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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146화 (14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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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6. 분열(分裂) (2)

    ***

    의혈맹은 남궁세가를 손쉽게 집어삼켰다. 빠르게 진군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남궁세가를 노린 곳은 달리 없었다.

    원래라면 아미파의 영지에 남겨 둔 병력을 시켜 항복을 권유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미파를 방어하기에도 빠듯한 병력이었기에 만에 하나 계략에 빠지기라도 하면 아미파까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결론은 대병력을 앞세워 무혈입성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그것은 주효했다. 의혈맹의 군대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남궁세가는 성문을 활짝 열었으니까 말이다.

    전투까지 생각했던 의혈맹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영지민들이 모두 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 만세! 만세!”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영지민들은 목이 터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댔다.

    이게 혹시 함정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만큼 남궁세가의 영지민들은 의혈맹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단장님, 아마도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헤이먼? 이 사람들이 불안했다고? 뭘?”

    “남은 병력은 없는데 위쪽에는 정도련이 자리 잡고 있잖습니까? 그들이 패퇴해 남궁세가로 퇴각하면 괴로운 것은 여기 사람들일 테니까 말입니다.”

    “뭐, 그럴듯한 이유이기는 하네.”

    정천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헤이먼의 말에 동조했다.

    영지민들의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이었기에 의심스러웠었는데, 헤이먼의 얘기를 듣고는 그제야 긴장을 푸는 정천우였다.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몰던 정천우는 멀리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병든 사람에게 강제로 갑옷을 입혀 놓은 모습?

    ‘이건 또 무슨 짓거리들인지…….’

    정천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남궁세가의 기사(?)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병든 사람에게 갑옷을 입혀 놓은 게 아니었다. 이건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에게 갑옷을 입혀 놓은 거였다. 개중에는 수전증을 앓는 노인도 있는지, 엎드린 상태에서 연신 손을 떠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정천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선 누군가의 조언이라도 듣고 싶어졌다. 역시나 가장 만만한 게 헤이먼이다.

    “헤이먼, 이걸 어쩌면 좋겠냐?”

    “어쩌긴 뭘 어쩝니까? 왜 이러는지 물어보면 되잖습니까?”

    “그렇겠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됐다.”

    정천우가 고개를 흔들고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뒤를 따라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도 말에서 내렸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기사들까지 말에서 내려와 상당한 인원이 바닥에 엎드린 노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정천우는 바닥에 엎드린 노기사들이 부담스러웠다. 싸우지 않고 남궁세가를 차지한 것은 좋으나, 큰일을 보고서 뒤를 닦지 않는 듯 찜찜한 기분이었다.

    노인네들을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꿇린 셈이었다. 그게 아무리 본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이런…… 누가 의자 좀 가져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늙은 기사들의 모습에 정천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늙은 사람들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검버섯까지 피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노쇠한 사람들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쭈뼛거리면서 의자를 가져왔다. 정확히 일곱 개였다. 늙은 기사 여섯과 정천우가 앉을 의자까지 챙겨 온 것이다.

    사람들은 정천우의 눈치를 보고는 우르르 한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앉으시지요.”

    “아, 아닙니다! 어, 어찌 감히!”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정천우가 자리를 권했으나 늙은 기사들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후우…… 그냥 앉으십시오. 보는 제가 다 불편합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정천우가 거듭 자리를 권하자 늙은 기사들은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의자에 앉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의자에 앉고 나서야 늙은 기사들의 부들부들 떨리는 몸에 겨우 안정이 찾아왔다.

    정천우는 늙은 기사들의 가쁜 호흡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이내 운을 뗐다.

    “남궁세가는 우리에게 항복하기로 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희 남궁세가는 싸울 병력도, 기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궁세가의 기사라고는 나이 어린 수련기사와 저희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리고요?”

    “마교 놈들과 더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과 교류한 뒤부터 영주님과 기사들이 변했습니다. 영지민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고, 과중한 세금에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부디 남궁세가의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

    수장격으로 보이는 늙은 기사가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바닥에 엎드리려고 했다.

    정천우는 그런 늙은 기사의 어깨를 잡아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알았으니 자리에 앉아 계셔도 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이쿠! 이런 결례가! 저는 남궁길이라고 합니다. 이 늙은이부터 차례로 남궁장성, 남궁주면, 남궁대영, 남궁현, 남궁봉입니다.”

    남궁길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늙은 기사들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름을 알려 줬다.

