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42화 (142/200)
  • # 142

    Chapter 35. 신위(神威)를 보이다 (4)

    정천우가 손가락으로 마교 기사의 이마를 밀어내자 그의 상체가 기우뚱하면서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넘어진 충격을 받기가 무섭게 갑옷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 꺽꺽대던 마교의 기사는 이내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이놈은 아니고…….”

    정천우는 쓰러진 마교의 기사를 발로 툭 건드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또 다른 마교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짙은 마기를 뿌려 대었다. 벌건 두 눈으로는 질식할 정도로 위협적인 살기를 쏘아 보내는 중이었다.

    “이놈들은 좀 다르네?”

    정천우는 4명의 마교 기사들을 둘러보면서 역천검을 천천히 들었다.

    한 명씩 싸운다면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지만,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조금 벅찰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살기에 맞서서 기세를 끌어올리는 게 먼저였다. 자칫 상대방이 보내는 살기에 눌려 몸이 굳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우웅!

    단전을 흔들어 더욱 강하게 내공을 움직였다. 그러자 정천우의 얼굴이 한차례 붉은빛을 띠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전신에 활력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정천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내공이 부족해.’

    그랬다.

    무리하게 움직인 대가였다.

    극성으로 경공을 발휘해 성문을 부수고 기사와 병사들을 해치우면서 도착했다. 비록 약한 상대였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공은 소모된다.

    자신을 노려보는 네 놈의 실력은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최상의 몸 상태에서도 약간은 버거울 수 있는 정도의 놈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절반 수준의 내공만 남았다.

    ‘차라리 튀어?’

    정천우는 살기를 뿌려 대는 마교의 기사 놈들을 쳐다보면서 주판알을 튕겼다. 일단은 작전상 후퇴를 했다가 하북팽가의 기사들과 합류해서 공격한다면 훨씬 쉽게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천우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4명의 마교 기사 중에서 한 놈이 비웃음을 흘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도망치려고? 그러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감히 내 영지를 망쳐? 철수할 때 하더라도 얌전히는 물러날 수 없지.”

    “……임철중 백작?”

    정천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화산파의 영주가 아니라면 ‘내 영지’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껏 만나 보았던 어떤 마교의 기사보다도 진한 마기를 풍긴다.

    “그렇다. 내가 바로 임철중 백작이다. 비겁한 하북팽가 놈들. 네놈들이 감히 화산파를 넘보다니, 언제고 반드시 갈아 마셔 주겠다.”

    “뭐야? 튀겠다는 거야?”

    “웃기는 소리!”

    임철중 백작은 콧방귀를 뀌며 소리쳤다.

    “저기 저건 뭔데?”

    “흥! 작전상 후퇴일 뿐이다.”

    “말이나 못하면…….”

    정천우는 헛웃음을 흘리며 혀를 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거나 도망치겠다는 말이다. 임철중 백작의 뒤편에서 음침하게 생긴 마법사가 연신 마법의 언어를 중얼대면서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는 중이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싸우게 하고서 정작 제 놈들은 도망치겠다는 의미다. 개자식들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

    “우습군. 네깟 놈이 뭔데?”

    임철중 백작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이제껏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3명의 마교 기사가 임철중 백작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천우의 기세가 달라지는 것을 깨닫고 다가온 것이다. 임철중 백작 혼자만으로는 상대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칫! 눈치 빠른 새끼들!”

    정천우는 입맛을 다시고는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다른 놈들이 끼어들기 전에 해치우려고 했는데, 놈들이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파즈즛!

    정천우가 단전의 내공을 역천검에 몰아넣자 뇌전의 기운이 일어나기 무섭게 하얀빛으로 변했다.

    그러자 임철중 백작을 비롯한 마교 기사들의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졌다.

    “……!”

    임철중 백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롱소드를 뽑았다.

    오랫동안 싸우고서도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낼 수 있다니!

    어쩌면 이번 영지전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지. 내가 가진 모든 걸 한순간에 박살 낸 놈이니까.’

    임철중 백작의 눈에 푸르스름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가 유형화되어 빛나는 것이다.

    임철중 백작은 천천히 롱소드를 들었다. 상대가 마스터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했을 거였으면 진작에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믿는 게 있다.

    자신 역시 마스터에 근접한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포진한 마교 소속 기사들 역시 자신보다 부족하지만 어쨌든 상당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 넷이면 마스터 하나쯤은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임철중 백작이 정천우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반드시 놈을 죽인다. 저놈을 살려 두었다간 대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힘이 빠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라.”

    “큭…… 염려하지 마쇼.”

    “제이제이의 말이 맞아. 그리고 임철중 백작…… 우린 네 녀석의 부하가 아니야.”

    “도리아! 지금 한가하게 자존심 싸움이나 할 때가 아니잖아.”

    “제이제이,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다른 사람 기분도 생각해 줘야 하잖아. 저 녀석, 교주님이 조금 예뻐해 준다고 너무 기어올라.”

    도리아는 플랑베르주(물결 모양의 날을 가진 양손검)를 어깨에 턱 걸쳐 놓고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임철중 백작을 노려보았다.

    곤란해진 것은 제이제이었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성격 까칠한 도리아가 기어이 임철중 백작을 자극하고 말았다.

    제이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할버드를 쥐고 선 휴발론을 쳐다보았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휴발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역시 도리아의 말에 동조한다는 의미였다.

