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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48화 (14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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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6. 분열(分裂) (4)

    말을 몰고서 영지성의 500미터 근방까지 다가온 전령 중의 하나가 성벽 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혹시 정천우 경이나 팽선웅 백작이 있소?”

    가슴에 ‘무(武)’를 새긴 전령 기사가 성벽 위에 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답게 그의 목소리에서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기사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나를 왜 찾는 거지?’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팽선웅 백작 역시 고개를 흔들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림맹의 전령이 왜 자신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태도가 확실했다.

    정천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정천우요. 나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오?”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는 전령과 달리 정천우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초절정 고수의 경지에 이른 그는 내공을 조절해 작은 목소리임에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정천우의 목소리를 들은 전령 기사는 손을 뻗어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천우 경! 반갑소! 나요! 나 정영호요!”

    “나 공지대사도 왔소! 거하게 술 한잔 산다는 약속, 오늘 지키시오!”

    정영호 후작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곁에 섰던 또 다른 전령 기사가 투구를 벗으면서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분위기로 보아 싸울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천우는 두 사람을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었다. 1만 명의 병력이 성안으로 들어와 난동을 부린다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무슨 일로 의혈맹을 찾아오신 거요?”

    “의혈맹? 단체의 이름을 의혈맹으로 지은 것이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오! 우리는 의혈맹에 합류하고자 찾아왔소!”

    정영호 후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용건을 밝혔다.

    그의 폭탄 발언에 남궁세가 영지 성 내부 사람들이 술렁였다.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벽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수뇌부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놀란 것은 정천우였다.

    정영호 후작은 정진석 공작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무림맹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비중 있는 자리라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의혈맹에 가담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팽선웅 백작과 주소용 후작을 돌아보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저는 솔직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의문스럽군요. 왜 갑자기 의혈맹에 가입하려는 걸까요?”

    “흐음…… 정영호 후작은 그렇다 치고, 공지대사는 왜 함께 행동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공지대사가 속한 소림파는 무림맹의 주축입니다. 아무래도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은 전령으로 온 기사들의 발언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정천우 역시 정영호 후작이나 공지대사의 얘기가 선뜻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진심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건 좋은 일이야. 우리에게 수작을 부린다는 것은 무림맹이 아직 정도련과 싸우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를 안심시킨 것은 그런 이유였다.

    만약 정도련과 전쟁 중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무림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집단이 정도련에 합류하는 걸 막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의혈맹에 자중지란을 일으켜 전력에 손실을 주려는 이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아직 무림맹과 정도련의 전쟁이 결판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남궁세가의 영지성 앞에 진을 친 병력이 진짜로 의혈맹에 가담하러 온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이다.

    ‘잠깐!’

    “샤칼! 이리 와 봐!”

    정천우는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샤칼의 이름을 불렀다. 부족한 마나를 모두 보충하고서 대기하던 샤칼은 그의 부름에 신속하게 달려와 곁에 섰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저 인간들이 사기 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지?”

    “그거야 ‘마나의 맹세’를 시키면 되기야 하겠지만…….”

    샤칼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정천우는 그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하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을 포함한 수뇌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쳐다보기만 한 것이라면 정천우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표정이 문제였다. 마치 ‘어떻게 그렇게 사악한 짓을?’이라는 표정이었다.

    “왜? 뭐가 문제 있어?”

    “기사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왜?”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말을 상대가 믿지 못한다는 걸 모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방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그 역시 고지식한 기사들을 수없이 보아 왔던 터라,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 기사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게 떠오른 것이다.

    “그런 겁니까?”

    정천우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팽선웅 백작에게 물었다.

    “기사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건 기사의 긍지이자 명예입니다.”

    “진심을 부정당하면 모욕이다…… 뭐 그런 얘기입니까?”

    “맞습니다. 기사의 진심은 숭고한 것입니다.”

    “만약 진심을 의심한다면요?”

    “결투를 벌여서라도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밝히는 겁니다.”

    팽선웅 백작은 얼굴을 붉히면서 정천우의 말을 받았다. 마치 자신이 의심받은 것처럼 주먹까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말은 그럴듯한데, 결국은 힘 있는 놈이 곧 진실한 놈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뭐…….”

