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47화 (14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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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6. 분열(分裂) (3)

    “……제길!”

    막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려던 정천우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비상 종소리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천우가 막 뒤로 물러나려는데 제인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우웁! 음…….”

    정천우는 당혹성을 흐렸다가 이내 안도하는 듯한 신음을 흘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촉촉하고도 부드러운 제인의 입술 감촉과 향기로우면서도 뜨거운 그녀의 키스에 긴장이 쫙 풀렸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비상 종소리는 그를 전혀 긴장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결과 정천우마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제인.”

    “……조금 늦으면 어때요?”

    제인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툭 던지고는 부끄러운지 몸을 돌려 플라이 마법까지 사용해 날아갔다.

    “많이 창피했나 보네. 큭! 귀여워.”

    정천우는 날아가는 제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비상 종소리가 더욱 급박해지는 것을 깨닫고는 내공을 끌어올려서 경공을 발휘했다.

    감미로운 키스의 여운을 떨쳐 낸 정천우는 경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순식간에 성벽 밑에 다다랐다. 그러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성벽을 디디며 곧장 성벽 위에까지 달렸다.

    성벽 위에 도착한 정천우는 병사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내공을 눈에 집중했다. 병사들이 왜 비상종을 울렸는지 직접 확인하는 편이 더 나았다.

    과연 병사들이 놀라서 종을 칠 만도 했다.

    대략 5킬로미터 전방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은 사천당문의 영지가 존재하는 방향으로 정도련 소속이다.

    내공을 집중해 더 자세히 살피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고 자욱한 먼지 때문에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피어오르는 먼지에 비해 적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많아 봐야 만 명은 넘지 않을 게 확실했다.

    타다다닥! 타다닥!

    정천우가 성벽 위에 올라와 적군을 살피는 사이,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을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샤벨타이거 기사단 소속의 헤이먼과 샤칼도 섞여 있었다.

    아마도 수뇌부 이하는 기사들과 병사를 끌어모으느라 남궁세가의 영지성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제부터 축제였기에 의혈맹 소속 기사들과 병사들도 축제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술을 적당히 조절하라고 명령을 내려 두긴 했지만 그게 잘 지켜졌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래저래 참 공교로운 시점에서 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주소용 후작은 성벽에 올라와 정천우를 발견하자마자 곁으로 달려왔다.

    “맹주님, 상황이 어떠한지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적의 수는 만을 넘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 병사들이 축제 때문에 풀어져 있을 테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할 듯합니다.”

    정천우는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의혈맹의 병사들이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되길 기다려야 할 판이다. 생각 같아선 기사들만이라도 끌고 나가 요격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기사들 역시 잦은 전투와 행군에 지쳐 축제를 즐겼을 확률이 높다.

    정천우와 수뇌부가 성벽 위에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동안에 성 안쪽에서는 병사들이 복장을 갖추고 대열에 합류하는 중이었다.

    오바이트를 찍찍 해 대면서 달려오는 놈, 술에 취해 어기적거리면서 창대에 의지해 걸어오는 놈 등.

    그나마 기사들은 좀 나았다. 기본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날려 버린 뒤 말을 타고 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상 컨디션일 리가 없으니 요격에 나선다는 건 말 같지도 않은 얘기다.

    병사들은 술에서 깨지 않았으면서도 각자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농성용 병기인 캐터펄트와 기름, 그리고 투척용 돌을 산더미처럼 가져와 전투에 대비했다.

    ‘휘유…… 정상적인 전투는 어렵겠어.’

    정천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축제를 명령한 게 자신이었으니 화를 낼 수도 없다. 오히려 주변 수뇌부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감내하느라 뒤통수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자식들이…… 지들도 좋다고 퍼마셔 놓고는…….’

    수뇌부들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받으면서 그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샤칼!”

    “네, 주인님!”

    “마법 큰 거 쏠 수 있겠냐?”

    “7서클은 무리입니다만 6서클 마법이라면 열 번까지 가능합니다.”

    “좋아, 준비해! 놈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네가 먼저 마법으로 조져 놔!”

    “예, 주인님!”

    샤칼은 정천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에 주저앉아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헤이먼! 기사들과 병사들더러 성벽 위로 올라오라고 해. 기사들은 창을 던진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헤이먼은 군례를 올리고 부리나케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의혈맹 소속이라기보다 정천우 개인에게 속해 있는 인물이라 맹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람과 소통을 위해서 정천우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정천우를 지칭할 때 맹주라고 했다.

    헤이먼이 명령을 전하기 위해서 내려가자 정천우는 딱히 다른 사람에게 시킬 일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병사들과 기사들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만약 적에게 공성용 병기가 있다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공성용 병기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지금의 위기를 만든 사람이 자신이었으니 책임을 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소림?”

    정천우는 아직 먼 거리에 있는 선두의 기사를 살피다가 의아한 얼굴로 한마디 툭 던졌다.