    제이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트러블이 생기기 전에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죽여!”

    제이제이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정천우를 향해 롱소드를 앞세우고 돌진했다. 그러자 나머지 마교의 기사들도 각자의 무기를 앞세우면서 튀어 나갔다. 도리아가 내던진 말에 발끈하려던 임철중 백작 역시 3명의 마교 기사들과 함께 달려들었다.

    “꺼져!”

    정천우는 임철중 백작과 마교의 기사가 달려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합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찧고 떠드는 사이 내공을 잔뜩 끌어모아 역천검에 마구 퍼부었다. 엄청나게 응축한 내공이 폭발하면서 역천검이 어지럽게 공간을 갈랐다.

    콰과광! 콰광! 쿠구궁!

    정천우의 역천검이 상대의 무기에 맞부딪칠 때마다 뇌전을 일으키면서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혼원벽력도법 제사초식, 뇌성벽력(雷聲霹靂).

    역천검에서 뇌전의 기운이 일어나 사방으로 뻗었다.

    “컥!”

    “크흑! 으아악!”

    “아악!”

    “빌어머그을!”

    마나를 최대로 끌어올린 채 공격해 가던 4명은 자신의 무기를 통해 파고드는 뇌전의 기운에 비명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었다.

    정신이 아득해 올 만큼 끔찍한 뇌전의 기운이 전신을 관통했다.

    “무슨 이런 개…… 피햇!”

    가까스로 고통에서 벗어난 임철중 백작은 정천우의 몸이 여러 개로 늘어나면서 달려오는 모습에 경악성을 토했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었다. 아니, 늦었다기보다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뻔한 공격이었다. 마스터에 거의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그랬다.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마교의 기사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을 게 뻔하다.

    “제, 제길!”

    임철중 백작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롱소드를 고쳐 쥐었다.

    마나를 극성으로 뽑아 올리자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에게 투덜거렸던 도리아는 잠깐 몸이 마비되는 사이에 머리통이 날아갔다. 제이제이는 그런 도리아를 구하려다가 깨끗하게 목이 잘렸다. 항상 묵묵하게 임철중 백작의 곁을 지키던 휴발론은 할버드와 함께 팔과 머리를 동시에 잃었다.

    “뇌전의 기운을 품은 마나라니…….”

    임철중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마나라는 건 속성을 가질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마나에 속성을 지녔던 사람은 동대륙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뿐이다.

    “……설마!”

    임철중 백작은 이제 막 휴발론을 죽이고서 자신에게 몸을 돌리는 정천우의 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에 휩싸인 상태라 역천검의 본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임철중 백작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마스터와 일대일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감이 지나쳤다.

    아니! 무모했다.

    마스터에 근접한 자신과 최상급 베테랑인 3명의 마교 기사라면 충분히 정천우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교 기사들은 특유의 괴이한 기술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죽었다.

    어째서 마스터가 그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도?’

    임철중 백작은 이동 마법진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를 흘깃 쳐다보고는 초조해졌다. 두 시간을 넘게 저것에만 매달리는 마교의 마법사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의 다른 식구와 가신들을 피신시킬 때 함께 움직일 것을 그랬다.

    아니, 애초에 영지의 마지막까지 함께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게 실수다. 상황이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난 뒤였다.

    복잡한 임철중 백작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인지, 정천우는 느긋하기만 했다.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좀 밟아 줄까?”

    정천우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가방에서 드로잉 나이프를 꺼냈다. 그러고는 장난처럼 손목만을 이용해 던졌다.

    마나를 품은 드로잉 나이프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면서 공간을 갈랐다.

    “커헉! 우욱! 으아아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법을 완성해 가던 마교의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목에 드로잉 나이프가 박히는 바람에 주문이 끊겼다. 목이 꿰뚫리는 충격과 함께 마법 구현 실패로 마나가 역류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다. 바닥을 뒹굴면서 괴로워하던 마법사는 한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지독한 놈!”

    임철중은 빠져나갈 방법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애들한텐 싸우라고 지랄하고서 너만 튀려고 그랬냐? 너도 참 개새끼다. 그지?”

    “……닥쳐라!”

    정천우의 이죽거림을 들은 임철중 백작은 롱소드에 마나를 모조리 집어넣으면서 씹어 뱉듯이 소리쳤다.

    단순히 마나만 끌어올린 것이 아니다. 최후라는 걸 예감한 그는 마교의 역혈대법(逆血大法)을 사용했다.

    피부 위로 혈관이 툭툭 튀어나오고 몸이 부풀었다. 과도한 혈류의 흐름으로 눈의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벌겋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정천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그거냐?”

    “흐흐흐…… 어디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겠다.”

    임철중 백작이 음습한 웃음을 흘리면서 이를 드러냈다.

    배우기만 했지 사용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도망칠 궁리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신에 터질 듯이 흐르는 힘과 마나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상태라면 마스터의 경지도 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철중 백작은 눈앞으로 롱소드를 들어 올렸다.

    즈즈증…….

    “크흣! 하하하! 으하하하!”

    임철중 백작은 하얀빛을 뿜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를 내려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역혈대법을 사용하면서 늘어난 내공과 육체적인 힘은 마스터의 경지를 선물로 주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젖힌 채 웃음을 터트리던 그는 롱소드를 앞으로 쭉 내밀어 정천우를 겨누었다.

    “네놈은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말아야 했다!”

    0