    “저는 의혈맹주를 맡은 정천우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뜻이 남궁세가 전체의 뜻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현재 영지에 남은 수련기사 150명과 병사 3천 명을 비롯해 영지민들 모두가 항복에 동의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남궁세가는 의혈맹 소속 영지로 하겠습니다. 지나간 일은 잊고서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앞으로도 영지 전반에 걸쳐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늙은이의 힘이라도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영지민들이 고통받지 않게만 해 주시면 저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남궁길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항복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였던 남궁길이었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서 힘없는 늙은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 한 가족입니다.”

    “크윽…… 주책을 부려 죄송합니다.”

    “잠시 일어나 주십시오. 잠시면 됩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정천우가 부축하다시피 남궁길을 일으키고는 그의 손을 잡아 번쩍 들었다.

    “이제 남궁세가는 의혈맹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의혈맹은 남궁세가에 어떠한 편견도 없이 대할 것을 약속한다. 약속의 증거로 3일간 축제를 벌이기로 한다!”

    “와아아아! 의혈맹! 의혈맹!”

    정천우의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지민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다. 영지민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기에 기쁨이 더욱 컸다.

    아미파에 시비를 건 것은 언제나 남궁세가였다. 그것은 남궁세가의 영지민이 가장 잘 안다.

    전쟁이 벌어지길 원하는 영지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영주인 남궁기정의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아미파를 괴롭힌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고 영지민이 총동원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가 아미파에게 너무나도 많은 잘못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원하고 깔끔하게 의혈맹에 합류시킬 줄은 영지민들로서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보복 없이 식민 영지로 소속되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참이다.

    영지민들은 의혈맹에 항복하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남궁세가의 영지성은 떠들썩했다.

    의혈맹이 입성하면서 선포한 축제 때문에 술꾼들은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셔 댔다. 어디를 가도 적은 돈으로 음식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의혈맹에서 비용의 절반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술과 음식을 파는 사람이나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나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광장 중앙에는 공짜 음식과 공짜 술을 나눠 주고 있었다.

    남궁세가와 의혈맹이 빠르게 친숙해질 수 있게 하기 위한 나름의 배려다. 맨 정신에 교감을 나누는 것보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더욱 빠르게 친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영지를 정천우와 제인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시찰을 핑계로 나왔지만 사실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전쟁이다 진군이다 해서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기에 데이트를 겸해서 나왔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제인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곳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마음에 둔 정천우와 단둘이 나왔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기도 했다.

    “저기 좀 보세요. 사람들이 정말 즐거워 보여요.”

    제인은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은근슬쩍 정천우에게 팔짱을 껴 왔다.

    뭉클한 감촉(?)에 정천우는 ‘제법 근사한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물론 정신은 온통 자신의 팔에 집중된 상태였다.

    “예쁘죠?”

    “그럼요. 제인 마법사님은 언제나 아름다우세요.”

    “…….”

    제인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자신이 가리킨 것은 중앙 광장의 분수대였다. 아름다운 조각에서 물을 쏟아 내는 것을 가리켰는데, 정천우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봐 주기를 그토록 고대했던 제인이었기에 정천우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그 얘기가 아니었는데요.”

    “아! 그랬어요? 뭐 어때요, 전 제인 마법사님과 이렇게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요.”

    “…….”

    제인은 표현조차 없던 정천우가 자신을 칭찬하자 달콤한 기분이 들면서도 부끄러워졌다.

    팔짱을 낀 정천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꾸 심장이 두근거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그와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잔뜩 준비해 왔던 말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겨우 한마디 칭찬을 들었을 뿐이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사람들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뭐,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요.”

    정천우는 한쪽 구석에서 하북팽가의 병사와 영지민이 주먹질을 해 대는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분명 싸우고 있지만 싸우는 당사자나 그것을 지켜보며 박수를 쳐 대는 사람들이나 분위기가 심각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굳이 시찰을 더 하는 것보다 제인과 근사한 곳에서 분위기나 잡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 마법사님.”

    “그냥 제인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인은 붉어진 얼굴을 한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천우는 그런 제인의 행동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은 제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가 정천우의 눈과 딱 마주쳤다.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에 제인은 살포시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풉!’

    정천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그저 제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실망시킬 생각은 딱히 없었다. 자신도 동대륙의 다른 사람들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녀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 왔으니까 말이다.

    막 정천우가 제인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 제인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입술을 훔치려 할 때였다.

    뎅, 뎅, 뎅, 뎅!

    위급함을 알리는 다급한 종소리가 영주성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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