    기사의 갑옷에 새겨진 글자는 ‘불(佛)’이었다. 가슴 한복판에 새겨진 붉은 글자.

    지난번 무당파에서 승전을 축하할 때 찾아왔던 공지대사의 갑옷에 새겨진 글자와 같았다. 그래서 정천우는 다가오는 병력이 소림파라고 생각한 것이다.

    “맹주님! 그럼 무림맹이 저희를 공격하러 온 것인가요?”

    “이거 큰일이군. 설마 정도련과의 전쟁이 벌써 끝났다는 말인가?”

    주소용 후작이 놀란 얼굴로 묻자 팽선웅 백작은 그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림파가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이미 정도련과 벌인 전쟁이 막을 내렸다는 의미다. 1만에 가까운 병력이 선발대일 거라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무림맹과 정도련이 치열하게 싸워 상잔하는 게 의혈맹의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무림맹의 승리로 끝났다면 의혈맹에 치명적이다.

    그만큼 전력은 온전히 보전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더불어서 정도련의 전력까지 흡수한 상태로 말이다.

    팽선웅 백작의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정천우의 얼굴도 살짝 굳어졌다.

    그의 말처럼 무림맹과 정도련의 전쟁이 빨리 끝났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진다. 남궁세가를 안정시키고서 곧바로 정도련의 퇴로를 막을 생각이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정도련이 무림맹과 박 터지게 싸움을 벌이게 하고서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는데, 그 계획이 초반부터 틀어진 것이다.

    “으음…… 아무래도 소림파가 맞는 듯합니다. 무림맹의 기사도 몇 명이 함께 있습니다.”

    눈에 내공을 집중해 살펴보던 정천우가 침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가슴에 ‘불(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람 외에 ‘무(武)’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람도 있었다. 무림맹을 뜻하는 글자였기에 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렇게 발 빠르게 무림맹이 의혈맹을 견제할 줄은 몰랐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불씨를 제거하려 하다니, 정진석 공작은 정천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치밀하고 악랄한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정진석 공작!”

    정천우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진격해 오는 저들 사이에 정진석 공작이 있다면 단숨에 뛰어 내려가 숨통을 끊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남궁세가의 영지성은 점차 치밀한 살기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정천우가 있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살기로 변질되어 주변을 잠식하는 중이다.

    그 숨 막힐 듯한 살기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정천우를 바라보던 수뇌부조차 함께 전의를 불태우면서 성 밖을 주시했다. 그러는 사이, 의혈맹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성벽 위로 질서정연하게 올라왔다.

    성벽 위로 올라온 기사들은 저마다 손에 창을 들고 대기했다. 궁병들은 크로스보우를 장전하고 언제든 발사할 수 있도록 적들을 겨누었다. 보병들은 기름 솥과 돌덩이와 같은 농성용 물자를 지고 올라와 착실하게 공성전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제군들은 절대 무리하지 마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저들은 보급이 부족하다!”

    정천우가 적진을 살피고는 전의를 불태우는 의혈맹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실제로 적이 끌고 온 보급 마차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마차 열 대가 고작이었다. 마법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1만 명의 인원이 소모하는 양을 계산해 보면 아무리 버텨 봐야 보름을 넘기기 어려울 듯했다.

    “우워어어어! 이긴다! 적의 숨통을 끊는다!”

    “우와아아아! 의혈맹! 의혈맹!”

    의혈맹 사람들은 정천우의 말에 힘입어 함성을 지르면서 더욱 전의를 다졌다.

    정천우가 눈에 힘을 주면서 의혈맹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얼굴로 함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달랐다.

    ‘본대가 가까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정천우가 걱정하는 것은 그거였다.

    본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보급 물자를 많이 가져올 이유가 없었다. 보급 물자와 군량이 부족하더라도 뒤따르는 본대가 있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정천우는 그게 못내 불안했다. 자신이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지녔다고 해도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다. 저 많은 숫자를 홀로 감당하려 하면 내공이 먼저 바닥날 테니까 말이다.

    의혈맹이 사기를 끌어올리는 사이, 무림맹은 자리에서 멈췄다.

    뿌연 흙먼지가 한참이나 피어올랐다. 무림맹이 대열을 정비할 때까지 흙먼지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바람이 불지 않아 흙먼지가 제자리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대기하라!”

    정천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제 적진에서 전령이 나오고 무언가 말을 전할 게 분명했다. 분명한 것은, 저들만으로 남궁세가를 공격할 순 없다는 점이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선 방어하는 병력보다 공격하는 측 병력이 두 배 이상은 돼야 한다. 하지만 무림맹의 병력은 의혈맹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공성전을 벌이기에는 어림도 없는 숫자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무림맹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정천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긁으면서 저들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마법 공격이 유일하다. 문제는 튼튼한 성벽을 파괴할 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점이다.

    정천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적진을 바라보는데, 백기를 든 전령 둘이 말을 타고 성에 다가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둘 다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두 기사의 갑옷에는 각각 ‘불(佛)’과 ‘무(武)’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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