

    정영호 후작은 침통한 얼굴로 말하고는 힘껏 말아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남은 사람들이 순순히 따를 리가 없을 텐데,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약간은 의심이 풀렸는지 정천우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일단 말은 된다. 정진석 공작이 엉뚱한 짓을 벌이는 게 못마땅해서 정영호 후작이 의혈맹에 합류하고 싶다는 거다. 100% 신뢰하기는 뭣하지만 아예 믿음이 가질 않던 처음보다는 이유라는 게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마교에는 이상한 마법이 있소.”

    “마법?”

    “그들 말로는 섭혼술이라고 하는데 마법사들의 매혹 마법보다 효과가 좋다고 하더군. 나도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오. 아무튼, 그 섭혼술로 나머지 사람들을 인형으로 만들 생각이라고 했소.”

    정영호 후작은 기억을 더듬으면서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다.

    그제야 정천우가 완전하게 정영호를 신뢰할 수 있었다. 자신의 통제하에 넣을 수 없는 존재들은 정도련과의 전쟁을 빌미로 해치우고, 만만한 놈들은 섭혼술로 장악하겠다는 뜻이다.

    정영호와 같은 인물들은 아마도 섭혼술로 처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동대륙의 열악한 마나 제어 능력으로는 섭혼술과 같은 고도의 수법을 사용하기엔 제약 사항이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의심이 가라앉자 호기심이 생겨났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그렇다 쳐도 성 밖에서 대기 중인 기사들과 병사들은 무슨 재주로 끌고 왔는지.

    의심을 푼 정천우는 자연스레 말투도 바꾸었다.

    “밖에 있는 병사들은 어떻게 데려온 겁니까? 저들도 당신들과 뜻을 같이하려는 것 같은데요.”

    “저들은 소림파의 사람이 6천 명, 곤륜파의 인물이 4천 명이라오. 소림파의 공혜대사가 모함을 받아 정진석 공작의 손에 죽었소. 그에 불만을 품고 무림맹에서 떨어져 나온 거요. 곤륜파의 병사들은 내 휘하에 있던 녀석들이라 내 뜻을 따라 준 것에 불과하다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마나의 맹세’에 따른 강제 사항은 그만하는 것으로 합시다. 돌아가셔서 병력을 이끌고 들어오십시오. 의혈맹에 가입한 것을 축하합니다. 성문을 활짝 열어라!”

    정천우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열심히 도르래를 움직여 철살문과 외부의 성문을 활짝 열었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정천우에게 가볍게 군례를 올리고는 병력을 이끌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무림맹의 분열이라…… 이거 재밌게 됐잖아?”

    정천우는 멀어져 가는 정영호 후작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까칠하게 자라난 자신의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