    팽선웅 백작은 한쪽 눈을 찌푸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따지고 보니 말이 정천우의 말이 맞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힘 있는 놈이 장땡인 것이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 차례 헛웃음을 날린 정천우가 다시 성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영호 후작, 공지대사 남작! 나는 그대들의 말을 믿을 수 없소! 그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나의 맹세’를 통해 진위 여부를 판별하고 싶소!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참고로 나는 결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즈즈즈증!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는 목소리와 분위기로만 보아선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박이었고 지독한 모욕이었다.

    한마디로 ‘난 네놈들을 믿을 수 없으니 증명하든지 꺼지든지 해!’라는 것과 같았다.

    정천우가 오러 블레이드를 발휘하는 모습에 성 밖에 진을 친 사람과 전령으로 나온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감탄성을 흘렸다.

    그러나 정천우가 한 말은 전령으로 나선 두 기사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다. 감탄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요?”

    “천우 경, 그렇게 안 봤는데 참으로 편협하고 졸렬하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이 얼굴을 붉히면서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의혈맹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이 누군가!

    정영호 후작은 무림맹의 무력 서열 50위 안에 드는 강자에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공지대사 남작은 소림파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망 높은 인물 중의 하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모욕을 주고 있으니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천우는 한마디가 천금 같은 두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는 중이다. 성 밖에 진을 친 사람이나 성 안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떤 욕을 해도 좋소! 그러나 만에 하나 그대들이 의혈맹에 해를 주고자 온 거라면 난 차라리 욕 한 번 먹고 말겠소.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오. ‘마나의 맹세’를 통해 진위 여부를 가리든 돌아가든 싸우든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 의혈맹은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소!”

    정천우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얼굴로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정천우의 태도에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을 의심받는 건 기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생각 같아선 당장 결투를 신청하겠지만, 오러 블레이드를 눈으로 목격한 이상 덤벼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일 듯하네.”

    “정영호 후작께서는 천우 경의 무례한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말씀이십니까?”

    “달리 방법이 없질 않은가. 우리의 신뢰가 의심받는다는 건 나 역시 자존심 상한다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게. 자존심을 굽히는 건 작은 일이지만, 대의를 따르는 건 큰일이라네.”

    “그거야…….”

    공지대사 남작은 정영호 후작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기분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정천우와 대결에서 처참하게 깨졌지만 마지막에는 사내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사나이들만의 끈끈한 교감이 통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영호 후작의 말처럼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되돌리기엔 너무나 멀리 왔다. 의혈맹의 합류가 거부된다면 갈 곳이 없어진다.

    “잘 생각했네.”

    정영호 후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공지대사 남작을 향해 한차례 씁쓸한 웃어 주고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쳐다보았다.

    정영호 후작 역시 자신이 부정당했다는 것에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천우 경! 그대의 요청에 따르겠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오?”

    정천우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정영호 후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깟 것들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틸 수는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그대로 전쟁이었으니까 말이다.

    단순히 버티는 것만이라면 무림맹의 대군이 몰려와도 영지성에 의지해 싸울 수 있다. 비록 버겁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정천우는 아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마법사와 함께 내려갈 테니 안으로 들어오시오. 만약 허튼 짓을 한다면 바로 전투에 돌입할 거요.”

    정천우는 한차례 으름장을 내던지고는 샤칼에게 턱짓을 했다. 내려가자는 의미였다.

    “계단으로 가겠습니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네? 우와악!”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샤칼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정천우가 샤칼을 옆구리에 끼고서 성 밑으로 몸을 날린 탓이다.

    영지성의 돌바닥이 빠르게 접근하는 모습에 샤칼은 주문을 외울 틈도 없었다.

    타닥!

    “으으으…….”

    “자식이 왜 이렇게 간뎅이가 작아? 병사들은 성문을 열어라! 그리고 신속하게 닫을 수 있도록 대기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맹주님!”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정천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르래를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차단하는 형식의 성문이었다.

    열 명의 병사가 철살문을 먼저 1미터가량 열고 외벽의 두꺼운 성문 또한 1미터가량 열었다.

    정천우는 허리를 숙여 철살문을 지나 외벽의 성문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정영호 후작과 공지대사 남작에게 손짓했다.

    “들어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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